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14
“야, 왔다! 슈스 왔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외침에 하현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한순간의 실수로 하현은 졸업할 때까지 놀림을 받게 생겼다. 서바이벌 ID 방송이 나가고, 데뷔 전 마지막 단계만을 앞두고 있는 지금 하현은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이번에 몇 등 했냐?”
“방송 나오면 보세요.”
단호한 대답에 선배가 낄낄거리며 재차 물었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한테만 말해봐. 인터넷에 안 올릴게.”
이번 순위 발표식에서 끝끝내 1위를 차지한 하현은 “비밀유지가 규칙이에요.” 하며 저 멀리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저기서 방송 내용 좀 미리 알려달라는 부탁들이 밀려들어서, 하나하나 상대하기도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학교에서 하현은 유명인사가 됐다. 통편집을 하면 아무도 모를 거라는 멍청한 발상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프로필 사진 한 장만으로 모두가 저인 것을 아는데. 그 멍청한 발상의 주인인 하현이 스스로를 원망한 것도 잠시, 이제는 생각이 바뀐 상태였다.
생각보다 순위가 너무 높게 나와 떨어지지 못했을 때는, 삼촌에게 건강상의 문제로 하차하는 거로 처리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다짐 하나 없이, 오로지 지구 하나만 보고 참여한 프로그램에서 이대로 데뷔까지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춤을 배워나가려던 하현은 스스로를 저의 팬이라 칭하며, 이름을 불러주고 슬로건을 흔들어주는 무대 앞 풍경에 반했다. 어찌할 수 없이 단번에 마음으로 훅 들어온 모습이었다. 하차를 하지 않겠다는 하현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벅찬 감정을 참지 못한 지구가 한 시간이나 끌어안고 있었던 해프닝도 있었다.
어떤 노력 끝에 들어온 대학인지 알기에 주변 사람들이 가장 아쉬워했다. 한국예대 수석 입학 정도의 커리어로 고작 하는 일이 아이돌이냐고. 대학을 돌아다니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이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피를 토하며 연습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하현은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 대학에 너무나 크고 원대한 꿈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 주변에서 등을 떠밀어서 온 것뿐이니까. 어차피 졸업 후의 미래는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건데, 그게 조금 빠르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았다.
[형 지금 어디에요?]
[나 지금 갈거야]
[저 학교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갈게요]
[먼저 가 있어요]
[(이모티콘)]
먼저 가 있어요, 를 끝으로 1분간 말이 끊겼다 갑자기 날아온 이모티콘을 보고 하현이 발을 뚝 멈췄다. 살다 살다 지구가 이모티콘을 쓰는 건 처음 봤다. 약간 신선한 충격을 받은 하현이 이모티콘을 꾹 눌러 정보를 알아봤다. 어디서 무료로 주는 것도 아니고 직접 구입해야 하는 것 같은데. 와중에 동그란 눈의 토끼가 비슷해 보여서 웃음이 나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가 이걸 썼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지구 맞아?]
[왜요?]
[아니 이모티콘 쓰는거 처음봐서.. 샀어?]
[아 이거]
[누가 보내준건데]
[그냥 보내준 김에 한번 써봤어요]
분명 이모티콘 보내기 전에 백 번은 더 고민했을 게 뻔했다. 하현 역시 이모티콘을 쓰지 않는 편이라 사놓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샵에 들어가서 체크카드 결제로 같은 이모티콘을 구입했다.
[이모티콘 귀엽다]
[(이모티콘)]
자신이 보냈던 것과 똑같은 이모티콘이 하현에게서 도착했다. 심지어 토끼가 자기 몸보다 큰 하트를 들고 춤을 추는 중이었다. 수업 중에 몰래 연락을 나누고 있었던 지구는 순간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허둥지둥 책상 밑으로 떨어질 뻔한 휴대폰을 잡아낸 지구가 한 박자 늦게 숨을 내쉬며 친구가 선물한 이모티콘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진짜 갑자기 이렇게 치고 들어올 때가 있다니까.
* * *
마지막 방송에서 이뤄지는 최종 미션은 두 사람이 같은 곡을 받아서 무대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둘의 경쟁은 아니지만 같은 곡을 받은 만큼 실력이 비교되고 차이가 극명하게 나는, 팬들 사이의 신경전을 유발하는 방식의 미션이었다.
같은 아이스크림을 고른 사람들이 같은 노래를 맡게 되는 황당한 방법으로 곡을 정하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하현은 지구의 취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대충 달달한 커피 향기가 풍기는 아이스크림을 집어 몇 숟가락 퍼먹고 있었더니 지구가 곧 같은 걸 들고 등장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하현이 뿌듯하게 웃었고, 저의 취향을 완벽하게 간파한 하현을 지구는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커플 하나가 연습실에서 연애질을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아니, 카메라만 열심히 그 장면을 찍고 있었다. 서로의 연습실을 들락날락하며 자연스럽게 붙어서 연습을 하고 쉬기도 했다. 그중 서로에게 기대서 잠깐 조는 장면은 마지막 방송에 송출돼서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음지의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레전드로 남았다.
짧은 연습 기간 동안 지구는 하현에게 춤을 배웠고, 하현은 지구에게 노래를 배웠다. 서바이벌 ID를 촬영하기 이전에도, 2년이나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온 두 사람의 춤과 노래 스타일은 굉장히 유사했다. 지구의 춤선은 점점 하현의 춤선을 닮아갔고, 하현은 지구와 똑같이 호흡하고 박자를 비슷하게 탔다.
