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26화 (126/130)

#외전 5-10

“지구야, 나 왔어.”

발음이 꼬이고 목소리 톤이 묘하게 어긋난 게 취한 게 확실했다. 고기 냄새랑 알코올 냄새가 섞여서 났다. 지구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멀쩡히 걷긴 하는데 기분이 좀 좋아 보였다. 익숙하게 겉옷을 받아 세탁 바구니에 넣는데 거실로 들어온 하현이 물었다.

“쌀쌀한데 왜 거기 누워있었어. 형이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했잖아.”

“언제 그랬어요.”

“아까 문자로 그랬잖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문자를 받은 적은 없었으나 지구는 그냥 웃고 말았다.

“맞아요, 제가 형 기다리느라 그냥 바닥에 있었어요.”

“추운데 왜 바닥에 있어. 내가 침대에….”

“형 그거 방금 얘기했거든요. 술 깨는 약 줄까요?”

“늦어서 미안해.”

약주냐니까 갑자기 사과를 하길래 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기다리는 시간이 외롭긴 했지만 무사히 잘 들어왔으니까 됐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모임이 있는 가게를 먼저 물어보고, 그 앞에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한 지구가 하현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그래서 술 깨는 약….”

“아, 진짜 그 선배 싫어……. 4학년인데 꼬박꼬박 와서 술잔 빌 때마다 채워……. 눈이 대체 몇 개야. 빌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

“응, 그랬어요.”

“진짜 미안해…… 앞으로 일찍 올게.”

아, 진짜. 술만 마시면 눈물이 많아지는 하현 때문에 지구는 급격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귀여워. 술 깨는 약을 주냐는 물음은 두 번이나 씹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푸스스 웃으며 지구가 부엌에서 숙취해소제를 가져와 물이 담긴 컵과 함께 건넸다.

“내일 속 아프다고 하지 말고 빨리 먹어요. 울지 말고.”

“오늘 갔으니까 다음 모임은 빠질 거야…….”

훌쩍거리면서 웅얼거리는 하현을 달래서 지구가 욕실로 밀어 넣었다. 같이 들어가 세면대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얼굴을 세수시켜준 뒤 갈아입을 옷까지 정성스럽게 챙겨서 건넨 지구가 문을 닫기 전 주의사항을 읊기 시작했다.

“세수하니까 잠 좀 깼죠. 아직 쌀쌀하니까 차가운 물로 씻지 마요. 머리도 차가운 물로 감지 말고. 또 저번처럼 샤워기만 틀어놓고 멍때리지 말고 빨리 씻고 나와요,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요.”

“알았어….”

대답을 듣고 나서 문을 닫아준 지구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어떡해, 진짜 너무 귀여워.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이 움찔움찔했다. 하현이 술자리에 가는 건 싫은데 취하는 건 귀여운 게 문제였다. 빨리 민증 나왔으면 좋겠다. 스물이 되고 싶은 열아홉 지구는 문 앞에서 그렇게 한참 심호흡을 했다.

“다 씻었어요?”

지구가 얘기한 대로 금방 씻고 나온 하현에게서 기분 좋은 바디 워시 냄새가 났다. 재빠르게 문을 열고 나온 하현을 데려다 침대 위에 앉혀놓은 지구가 익숙하게 수건을 받아들고 젖은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느리고 부드러운 손길에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고, 잠든 몸을 뒤에서 받치고 끝까지 머리를 말린 지구가 그제야 하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줬다.

“잘 자요.”

피곤하다, 진짜. 결국 자취방에 와서 한 거라고는 술 취한 하현을 챙겨서 재운 것밖에 없는 지구가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벌써 1시가 넘은 시간에, 그제야 집으로 가려던 지구가 잠깐 멈칫했다. 지금 가서 자려면 너무 오래 걸리지. 그렇지. 두 시 넘어야 잘 텐데 그러면 내일 학교에서 더 피곤하겠지.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마친 지구가 그대로 하현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학교에 지각했다.

* * *

[지금 통화 ㄱㄴ?]

수업 중간에 문자가 날아와 화면이 반짝 켜졌다. 얌전히 노트 필기를 하고 있던 지구가 오랜만에 보는 저장명에 고개를 들었다. 발신자는 형인 태양이었다. 분필로 거침없이 칠판을 두드리는 담임의 눈을 피해 지구가 답장을 보냈다.

[지금 수업 중이야]

[그래?? 언제끝나?]

[18분 뒤]

[ㅇㅋㅇㅋ 나 30분 뒤에 스케줄이니까 끝나고 바로전화ㄱ]

2년 사이에 인기가 확 늘어난 노블은 지금 대한민국 아이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이었고, 그 말인즉슨 무지하게 바빴다. 형제 사이에 낯간지럽게 무슨 카톡이냐고 해서 원래도 그리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편은 아니었지만, 근 6개월은 아예 소식이 끊겼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잠깐뿐이었다. 금방 다시 수업에 집중한 지구는 종이 치는 순간까지 펜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종이 치고도 3분이 지나서야 담임이 나가고, 그제야 지구가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갔다. 학생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중앙계단에 서서 전화를 걸자 10초도 안 가서 신호음이 끊겼다.

-18분 뒤라며, 22분 지났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야, 너 서바이벌 데뷔 프로그램 하나 나가볼래?

태양이 제안한 것은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연습은 충분히 돼서, 당장 다음 달에 있는 대형 소속사 오디션에 신청을 넣은 상태였다. 스폰서에 대한 트라우마는 잠시 뒤로 밀어뒀다. 계속 도망치기만 해서는 아무리 해도 가까이 갈 수 없으니까.

“나 소속사 없는데.”

