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22화 (122/130)

#외전 5-6

지구는 그날부터 하현 전용 알람이 됐다. 약 먹을 시간쯤만 되면 어쩜 그렇게 귀신같이 알고 메시지를 보내는지, 하현도 처음에는 놀라다가 점차 익숙해져 갔다.

게다가 병원비를 갚기 위해서 자주 밥을 사주겠다고 나섰는데, 항상 가자는 곳들이 비슷했다. 온갖 종류의 나물과 가정식 반찬들이 나오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하현은 좋건 싫건 함께 밥을 먹었다. 그냥 지구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맛있어?”

“네. 엄청 맛있어요.”

복스럽게 잘 먹는 지구를 보며 하현이 천천히 숟가락을 떴다. 콩나물무침을 몇 가닥 집어먹다가 먹을만한지 숟가락질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그 모습에 편식은 안 하지만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채식을 그다지 즐겨 먹지 않는 지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먹을 걸 챙기면서, 스트레스받으면 안 좋다는 말에 지구는 그쪽에도 최선을 다했다.

[선배 내일 시간 있어요?]

[왜?]

갑작스러운 물음에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던 하현이 걸음을 멈췄다. 일어나자마자 학원에 가서 연습할 계획이었는데, 이런 걸 물어보는 건 같이 시간을 보내자는 의미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제가 너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혼자 보기 좀 그래서요]

[같이 봐주시면 안 될까요?]

영화는 몰입해서, 스토리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감독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보는 취미가 있는 지구는 혼자 보는 것을 선호했다. 친구들이 티켓 줄 테니 한 번만 같이 가자고 사정해도 거절하며 혼영을 고집하던 지구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뭔데? 영화 볼 시간 정도는 뺄 수 있어]

됐다. 지구가 입을 벌리며 살짝 웃었다. 만약 머리카락에 자아가 있었다면 두 가닥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 양쪽으로 파닥파닥 움직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네네네네네, 다섯 번이나 대답할 뻔한 지구가 빠르게 타자를 지우고 별로 크게 신나지 않은 것 같은 답장을 보냈다.

[네]

[제가 원래 우주 배경 영화를]

[오늘 푹 자야겠다 보다가 자면 안되니까]

[진짜 별로 안 좋아해서]

[보고 싶은 액션물이 있거등ㄴ여]

이번에 새로 개봉한 우주 영화가 평점이 좋아서 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피곤할 하현을 배려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보다가 자면 안 된다는 문자에 오타까지 내가며 황급히 말을 바꾼 지구가 시네마 홈페이지에 접속해 현재 예매율 1위인 액션물을 예매했다.

그렇게 다음 날, 하현의 스트레스도 풀어주고 겸사겸사 얼굴도 보는 프로젝트를 실행한 지구는 하루 종일 마치 데이트 코스처럼 돌아다녔다.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던 영화가 끝나고는 밥을 먹으러 갔고, 밥을 먹고 나서는 오락실도 가고 후식도 먹었다. 영화만 보고 끝날 줄 알았던 약속-데이트-은 생각보다 더 길어졌지만 하현은 이제 슬슬 가야 한다는 말을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저녁 늦게 학원에 갔는데, 연습은 어제보다 훨씬 수월했다. 스트레스와 심리적인 상태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후 하현은 중간중간 짬짬이 시간을 만들어 지구와 놀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PC방도 한 시간 정도 있어 봤고, 어울리지 않게 놀이터에서 그네도 탔다. 자기 사정이 있을 텐데도 지구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하현이 먼저 불러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나와서 놀아줬다.

“오디션 볼 거라고?”

“네. 졸업 전에는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얼마나 연습만 해야 할지 모르니까.”

지구는 다른 기획사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준비하면서도 실기 시험 날까지 완벽한 내조를 선보였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다니면서 하현의 식사를 챙겼고, 집에 있었다고 뻥을 치며 영양제부터 비타민까지 온갖 건강식품을 선물했다.

"선배가 걸어온 길은 배신 안 해요. 지금까지 받아온 상, 칭찬, 그거 다 선배 거잖아요."

거기에 하현이 불안해할 새도 없이 긍정적인 말들을 폭포처럼 쏟아부었다. 맞는 사람이 절대 부정적으로 변할 수 없을 정도로 세게. 다정한 목소리와 말을 듣고 있으면 금방 기운이 났다.

[선배 저 가도 돼요? 밥 먹어요]

[야 지금 9시야]

[딱 아침 시간이네요]

주말에는 지구가 하현의 자취방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와중에 꼭 허락받고 방문을 해서, 하현이 자느라 연락을 안 받을 때면 식사 시간이 조금 늦어질 때도 있었다. 가끔 썩 뛰어나지 못한 요리 실력으로 뭘 만들어두기도 하고, 냉장고에 이온 음료를 채워두기도 했다.

지구가 데리고 온 가정식집에서 잠이 덜 깬 상태로 적당히 달달한 불고기를 집어 먹으며 하현이 지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최근 지구는 아이비리그 준비하는 아들을 둔 엄마에 빙의한 상태였다.

