소설리스트

4화 (4/236)

* * * 

“묵위.”

“예, 가주님.”

단목세가주인 단목무광의 부름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 흑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상당한 경지의 은신술이었다. 묵위는 오랜 세월 가주를 보필하고, 단목세가를 지켜온 그림자였다. 그는 단목세가의 가주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목무광의 물음에 묵위가 답한다.

“기회를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회는 이제까지 몇 번이고 줬지 않나?”

“장룡 도련님이 스스로 저리 말한 적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후우···.”

단목무광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단목세가의 망나니 단목장룡. 자기 아들이지만 어디 내놓기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래, 마지막.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자네가 감시해주게. 또 허튼 행동을 하려고 하거든 무력을 행사하더라도 막아주게나.”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묵위는 그림자처럼 공간에 녹아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천재가 무공을 익히는 법

“으음.”

단목세가의 무공 서고.

퀴퀴한 책 내음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냄새에 과거의 향수를 잠시 만끽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뗀다. 아주 기초적인 무공서부터 꽤 상승 무공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서고의 모든 서적을 읽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하도 많은 무공서를 읽고 분석해왔기에 이제는 제목만 보고도 얼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무공서의 제목이란 무공의 본질을 관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적당히 선별해서 읽을 생각이었다.

처음 손에 든 것은 팔십일식유성환상검(八十一式流星幻像劍)이라는 아주 긴 제목을 가진 무공서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무공서를 넘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책을 읽는 시늉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무공서의 내용은 모두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었다.

‘으음, 그래도 예전보다는 읽는 속도가 느려지긴 했군.’

그래도 범인들이 글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빨랐다.

일 각이 지나기도 전에 팔십일식유성환상검을 속독했다.

‘단목세가의 검은 환(幻)과 쾌(快)가 중점이 된다. 쾌로서 환을 구현하는 것이 특징이군. 이러한 무공은 피나는 수련이 필요하다.’

뭐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무공은 착실하게 초식을 익혀야 한다.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심지어는 자다가 일어나서도 초식을 펼칠 수 있게 수련해야 한다. 단순히 쾌만을 추구한다면 모를까, 환검을 펼치려면 한 치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더 읽어보자.’

그렇게 중요해 보이는 서적을 죄 읽어나갔다.

처음 한 권을 읽을 때는 일 각이 소요됐지만,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진다. 몸이 적응하는 것이다. 잠시만 걸어도 지쳐버리는 하찮은 몸뚱이였기에 가만히 서서 책을 읽는다고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세 시진이 지났을까?

총 스무 권의 무공서를 모두 읽고,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으음··· 해우심법(海雨心法)은 딱히 모난 구석은 없지만, 특징 또한 없다. 급할 것은 없지만 이 심법으로는 내력을 모으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적당히 마공(魔功)과 섞으면 될 것 같군.’

사실 대기만성을 추구하는 정종심법과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내력을 모을 수 있는 마공심법을 조화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정종심법의 안정성과 마공의 속도를 결합하는 게 쉽다면 무림인 대부분은 고수에 반열에 올라있을 것이다. 절세의 무공은 희귀하다는 데에 그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무공서를 접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또한, 무공을 직접 익히지 않더라도 장단점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땐 이 재능을 썩히기만 했었지.’

이젠 다르다.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어.’

아무리 내가 무공의 장점만을 가져와 개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익히는 사람의 재능이 형편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이 부분은 무공을 실제로 익혀봐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무공을 정리하자. 그리고 살부터 뺀다.’

살이 파묻힌 상태로는 제대로 무공을 익힐 수 없다.

뭐 이렇게 살찐 상태로 익혀도 좋을 무공을 몇몇 알고 있긴 했다. 축골공(蓄骨功)을 기초로하여 살을 압축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말라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 힘을 쓸 때는 육신의 무게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공은 허를 찌르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높은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겐 통하지 않는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목표하는 것은 아주 드높았기에 기초부터 착실히 쌓아나가야 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어떤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게 강해져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무(武)였다.

그렇게 서고를 빠져나가는 중.

