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게 왜···.’
그녀가 주었던 이별 선물. 그 이후로 만날 수 없었기에 이 팔찌를 보며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아마 혈우검마에게 죽기 전까지 이것을 팔에 차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내 물건은 혈우검마와 수라대가 전부 회수했을 텐데.
‘아니면 그냥 내 시체는 늑대 먹이로 던져줬을 수도 있겠군. 혈우검마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나는 팔찌를 꽉 쥐었다.
고작 주먹질 한 번에 숨이 넘어갈 듯했지만, 이것만은 놓칠 수가 없었다.
“도, 도련님!”
이새붕이 깜짝 놀라 나를 부축했다.
“크허으윽···, 너 이 새끼··· 크윽···.”
아무리 걷는 것도 벅찬 몸의 주먹질이라도, 정확히 급소를 가격했기에 단목경은 땅에 엎드린 상태로 일어서지 못했다. 단목세가 장원의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이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3공자님···!”
“대체 무슨···?”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단목경을 부축했고, 다른 이들은 놀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어떻게 네가?’
단목장룡이 과거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강자에게 쓴소리 한번 내뱉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단목경은 단목장룡에게 강자의 축에 들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조금 전에도 험한 말을 쏟아낸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단목세가의 공자였다.
내가 단목경을 패버린 것은 맞지만, 그들이 내게 따질 위치는 아니었다.
“동생을 잘 부탁해.”
“예···?”
“그럼 이만.”
당황해하는 무사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단목세가의 장원으로 걸어갔다. 이새붕은 몹시 흥분한 얼굴로 내 옆에 따라붙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3공자님을 한 방에···.”
“별거 아니야.”
“3공자님은 또래 중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들었는데··· 별거 아니라고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숨이 찼기 때문이다. 이새붕은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래에서 적수가 없다고?”
“예! 근방의 문파와 가문에서는 3공자님을 무공의 천재라고···.”
“푸웃···.”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재? 저게 천재라고? 이 빌어먹게 굼뜬 몸뚱이의 주먹에 일격을 허용한 게?
뭐 솔직히 검을 들고 정면으로 싸웠다면 내가 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목경은 결코 천재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천재였다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저 정도 수준은 솔직히 무림에서 너무도 흔했다.
“됐고. 다시 걷자. 차라리 아버지의 전각 앞에서 쉬는 것이 낫겠다.”
“예, 부축해드릴까요?”
“부축은.”
천천히 걸으며 가주의 전각으로 향했다.
‘얼른 살을 빼야겠다. 무공이고 뭐고 살을 빼는 게 급선무야. 이놈은 언덕에서 구르지 않았더라도 아마 숨이 막혀 죽었을 게 분명하다.’
가주전에 도착하여 생각했다.
옆을 보니 기분이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이새붕의 얼굴이 보인다.
그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어디서 샀다고?”
“객잔촌 근처에 장신구를 파는 노점이 있는데 거기서 샀어요.”
“끼지도 못할 걸 뭣 하러?”
이게 의문이긴 했다. 이 팔찌를 손목에 차기엔 살로 덮인 손목이 너무 두꺼웠으니까.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선물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단목장룡에게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지금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령, 언젠간 다시 볼 수 있겠지.’
10년이 지났어도 이렇게 다시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보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때와 같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지라도 한 번은 보고 싶었다.
“들어가자.”
“예.”
전각을 지키는 무사에게 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 무인은 내 방문에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가 판단할 것은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전각 내부에 다녀온 무사.
“가주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예, 도련님. 잘하고 오세요!”
뭘 잘하라는 건지···. 손을 저어준 후에 가주전으로 들어간다.
전각 내부는 화려한 장식물이 딱히 없었다. 단목세가의 가주 단목무광은 검소한 성향인 듯했다. 실제 성격은 만나봐야 알겠지만, 이새붕의 말로는 근엄하고 깐깐한 성격이라 했다.
똑똑.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니 들어오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예를 차려 인사했지만,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가주 단목무광을 바라본다. 그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시선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단목경도 내가 병상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주가 모를 리가 없다.
‘아들이 거의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를 보고 있자니 진짜 아버지가 떠올라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추 의원에게 들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예, 그렇···.”
움찔.
단목무광의 몸에서 막대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고수는 기세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었다. 쥐꼬리만 한 내공을 가진 내가 대항할 수준이 아니다. 안 그래도 지친 상태인데 고수의 강렬한 기세와 마주하니 두 다리가 벌벌 떨린다.
‘젠장맞을···. 왜 다짜고짜···.’
“그런 거짓말이 내게 통할 줄 알았더냐?”
“예?”
기억을 잃었다는 걸 거짓말로 생각하는 건가?
“네놈은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천박한 기녀들과 어울리는 것도 모자라서 나들이를 가서 언덕에서 굴렀다지? 내 그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수치스러웠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더욱 강한 기세를 내뿜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제는 기억을 잃었다고 거짓을 고해?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강렬한 시선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기세에 몸이 떨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이 아닙니다.”
“거짓이 아니다?”
“예.”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빛. 딱 봐도 강직해 보이는 얼굴이 그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이들은 시선을 피하는 것을 싫어한다.
거의 일 각 동안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으니, 단목무광의 눈에 이채가 스친다.
“확실히 뭔가가 달라지긴 했군.”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습니다. 과거의 제가 어땠는진 시종인 이새붕에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서히 그의 기세가 걷힌다.
“과거의 너라···. 진짜 기억을 잃었는지,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현재는 과거의 네가 만든 것이다. 모두 현재의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다.”
“···.”
단목무광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단목장룡의 몸을 차지한 사공천의 혼이 찔끔할 정도로. 잘못된 선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과거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민다.
“예, 감당하겠습니다.”
“감당? 그 웃기지도 않은 몸뚱이로 감당을 하겠다고?”
당목무광의 서늘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는다.
확실히 내 몸은··· 비정상적이긴 했다.
“감당하겠습니다.”
“어찌 감당하겠느냐?”
“일단 살부터 빼겠습니다.”
단목무광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네가? 네가 살을 뺀다고?”
“예, 살을 빼고 다시 무공을 수련하겠습니다.”
“너는 무(武)에 재능이 없다. 과거를 감당하려거든 다른 길을 생각하도록 해라. 차라리 글을 익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제 길은 그곳에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정신도 나가버린 모양이구나. 뭐··· 좋다. 이제까지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 있더냐? 마음대로 해라. 살을 빼든, 무공을 수련하든 네 마음이니까. 허나 만에 하나라도 다시금 가문의 명예를 먹칠하는 날에는 널 파문시킬 것이다. 명심하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가보거라.”
그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
“할 말이 남아 있더냐?”
“제가 기억을 잃어 가문의 무공 또한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무공 서적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서고 출입을 허가해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보아라.”
서고에 무공이 전부 있나 보다.
뭐 가주만 익히는 무공은 따로 있겠지만··· 솔직히 그것까진 필요 없었다. 난 단목세가의 무공을 원형으로 한 다른 무공을 익힐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나오는데 단목무광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를 진짜 아버지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사공천의 이름으로 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래, 현재는 과거가 만드는 것. 지금 이 순간도 과거가 된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현실에 충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