-일반인으로 진행하는 프로야. 출연자 수 모자란다고 캐스팅하느라 바쁘던데, 괜찮은 애 있으면 일단 다 데려와 달라던데. 딱 너 생각나서 전화했지.

칭찬해달라는 듯이 태양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이 바쁜 와중에도 아이돌 지망생인 동생 생각나서 친절히 전화까지 했다. 고민에 깊게 빠진 지구는 그다음에는 태양이 뭐라고 하든 말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대형 소속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얼마나 더 연습만 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이 프로그램에서 데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어떤 방법보다 확실하고 빠르게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할래? 그냥 소개만 시켜주는 거지 참여하고 나면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잠시 망설이던 지구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하현은 멋지게 한국예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멈춰있었다. 여기 입학한 그 순간부터, 3학년이 절반이나 지나간 지금까지 혼자 쌓아오기만 했지, 그걸 평가받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할래.”

이제 자신도 뭔가 보여줘야 할 때였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인생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그건 부딪혀봐야 알 문제였다.

-그래. 얘기해둘게. 곧 그쪽에서 연락할 거야.

전화를 끊고 지구가 다시 깊은숨을 내쉬었다. 저질러 버렸다. 3분도 되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지만 성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2년 전, 어울리지도 않는 데뷔 조에 억지로 끼여서 그 위치에 맞게 몸을 깎아내리던 그때보다 훨씬 성장한 상태라고 스스로 자신할 수 있었다.

올해는 하현처럼 실기우수자로 개인 연습실을 받게 된 지구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습을 시작했다. 방음이 철저하게 되어있는 연습실 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이것저것 들어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호흡이나 발성은 이미 완벽했고, 이제 맞는 스타일을 찾는 일만 남았다.

한 곡, 두 곡, 세 곡……. 각각 다른 장르와 느낌의 노래를 불러보고, 녹음해서 고칠 부분을 찾았다. 그렇게 한 번도 쉬지 않고 길게 이어지던 연습이 끊긴 건 노래가 흘러나오던 휴대폰에서 카톡 알림음이 들렸을 때였다.

[나 지금 학교 끝났어]

하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음으로 해놨기 때문에 소리가 났다는 건 하현이 보냈다는 뜻이었다. 학교가 끝났다는 문자에 확인해 보니 벌써 밤이었다.

[오늘 좀 늦었네요]

[과제 하느라..... 지금 어디야?]

[학교요]

끝났다는 카톡 하나에 착실하게 짐을 싸기 시작한 지구가 살짝 잠긴 목을 풀었다. 연습실에서 나가 복도 자판기에서 망고맛 음료수를 뽑고, 망설임 없이 끝까지 들이킨 지구가 천천히 교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어요]

간질간질한 문자로 자신의 그리움을 전달한 지구가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현의 집도 아니었다. 일직선으로 쭉 걷던 지구는 곧 역에 도착했다. 최근에 지구는 하현이 술을 안 마시는 날이면 역 앞으로 꼭 데리러 왔다. 물론 술을 마시는 날에는 한 시간 걸리는 대학 앞까지 왔고.

[나도]

쑥스러워서 애정 표현을 잘 못하겠다던 하현도, 나름 장거리 연애가 되니 문자로나마 표현이 늘었다. 물론 학교에 있을 때 빼고는 계속 함께 있는 걸 장거리라고 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줄곧 쉬는 시간마다 만나왔던 둘에게는 굉장히 먼 거리였다.

[오늘 어땠어요? 과제는?]

[선배님이 도와주셔서 금방 끝났어]

[그래요? 저녁은 뭐 먹었어요?]

[학식 먹었지 그냥.... 너는?]

[저도 그냥 급식이요]

사소한 일상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30분이 조금 넘게 기다렸을까, 역 개찰구에서 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쁘기로 유명한 한국예대 과잠을 걸친 하현은 200m 뒤에서 봐도 눈에 띄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복을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저렇게 보니까 갑자기 확 어른처럼 보였다.

그냥 과잠일 뿐인 항공 점퍼는 하현이 입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줬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역시나 예쁘기로 유명한 한국예고 교복을 누구보다 잘 살리고 있는 지구는 애인 칭찬만 잔뜩 하며 빠르게 가까이 다가갔다.

“형.”

짧은 부름에 바로 이쪽을 돌아본 하현이 웃었다. 처음 몇 번은 귀찮을 텐데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해놓고, 막상 계속 오니까 익숙해져서 이제는 얼굴만 보면 기분 좋게 웃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도무지 데리러 오는 발을 끊을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요, 형이랑 얘기하니까 금방 갔어요.”

지구는 항상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했다. 사람들 잔뜩 지나다니는 역에서 끌어안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자취방으로 데려갔다. 전에 한 번 자고 간 이후로 하현의 집에서 자고 아침에 학교를 가는 일이 잦아진 지구가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현의 옷장에서 미리 가져다 둔 자기 옷을 꺼내면서, 동시에 하현이 갈아입을 옷도 챙겨서 건넸다.

“씻고 나와요.”

자신은 신발을 벗는 동안 바람처럼 빠르게 이미 속옷까지 다 챙겨서 건넨 지구에, 하현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받아들고 욕실로 사라졌다. 속옷만 건네주면 저러네. 귀여운데 한편으로는 저도 왠지 머쓱해지는 일이었다.

“치킨 시켰어. 간장으로.”

뒤늦게 지구가 씻고 나왔을 때 하현은 막 전화를 끊는 중이었다. 이제는 지구 취향도 제법 달달 꿰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내온 달달한 카페라테까지 딱 건네주며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 하현이 침대를 툭툭 쳤다. 올라오라는 손짓에 지구가 순순히 침대에 앉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