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36)

서장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다.

『넌 하늘의 재능을 타고 났다.』

사실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남들과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무공을 갈고 닦아 경지를 쌓아 올려왔다. 그런 기나긴 시간의 고행을 단번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내 천재성이다.

무공의 구결을 잠시 훑어봐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냈으며 핵심만 뽑아내서 다른 무공에 결합시킬 수도 있었다. 너무도 쉬웠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재능이 있었기에 나는 무공에 뜻이 없었다. 재능은 있지만, 그것에 흥미가 없었달까?

나는 흔히 말하는 주색잡기에 빠져있었다.

재미없는 무공 서적을 읽는 것보다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음주와 여인. 무공의 성취감보다 술에 취하는 감각이 더 좋았으며, 절세 무공의 구결보다 여인의 마음이 더 읽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난 그것에 빠져들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망나니가 되었다.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과한 기대를 품었던 어른들의 만족을 적당히 채워주고자 했다. 구결을 이해하는 천재성은 있으나 실제로 그것을 펼치지는 못한다는 ‘설정’을 부여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다.

10대 후반엔 과한 기대가 단순한 관심으로 변했고, 20대 중반을 넘어서자 어른들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아버지는 가끔 찾아와 내게 설교를 늘어놓았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았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던 삶을 살아온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후우, 조금만 무공 수련에 시간을 투자했다면···.’

20살이 넘어간 이후로는 완전히 무공에 손을 뗐다. 가끔 무공 서적만 휙휙 읽고 어른들에게 서신을 전해주었다. 무공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적어서 말이다. 정말 많은 무공 서적을 읽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익히지는 않았었다.

그것들을 실제로 익히고, 활용해보았다면?

과연 지금 이 상황이 달라졌을까?

“죽는 것을 억울해하지 말아라. 이제까지 신교에서 네놈처럼 걱정 없이 즐기기만 한 놈은 없었다.”

백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말한다.

혈우검마(血雨劍魔)라고 했던가? 참으로 무시무시한 별호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있습니까? 전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을 생각도 없고요.”

“죄라···.”

주변이 초토화된 것에 비해 노인의 의복은 찢어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피조차 튀지 않았다. 이곳에서 저 노인이 죽인 인간만 해도 일백은 훌쩍 넘을 것이다.

‘혈영신법이 극성에 도달했나 보군.’

그 혈영신법의 구결도 본 적이 있었다. 

갓 20살이 되었던 해였나?

“네 존재 자체가 죄다.”

“그렇군요···.”

이해했다.

내가 보아온 무공 서적만 해도 수천 권이 넘는다. 구결만 따로 본 것까지 합치면···. 이 세상에서 무공서를 나보다 많이 읽은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뭐 그것을 활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난 존재 자체로 ‘그들’에게 위협적이다.

“자애로우신 소교주님께서는 고통 없이 네놈을 보내라고 명하셨다. 얌전히 목을 내밀거라.”

“···그럼 아버지께선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물음에 혈우검마가 움찔한다.

내 아버지는 내가 속한 단체에서 감히 쳐다보지 못할 지고한 존재였다. 사실 무공에 대해 제대로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짚어줄 때도 있었으니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역시··· 아버지도 동의하셨군요.”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날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슬프네.

아무리 망나니처럼 살아왔어도 어른들의 기대는 충족시켜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죽임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품었다.

“저는 소교주님에게도 쓸모가 있을 텐데···, 아니 혈우검마 장로님의 무공 성취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아깝지 않으십니까?”

“누구나 쥘 수 있는 명검은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내가 다른 곳에 넘어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건가?

그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아니, 그런 부분을 걱정했다면 날 뇌옥에 가둬두기만 했으면 됐다.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냥 날 제거할 생각인 것이다.

“베십시오. 이제 궁금증이 모두 풀렸습니다.”

“저항하지 않는 건가?”

“저항해봤자 뭘 하겠습니까? 혈우검마 장로님이 계시고 바깥에는 수라대(修羅隊)가 있을 텐데요.”

“잘 생각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피에 젖은 검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뇌리에 번개가 쳤다.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묻어두었던 무공의 재능. 사실 이 재능이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실제로 펼쳐보지 않았지만, 구결을 통해 그 힘을 상상 속에서 구현할 수 있었다. 그 상상 속의 세계에서 무공을 수천, 수만 번 펼쳐내서 장단점을 찾아냈다.

죽음이라는 것과 마주하니, 내가 활용하지 않으려 했던 그 무한한 재능이 만개한다.

저 깊은 심연에 박아두었던 무공의 구결들이 휘리릭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기 싫어.’

상상 속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다.

현실에서는 일각이지만, 상상에서는 수십, 수백일이 지나간다. 그 과정에서 현재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무공을 찾아냈다.

‘이혼대법(移魂大法)···!’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문파, 배교(拜敎).

그곳의 무공이다.

그런데··· 이걸 무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던 나조차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상속에서도 감히 펼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은 왠지 이것을 펼쳐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무공은 실패하는 순간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본디 혼과 육은 본래 떨어질 수 없다. 이혼대법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면 죽겠지. 하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 아닌가?

거의 극마(極魔)에 다다른 혈우검마. 내 전각을 포위한 수십 명의 수라대. 평소 무공 수련을 하지 않았던 내가 뚫고나갈 수준이 아니었다. 이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래, 해보자.’

스으으으···!

단전의 내력이 폭주한다. 이혼대법의 구결에 혼을 분리시킨다. 육을 떠난 혼은 곧 소멸되지만, 이혼대법은 내공으로 육이 없는 혼을 온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이게 내 혼인가?’

감각이 점점 무뎌진다. 

목이 베여서 죽는 것일까? 아니면 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감각 자체가 없어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점점 세상이 어두워진다.

조금씩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듯하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깔끔하게 베어진 내 목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캄캄한 어둠이 공간을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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