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11
“형. 저 프로그램 나가기로 했어요.”
“무슨 프로그램?”
“서바이벌식으로 경연해서, 살아남는 사람이 데뷔하는 건가 봐요. 형이 해보면 어떠냐고 해서….”
조용조용하게 말을 잇는 지구에게 하현은 잘 됐다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너 정도면 1등 할 거야.”
“무슨…… 아니에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잖아. 연습생들 중에도 너만큼 추는 사람 별로 없을걸. 춤선도 깨끗하고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아. 되게 가벼워 보여.”
살을 맞대고 앉은 채로 조곤조곤 칭찬해주는 목소리가 너무 간지러워서 지구가 귀를 붉혔다. 확실히 하현과 함께 연습한 탓에 실력이 수직으로 상승하긴 했다. 아마 한국예대 수석입학생이 1:1 개인 맞춤으로 춤을 봐주는 학생은 흔치 않겠지.
자기는 지금까지 온갖 칭찬 다 해놓고, 한마디 했다고 손까지 내저으면서 심하게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서 하현은 말을 더 이었다.
“노래도 잘하잖아. 둘 다 잘하는데 당연히 되겠지.”
연애를 시작하고 2년 만에 처음 들어본 지구의 노래하는 목소리는 말 그대로 정직하고 깨끗했다. 누가 들어도 부드러운 미성을 가진 지구는 어떤 노래든 담백하게 소화했고, 그게 또 진정성이 있게 들렸다.
“촬영은 언젠데?”
“아직 몰라요. 금방 연락 준다고….”
“그래? 그럼 슬슬 연습하느라 바빠지겠네. TV 나오는데 잘해야지.”
한창 얘기를 나누던 중에 치킨이 도착했다. 하현이 결제하고, 서로 다리 두 개를 양보하는 사랑을 보여주다가 결론이 나질 않아서 하나씩 먹고, 깨끗하게 먹어치운 뒤에 뒤처리는 지구가 했다.
* * *
프로필 촬영 날짜와 사전 미팅 날짜가 도착했다. 참가자가 막 어제 저녁부로 다 모였다는 소식이었다.
“사전 미팅 내일모레래요.”
“떨리겠네. 무대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네. 형이 만들어준 노래로 하려고요.”
지구는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하현을 데리러 역까지 찾아오는 것은 잊지 않았다. 지구 역시 한번 뭔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스스로를 살피지 않고 직진하는 타입이었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하현은 약국에서 목과 관련된 약들을 싹 쓸어 와서 선물했다. 그리고 지구는 굉장히 감동받은 표정으로 약봉지를 받았다.
7시쯤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지구를 마중하고 다시 누워서 잔 하현을 깨운 건 집 전화벨 소리였다. 처음 이 자취방에 들어오면서 설치된 집 전화의 벨 소리는 어머니가 직접 녹음했는데, 그 소리가 상당히 무서워서 잠이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든 지 얼마 안 됐는데 깨서인지 눈이 잘 떠지질 않았다. 오늘 공강이라 푹 자려고 했는데. 어머니인가 싶어 거의 기어가다시피 침대 밑으로 내려간 하현이 전화기를 잡았다.
-하현아, 삼촌 한 번만 도와주라.
어머니가 아니라 삼촌이었다. 한국예대에 붙었을 때 축하 전화를 받은 이후로 처음이라 갑작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무슨 일인데요?”
-지금 우리 프로그램 출연자 하나가 펑크 났어. 사전 미팅 앞두고 바로 이렇게 펑크를 내버려가지고… 아무나 당장 구해오라는데 생각해보니까 나이대 맞는 게 딱 너라서.
횡설수설 설명하는 삼촌의 입에서 정작 제일 중요한 게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주던 하현이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서바이벌 ID라고, 서바이벌 데뷔 프로그램. 투표 많이 받은 사람이 데뷔하는 아이돌 제작 프로그램이야.”
하현이 휴대폰을 쥐고 있는 팔을 뚝 떨어뜨렸다. 지구가 나간다는 거랑 같은 프로그램 아닌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한 것 같았다. 분명 비슷한 이름이었고, 이렇게 겹치는 시기에 촬영하는 아이돌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두 개나 있을 리가 없었다.
“얼굴 팔리는 거 싫은데….”
프로그램에 나오면 분명 얼굴이 알려질 게 뻔했다. 어디 작은 곳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삼촌네 방송사면 지상파인데.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서 얼마나 놀릴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애들 사이에서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무시당하는지 아니까.
한참 고민하던 하현의 생각의 전환점이 된 것은 지구였다. 안 그래도 소속사에서 스폰 강요했던 것 때문에 아직까지 걱정스러운데.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어떨지도 모르는 거고, 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지구가 안 좋은 얘기는 잘 안 꺼내놓는 걸 알고 있는 하현이 조건을 하나 달았다.
“통편집 해주면 할게.”
생각해보니 잘 됐다 싶었다. 삼촌 부탁도 들어줄 겸, 일단 같이 가면 안심은 될 것 같으니까. 바로 떨어질 테지만 대략적인 촬영장 분위기나 참가자들 사이의 기류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는데도 다급했던 삼촌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진짜지?
