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12
건물 앞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던 노란 머리가 지구가 들어가기 전 원래 데뷔 조 멤버였던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구는 입이 무거운 편이지만, 지구 한정으로 표정을 잘 읽어내는 하현 때문에 결국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거 미친놈 아니야. 학교폭력 가해자면서 뻔뻔하게 또다시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들이미는 게 황당했다. 잠깐이나마 스폰 요구를 받은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날부로 거대한 벽을 세운 하현은 성원이 말을 걸려고 하면 한대 패줄 기세로 쳐다봤고, 덕분에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은 채로 첫 번째 촬영이 끝났다.
“저거 안 걸리나?”
“뭐가요? 학교폭력?”
“응. 데뷔하면 걸릴 거 아니야.”
“아버지가 막으신 거예요.”
자식이 잘못된 과거가 있으면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살게 해야지, 그걸 싹 막고 모르는 척 TV에 나가게 두는 부모가 어디 있어. 하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사람을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던 양아치 새끼가 안 그래도 트라우마로 남은 지구의 과거를 계속 들추려고 쿡쿡 찌르는 꼴이 제일 짜증이 났다.
성원을 이 촬영장에 지구랑 놔두고 혼자 집에 있자니 불안해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다음 촬영부터는 여기 못 있는데. 삼촌에게 얘기를 해서 스태프인 척 섞여서 감시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척 봐도 말의 수위를 조절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 혹시라도 도를 넘어선 발언을 꺼낼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바람을 하늘이 들어준 건지 하현은 망했다. 말 그대로 진짜 망했다. 도무지 편집만으로 감출 수 없었던 존재감은 프로필 사진 하나만으로 4등을 찍게 만들었다. 딱 하루 촬영하고 와서 지친 몸을 뉘며 끝났다고 생각했던 하현은 반강제로 조별 미션까지 참여하게 됐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래도 너랑 같은 조라 다행이야.”
운명의 종이 뽑기에서 하현은 지구와 같은 번호를 뽑았다. 거기까지는 참 다행인데 성원도 4를 뽑은 게 문제였다. 차라리 저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어 하현은 위안을 하기로 했다. 또 헛소리를 하려고 하면 본인이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성원은 촬영 내내 두 사람의 속을 박박 긁어놨다. 비아냥거리는 건 기본이었고, 연습에 혼자 오지 않아서 팀에까지 민폐를 끼쳤다. 심지어 조원들이 다 같이 연습하는 중에 혼자 대형에서 빠져서 잠깐만 답장을 보내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하현은 속에서부터 울컥울컥 차오르는 화를 최대한 참아내며 성원에게 좋은 말로 타일러봤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저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무대였으나 지구에게는 달랐다. 이 무대 하나가 데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저런 식으로 해서 무대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릴 거면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첫 촬영부터 하현은 성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아마도 말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아서인 것 같은데, 그게 앙금이 됐는지 점점 더 그랬다. 막 나가자는 식인지 태도는 점점 더 가관이 되어갔다. 와중에 카메라가 꺼진 자율 연습시간만 골라서 저러니까 더 열이 뻗쳤다.
스트레스 받아 하는 하현에게 단 음식을 제공하며 지구는 타이밍을 잡았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서 때려볼까. 저에게는 어떤 식으로 난리를 치든 별로 상관없었지만, 하현을 건든다면 말은 좀 달라졌다. 물증만 안 남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구가 성원을 때려주는 것보다 하현이 성원에게 팩트 폭력을 날린 게 먼저였다. 촬영을 딱 3일 남긴 시점이었다.
“성원 씨. 이런 식으로 하실 거면 왜 하세요?”
“예?”
“지금도 연습하러 와서 계속 놀고 계시잖아요. 동선 맞춰보고 있는 조원들한테 민폐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민폐라는 생각도 안 들면 진짜 양심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럴 거면 그냥 하지 마세요.”
무대를 망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하현에게 성원의 게으름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정말 많이 참았다.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조별 미션에서. 단호한 표정을 보며 지구는 와중에 한 번 더 반했다. 형 멋있어.
“시발, 뭐라고요?”
결국 싸움이 터졌다.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성원의 공포의 주둥아리가 열리면서 험악한 소리들이 쏟아졌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하현은 조목조목 잘못을 짚어줬다. 이래도 모르면 진짜 뇌가 형성이 안 된 거고.
하지만 뇌가 형성이 되지 않은 성원은 그대로 멱살을 잡았고, 그에 옆에서 앞을 막아서고 있던 지구가 반사적으로 손을 세게 붙잡아 떼어냈다. 지금 형 멱살 잡은 건가? 저 마른 몸에 어디 잡을 데가 있다고? 상황이 판단되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미쳤어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지구는 바로 성원에게 관심을 껐다. 뒤로 물러난 성원은 보이지도 않고 구겨진 셔츠의 목 부분만 보였다.
“괜찮아요? 졸렸어요?”
그냥 살짝 붙잡았을 뿐 그 어떤 충격도 느끼지 못한 하현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구는 병원에 가자고 했다. 잘 싸우다가 갑작스럽게 소외당한 성원은 그대로 잠시 입을 닫았다.