묘한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춘다.

‘음?’

뭔가 시선이 느껴졌던 것 같은데···.

과거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라던 육신이었다면 숨어서 날 지켜보는 시선도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육신은 너무도 둔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알아챌 수 없다.

‘생각이 너무 많아진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새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묵위.

그는 전대 가주인 단목운뢰 때부터 단목세가의 그림자로 살아왔다. 실제 나이는 지금의 가주보다도 많았다. 물론, 그의 무위가 가주를 넘어서는 건 아니었지만 단목세가 내에서 그의 경지는 가장 높은 축에 속했다.

그는 지금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단목장룡을 어릴 때부터 봐왔던 묵위. 

어릴 적, 정확히 말하면 단목장룡은 외가가 망하기 전에는 참으로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대단한 재능은 아니었지만 성실했기에 무공도 열심히 익혔다. 단목세가는 예로부터 명망이 높은 가문이었기에, 묵위는 냉정하고 잔인한 성정을 가진 장남 단목청야보다 단목장룡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단목세가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명문가라는 이유가 아니라, 가주의 인성이었으니까.

하지만 단목장룡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엔 어린아이가 그런 큰일을 겪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자위하며 그를 측은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그의 살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고, 단목세가의 귀중한 재산을 기루에 바치는 것을 본 묵위의 마음은 실망과 분노로 변해갔다.

단목세가의 가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의 후견인이 되어 노후를 살아볼 생각까지 했던 묵위에겐 단목장룡의 타락이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오늘.

단목장룡이 가주의 앞에서 보여줬던 당당함은 묵위의 심경을 흔들었다.

이제는 달라진 건가?

죽음과 마주하고 왔더니 사람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중원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단목장룡을 믿어보고 싶었다.

‘말뿐이었나···.’

단목장룡이 청년이 된 이후로 서고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면 서고에 종일 붙어있거나, 무공서의 대출허가를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말 달라졌다면 무공에 관한 태도를 바꿀 테니까.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던가.

단목장룡은 서고에서 대충 무공서를 빼 들고, 읽는 척만 할 뿐이었다. 묵위 자신도 팔십일식유성환상검의 묘리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단목장룡이 그것을 일 각 만에 다 읽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 이후로 단목장룡은 적당히 있어 보이는 무공서만 뽑아 휙휙 넘겼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으며 후에는 지루해하는 표정까지 보여주었다. 은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지켜봤음에도 묵위는 단목장룡의 표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가주님께서 나를 보내 지켜보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단목장룡 또한 가주의 그림자가 되어 수행하는 묵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물론, 혼이 뒤바뀐 지금은 단목장룡이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를 몰랐지만, 묵위는 단목장룡이 꾀를 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런 얄팍한 거짓을 고하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허허···.’

실망과 분노 그리고 씁쓸함이 묵위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묵위는 단목장룡에 기대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가주의 명령이 있었기에 단목장룡을 따라갔다. 또 기루에 들러 단목세가의 검법을 천박한 검무로 둔갑시키는 짓 따위를 한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교육을 시켜줘야 했다.

*  *  *

“새붕아.”

“예! 도련님!”

어째 오늘 단목세가에 다녀온 이후로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이놈과 예전의 나는 어떤 관계였을까? 망나니라 불리는 단목장룡에게 이리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뭔가 춥지 않아?”

“춥다고요? 땀을 뻘뻘 흘리시는데요? 그리고 춥다기보단 시원한데요?”

“···.”

이새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 더워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가 싶어서 잠시 쉬기로 했다.

“오늘 점심도 드시지 못하셨죠? 저녁은 많이 차리도록 할게요!”

“아냐. 아침과 똑같은 양으로.”

“예에···?”

“살은 빼야지.”

‘이렇게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면 살을 빼긴 쉬울 것이다. 너무 급하게 뺀다면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 적당히 조절하긴 해야겠지만.’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저녁을 먹는다.

식사했음에도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위에서 천둥소리가 난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낸다. 여기서 배고픔을 참지 못하면 더 힘들어진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니까. 이제 쉬어라.”