“대신 통째로 다 잘라줘야 돼. 방송 나오는 거 캡처해서 놀릴 생각 하면 끔찍해.”
방송만 직접적으로 타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삼촌은 프로필 사진도 찍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건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는 사람들이나 보는 거니까. 어차피 바로 떨어질 거.
공강이지만 절대 춤은 쉬지 않는 하현은 학원에 갔다 지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에 귀가했다. 그리고 바로 프로그램 참여 사실에 대해 알렸다. 뭐 하러 하냐고 할 줄 알았던 지구는 깜짝 놀란 표정과 함께 기대에 가득 찬 물음을 던졌다.
“그럼 형 나랑 같이 데뷔할 수도 있는 거예요?”
“당연히 안 하지. 다 잘라 달라고 했어.”
콩깍지를 빼고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애인의 얼굴을 다각도로 살피며 지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 얼굴이 편집한다고 숨겨질 얼굴인가?
* * *
프로필 사진은 서로 다른 파트에 배정받는 바람에 같이 못 찍었다. 대타답게 무표정한 얼굴로 대충 찍고 나온 하현은, 분명 혼자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둘이 되는 이상한 상황을 맞이했다.
“형은 진짜 데뷔할 것 같아요.”
혼자 신나서 종알종알 떠드는 준을 보며 하현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빠지려고 했는데 친화력이 장난이 아니라 어느 순간 훅 휩쓸렸다. 몇 달 본 사이처럼 금방 친숙하게 대해주는 준을 집에 돌려보내고 하현은 건물 1층에 그대로 멈춰 섰다.
[촬영 들어갔어?]
[저 아직 대기중이에요]
하현의 바로 다음 타임에 배정받은 지구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앞에 보이는 카페라도 들어가려는 찰나에, 막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문 앞을 막고 서있었던 자신 잘못이었으므로 하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샛노란 머리를 한 남자가 머리를 까딱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대로 지나갈 줄 알았던 남자는 하현에게 말을 걸었다.
“어, 아까 프로필 사진 찍으시던 분 맞죠.”
“아…… 네.”
“진짜 잘생기셔서 계속 보고 있었거든요. 아, 저도 프로그램 참가자에요. 김성원입니다.”
귀에 뚫은 피어싱 두 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르는 사람과 친숙하게 대화하는 것에 영 익숙지 못한 하현은 그냥 고개만 까딱거리고 말았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어차피 한 번 촬영하고 나면 두 번 볼 사이도 아닌데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성의 없는 답을 받았다면 이제는 진짜 갈 줄 알았는데, 성원은 시간이 많은지 저쪽 길을 향해있던 다리를 제자리로 가져왔다. 오래 서 있을 기미가 보이는 자세였다. 하현은 속으로만 몰래 혀를 찼다.
“어디서 연습생 하셨어요?”
“아니요.”
“그래요? 저는 TN 엔터에서 연습생 했었어요.”
물어보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 읊어대는 성원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던 하현이 익숙한 이름에 초점을 되찾았다. 지구가 있었던 소속사가 TN이었는데. 갑자기 살짝 흥미가 생긴 하현이 성원에게 물었다.
“근데 왜 나오셨어요?”
“그냥요.”
이유를 얼버무리는 성원을 보며 하현은 순간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혹시 이 사람도 스폰 제의 같은 걸 받아서 나왔나 싶어서였다. 이미 TN은 하현에게 미성년자에게도 스폰을 반강제로 붙이려고 하는 비인륜적인 소속사로 단단히 찍힌 상태였다.
“아……. 이번엔 성공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하현은 먼저 뒤를 돌았다.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지구랑도 아는 사이일까 싶었다. 카페로 들어가 초코라떼를 하나 시킨 하현이 얌전히 앉아 농장 게임을 켰다. 농작물을 수확하는 진지한 표정이 너무 잘생겨서, 라떼를 제조하던 직원이 손을 살짝 삐끗한 해프닝도 있었다.
한참 앉아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하현은 이제 자기만 찍으면 끝이라는 문자를 받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냉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잘생긴 남자가 다시 다가오자 직원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카페라테 한 잔 주세요.”
“드시고 가세요?”
“아니요. 들고 가려고요.”
“네.”
곧 정성스럽게 제조한 카페라떼가 나왔다.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인 하현이 카페라떼를 받아들고 옆에 놓인 시럽을 향해 다가갔다. 무려 6번이나 눌러 넣고 나간 하현의 뒷모습을 보며 직원이 입을 살짝 가렸다. 단 거 좋아하나 보다.
한편 단 걸 좋아하긴 하지만 카페라떼의 주인은 아닌 하현이 건물 앞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곧 참가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서 애인을 잘도 찾아낸 하현이 다가가서 막 나온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이거 마셔.”
“카페 가 있는다더니 이것도 사 왔어요?”
크게 한 모금 들이켠 지구가 혀에 맴도는 달달한 맛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시럽은 꼭 6번을 넣는 지구의 입맛은 이미 파악한 지 오래인 하현은 뿌듯하게 웃으며 그대로 나란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물론 두 사람의 목적지는 하현의 자취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