카메라가 꺼져있는 상황이었지만 한 참가자의 용감한 촬영으로 인해 싸움 장면이 그대로 인터넷에 올라갔다. 멱살이라는 무섭고 깜찍한 별명을 얻은 성원은 결국 하차를 했고, 거기에는 멱살이 잡히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당장 병원에 가자며 재촉했던 지구가 한몫을 했다. 그 와중에 그동안 조장으로 어떻게 참았냐며 하현은 환생 부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직 미련을 놓지 못한 멱살이 팬들에게 10년은 더 살 수 있을 만큼 악플을 받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 촬영을 코앞에 두고 사라진 성원 때문에 어떻게든 빈자리를 메워야 했고, 결국 하현이 책임지고 동선을 싹 갈아엎었다. 불과 이틀 만에 일어난 대공사였다.
하현의 능력 덕분에 겨우 아슬아슬하게 새 동선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조원들이 감동을 받은 것 때문에 촬영장에는 미담이 끊이질 않았다. 한번 물어보면 완벽하게 숙지할 때까지 계속 코치해주고, 그러면서 본인은 제일 파트 없는 곳에 선다고……. 어떻게 저렇게 이타심이 넘치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말에 탈락이 목표인 하현은 살짝 찔렸다.
성원이 빠진 완벽한 무대의 촬영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왔다 갔다 정신없이 연습하는 휘영에게 개인 코치를 해주고 온 하현이 메이크업을 끝내고 무대 앞에 섰다. 다른 조가 한참 촬영 중이었다. 분명 원테이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막 삐끗한 참가자를 보며 하현이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1조의 무대를 집중해서 보는 하현의 옆모습을 쳐다보던 지구가 입을 열었다.
“형이랑 저랑 같은 무대에 서네요.”
언젠가 하현과 같은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꿈은 항상 있었다. 형은 춤추고, 나는 노래를 부르고. 지구가 눈을 반짝였다. 그게 마냥 귀여워서 무대에 대한 부담감 따위는 싹 사라진 하현이 살짝 웃었다.
하현은 대학을 졸업하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안무가도 하고 싶고, 트레이너도 하고 싶고, 댄스 하나로 유명해져서 전 세계에 이름도 알리고 싶었다. 춤이라는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 좋을 것 같았다. 그중 연예인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직업이었다.
“그러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원래는 연예인에 대해서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지구의 꿈이라고 하니 최근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꼭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지구처럼 정말 무대가 좋아서 서는 사람도 있겠지.
“4조 올라갈게요.”
스태프의 말에 한참을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이 떨어졌다.
“떨지 말고 해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직전까지 손을 잡아준 지구 덕분에 불안했던 노래도 훨씬 덜 떨린 것 같았다. 화려한 조명이 지금까지 서본 무대 중에 제일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노래까지 불러서인지 땀이 두 배로 흘렀다.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뿌듯하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한 지구와 하현의 모습은 비하인드 캠에 찍혔지만, 삼촌의 정성이 담긴 부자연스러운 편집으로 인해 지구만 따로 잘려서 나갔다.
* * *
[자유게시판] 야 동생새끼가
하현이 머리카락이랑 발 나올때마다 좋아서 소리지르는데 동생이 시발 누나 뭐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거냐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저거 하현이 머리카락이고 저게 신발이고 구구절절 설명했더니 이새끼가 혼자서 존나 "진기명기..." 이지랄함ㅋㄱㅋㄱㅋㄷㅋ
댓글
└ 야 가자 진기명기 ㄱㄱ
└ 흠....... 이건 박하현 머리카락 같은데......
└ 왜죠?
└ 머리카락 색 때문이요^^ RGB색상 따봤을때 정확히 일치하네요
└ 갑자기 과학수사대 찍고있네ㅅㅂㅋㅋ
└ 동생한테 능력전수해서 같이 찾으셈ㄱㄱ
└ ㅅㅂㅋㅋㅋㅋㅋㅋㅋ 수색꾼 하나 늘엇당
└ 자료수집팀 새멤버
└ 야 뭐가 하현이인지 캡처해서 공유좀ㄱㄱ
└ (JPG) (JPG) (JPG)
└ 하 시발 얼굴은 없냐?
└ 본문에 얼굴 얘기 없잖아
└ 하현이 팬들 모아놓고 프로그램 만들어야됨 진기명기
└ 사람 그림자보고 누군지 맞추기
└ 가능함 쟤네 박하현 그림자도 찾더라
└ 하현이를 좋아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덕목일뿐
└ 뭔..... 덕질하는데 이딴게 덕목이냐..... 하.... 난 못찾겟눈뎅
└ 못하면 하현이 못빨아
└ 탈락!
└ 정성 : 당신은 서바이벌 ID와 함께 하실 수 없게 됐습니다
└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그런거 보고 왜좋아해?? 얼굴도 안보이고 걍 손발? 머리카락? 이런거 보는게 귀여워???
└ 웅 존나 귀여움
└ 머리카락 한가닥 위로 올라간거볼래??? (JPG)
└ 헐 귀엽네 ㅇ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