비슷하지만 춤과 노래로 완벽하게 갈리는 지구와 하현은 후회 없는 무대를 마쳤고, 당연하게도 데뷔했다. 성원이 탈락하고, 부처라는 별명을 얻으며 급부상한 하현은 부동의 1위로 데뷔했고 지구 역시 바로 뒤에 바짝 붙어 2위로 데뷔 티켓을 거머쥐었다. 프로그램을 하면서 친분을 쌓아온 예준과 휘영, 준이 차례로 데뷔하면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그룹이 완성됐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겠습니다.”
프로그램 방송 동안 김정성 PD를 열심히 두들겨 패던 하현의 팬들은 거의 반쯤 미친 사람들처럼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중에서는 정말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는데, 상현의 옆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울었다. 하현아 사랑해. 하현아, 하현아 내 통장…… 내 통장 비밀번호는…….
“수고하셨습니다.”
MC가 웃으며 데뷔가 확정된 다섯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건넸다. 훈훈한 인사를 받고 내려온 무대 밑에서 이제는 같은 멤버가 될 예준과 휘영, 준에게 각각 인사를 건넨 두 사람에게 두 형이 다가왔다.
“데뷔 축하한다. 밥 한 끼 먹을까?”
“데뷔 축하한다. 너 그 졸업식 날 봤던 후배지.”
완벽하게 같은 말을 동시에 꺼낸 태양과 상현이 서로를 쳐다봤다. 누구신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던 두 사람은 얼떨결에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얘 형입니다.”
“저는 얘 형인데요.”
어색한 분위기로 대화를 시작한 두 형을 내버려 두고 둘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나뿐인 친동생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두 형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동생들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황당해하다가, 갑작스럽게 동질감이 샘솟아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그 사이 하현의 자취방에 도착한 둘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겉옷만 벗어 바구니에 넣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바닥에 누웠다. 막 집에 들어온 상태라 바닥이 차가웠지만 맞닿은 온기가 뜨거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같이 데뷔해요. 형이랑 나랑.”
“응.”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여전히 한결같이 동그란 눈을 빛내는 지구의 볼을 붙잡고 하현이 입술에 짧게 뽀뽀했다. 이제 이런 작은 스킨십 정도는 너무 익숙해서 별것도 아니었다.
“형. 사랑해요. 진짜.”
지구가 하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는 탓에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러웠다.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하현이 잠깐 생각에 빠졌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일곱 살의 동그라미는 벌써 곧 성인을 앞두고 있었다. 키도 많이 크고, 몸도 많이 자랐다. 마냥 둥글던 예전과 다르게 조금은 뾰족해지고 각이 졌다.
소속사를 나가겠다며 울던 작은 어깨가 언제 이렇게 넓어져서 데뷔를 하게 됐을까. 사실 무엇보다 상상하지 못했던 건 하현 자신이었다. 모두가 등을 떠밀기에 어떻게든 매달려 한국예대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저는 대체 어쩌다 같이 데뷔를 하게 됐을까.
“다 형 덕분이에요. 만약 형을 몰랐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스폰 강요를 받았던 날, 하현이 없었다면 정신을 차리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 몰랐다.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금방 털어내고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전부 하현 덕분이었다.
하현은 그냥 웃으며 넓은 등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지구가 혼자서 얼마나 많은 노래 연습을 해왔는지 알았다. 다 내 덕분이라니. 하현은 어이가 없었다. 도움을 받은 거로 치면 저가 백배는 많았다. 해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슬럼프에 빠진 그 잠깐의 찰나도 두고 보지 못하고 바로 끌어올려 준 지구야말로 저에게 구원자였다.
“형의 존재 자체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예요.”
틀린 말도, 과장도 아니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하현이 졌다는 듯이 팔을 밑으로 툭 미끄러트렸다. 어쩌다 이런 애를 만났지. 그날 입학식 축하 공연을 하러 간 자신에게, 길을 잃은 듯 보이는 신입생에게 있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린 자신에게, 이유도 모르고 메시지를 보내라고 댓글을 단 자신에게 하현은 새삼 감사를 했다. 하현이 그렇게 스스로에게 고마워하는 동안 지구도 생각했다. 한국예고에 입학한 자신이, 입학식 날부터 길을 잃은 자신이, 페이스북에서 하현을 찾을 생각을 한 자신이 너무 대견하다고.
“데뷔 축하해.”
“형도 축하해요.”
“너 데뷔하면 바빠지니까 자주 못 볼 각오하고 있었거든.”
“아마 저 혼자 데뷔했어도 형 연락은 꼬박꼬박 받았을 거예요.”
지구가 연예인이 되면 지금까지처럼 만날 수 없음은 당연했다. 쉴 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 하현이 원할 때 만나고, 이제는 둘이 함께 사는 집 같은 이 자취방을 시도 때도 없이 들릴 수 없을 테니 외로워질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단호한 표정으로 연락을 받았을 거라 말하는 지구의 표정을 보니 정말 그랬을 것 같았다. 실제로 지구는 저 혼자 데뷔를 하게 되더라도 절대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아마 지구라면 48시간을 자지 못하고 깨어있는 상황이라도, 졸음을 참아가며 오타와 사랑이 가득한 문자를 보냈을 게 분명했다.
“이제 같이 데뷔했으니까 그런 걱정 없잖아요.”
같은 음악을 함께 부르고, 작업하고. 한 무대를 함께 채우고, 다른 나라를 가고. 카메라 앞에 서고, 내려오고. 어떤 음악을 해도 함께일 텐데.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인 둘의 연예계 생활은 앞으로 쭉 같이 이어질 것이었다.
꼭 아이돌이라는 직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방송 생활을 통해 어떻게 변해갈지 몰랐다. 먼 훗날 하현이 정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무가가 될 수도, 지구가 은퇴 후에 싱어송라이터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확실한 건 무엇이 되든 간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어요.”
무대 위든, 아니든.
[데뷔를 피하는 방법 외전IF,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