“예, 도련님!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래, 고맙다. 그리고 내일은 내가 부르지 않거든 문을 열지마라.”

“예! 알겠어요!”

나는 이새붕을 쉬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할 일은 무공을 창안하는 것이다. 나의 몸에 맞는 무공을.

‘일단 검법이나 보법 같은 것은 후에 가다듬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심법.’

나는 무공에서 내공(內功)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공이란 대자연의 힘을 육체에 담는 것. 아무리 검을 잘 쓰는 무인이라 할지라도 내공이 없다면 그걸로 끝이다. 병기나 육신에 내력을 담아야지만 비로소 무인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내 육신은 단순히 몇 걸음을 옮겨도 숨이 찼으니 빠르게 근육을 키울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단전에 내력을 채워넣고, 내력을 바탕으로 육체 또한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자, 구결을 정리해보자.’

온갖 내공 심법의 구결들이 뇌리에 스쳐간다.

내 몸을 베어냈던 혈우검마가 사용하는 혈영심법, 아버지가 익히고 있는 신공과 신교가 전쟁을 일으켜 빼앗았던 전리품들까지. 그중에선 정파의 기둥이라는 구파일방의 심법도 존재했다.

내가 아는 무공 중 해우심법과 조합할 수 있는 구결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빈 종이에 적어나갔다. 어차피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기에 제대로 정리하는 것은 아니었고, 나만 알아볼 수 있게끔 구결을 정리해나갔다.

그렇게 다섯 시진.

미칠 듯이 잠이 쏟아졌지만 참아냈다. 아니, 참았다기 보단···.

‘왜 재밌지?’

무공을 분석하고 개조하는 것은 내 임무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이 작업이 참으로 귀찮고 재미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재밌다. 예전의 나였다면 한 시진이면 끝날 작업을 밤을 새가며 몰두했다.

‘모르겠다. 그래도 작업의 능률이 올라갔으니.’

만족스러운 결과본.

일단 이름은 단목세가의 해우심법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달랐다. 마공에 담긴 묘리와 정종심법에 담긴 이치를 조화했다. 사실 마공이나 정종십법이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다. 만류귀종이라 했던가? 정파든 사파든 절대자에 오른 이들은 무공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가지곤 한다.

나의 아버지였던 그 사람은 분명히 절대자라 불리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아무리 내가 천재라도 그가 없었다면 이러한 수준까지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복수는 할 겁니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난 신교의 법칙을 최대한 어기지 않았다. 평화로운 인생을 살려 했지만, 날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과거였다면 바로 잠이 들었을 테지만, 무공의 정수가 담긴 심법을 앞에 두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익히고 싶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공심법의 구결을 점검하고, 그것대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쓰으읍···.”

코를 통해 자연의 기운이 신체 내부로 들어온다.

개조하기 전의 해우심법이었다면 그걸로 끝이다. 쥐꼬리만한 기운을 대주천하여 차근차근 단전에 쌓아올린다. 하지만 내가 개조한 심법은 달랐다.

“후우우···.”

코로 흡입하는 동시에, 입으로 내뱉는다.

운기행공을 하는 동안엔 끊임없이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인다.

사실 이런 방식은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내부로 들어온 자연의 기운은 조금만 삐끗해도 세맥을 찢어버리니까. 하지만 그것마저도 제어할 수 있는 게 내가 개조한 내공심법. 내력이 한쪽에 과하게 쌓였다 싶으면, 세맥의 바깥으로 몰아내 근육과 뼈에 머물게한다.

천마신공.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정수가 해우심법에 녹아든 것이다.

신교에서 이것을 안다면 나를 죽이려 특급 살수를 보낼 정도로, 아니 어쩌면 교주가 직접 나설 정도로 중대한 일이었다. 뭐 그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땐 걷잡을 수 없을 테지만.

‘좋아···. 그래도 명문가 출신이라 다행이야.’

몸은 뚱뚱했지만, 세맥은 비교적 깨끗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내공심법을 익혔다는 증거.

그 작은 발판과 하늘의 재능이 결합하여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