“있잖아.”

“네?”

그릇에 얼굴을 박고 소심하게 젓가락질을 하던 하현의 부름에 지구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 웃으며 되물었다. 거기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현이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아니야.”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고 다시 젓가락을 꺼내주는 지구를 보며 하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현은 그렇게 주말 아침, 함께 불고기를 먹다가 반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각한 건 불고기를 먹던 도중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감정은 주인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나 주고받던 후배 하나가 이렇게까지 깊숙이 일상에 파고드는 동안 뭘 했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뛴 건 어이없는 타이밍이었다.

“여기 맛있죠.”

하현이 춤 연습을 하는 동안 지구는 노래, 춤 연습과 동시에 성장통을 겪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연습을 했다. 틈틈이 집에서 하다가 이제는 헬스까지 등록해서 운동하는데, 갑자기 뼈대가 확 굵어졌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몸이 제대로 잡혀가는 게 보였다. 계속 저보다 작을 줄 알았는데 1년하고도 반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이제는 지구가 더 컸다.

“…운동 열심히 하나 보네.”

“네?”

“아니야. 몸 되게 좋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다.”

뜻하지 않은 칭찬을 해버린 하현이 쑥스러운 얼굴을 감추며 조용히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조만간 헬스를 끊고 요리학원을 등록할 생각이었던 지구는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간신히 손가락에 힘을 줘서 젓가락을 잡아낸 지구가 왼쪽 손을 들어 가만히 뺨에 가져다 댔다. 마구 뛰는 심장은 쉽게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하현이 불고기를 집기 위해 고개를 숙인 틈을 타서 지구가 젓가락으로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 아무래도 헬스는 계속해야겠다.

* * *

여름이 빠르게 지나고 순식간에 가을이었다. 원서는 잘 접수했고, 드디어 실기 시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실기 작품은 노래만 틀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출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연습뿐이었다.

“몸은 어때요?”

“근육통 좀 있는 거 빼고 다 괜찮아.”

“파스 꼬박꼬박 붙여요.”

시험을 보는 건 하현인데 어째 지구가 곤두서있었다. 캘린더에 시험 날짜를 다섯 번이나 표시해두고,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아예 밀착 관리까지 시작했다. 지구의 하루는 7시쯤 하현의 집 앞으로 와서 아침을 먹이는 것부터 시작됐다.

“야, 내가 이런 거 싸 오지 말라고 했잖아.”

“집에 남는 반찬이에요.”

“이제 그거 안 통한다고 했잖아.”

방금 한 것처럼 따끈따끈한 계란 프라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현이 말했다.

“이것도 어젯밤에 먹다 남아서 전자레인지에 돌려왔다고 그러지 그래.”

그 말에 지구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에 정갈하게 담긴 나머지 반찬들과 다르게 계란 프라이는 엉망진창으로 터져있었다.

“솔직히 얘는 방금 한 거 맞아요.”

“이거는?”

“이건 진짜 꺼내온 건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반찬가게의 단골이 되어버린 지구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 온 거긴 하지만 집에 있던 거긴 했다. 어제저녁에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던 거니까.

“이렇게 안 해줘도 된다니까. 미안하니까 그만 들고 와.”

하현이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을 젓가락으로 살짝 뒤적이며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었다. 왜냐면 지구한테는 그냥 친절인 행동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게 되니까.

“선배가 뭐가 미안해요. 제가 하는 건데.”

진심으로 미안한 것 같은 얼굴에 지구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 과했나 싶어 살짝 눈치를 본 지구가 말했다.

“중요한 시기잖아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힘내서 연습하고 붙어야죠. 일단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힘내고 나중에 갚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지구가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뿌듯하게 웃었다. 받아낼 생각이 전혀 없는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하현도 그냥 웃고 말았다.지구에게 위로를 받고 기운을 얻는 만큼, 반대로 힘이 빠지게 하는 것도 있었다. 실기 시험이 다가올수록 늘어나는 담임의 간섭이었다. 교무실로 호출하는 빈도수가 점점 잦아진다 싶더니, 종내에는 매일 아침마다 개인 면담을 했다.

“하현아. 네가 이번 주 토요일이지?”

“네.”

“꼭 붙어야지. 선생님은 너한테 기대가 크다. 아, 인철이 왔냐?”

“말씀하신 거 여기요.”

여느 때처럼 교무실에서 1:1 개인 면담을 하던 도중, 부반장인 인철이 등장했다.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연습만 한다더니, 사실인지 눈 밑이 검게 변해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 하현의 시선이 불쾌했는지 인철의 눈썹이 움직였다.

“내가 인철이 너한테도 많이 기대하는 거 알지? 우리 반의 희망 둘.”

“감사합니다.”

인철이 웃으며 기대를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하현은 그냥 고개만 한 번 짧게 숙이고 나왔다.

실기가 코앞이라 하현은 학교에서도 수업을 듣는 대신 하루 종일 연습을 했다. 너무 과해도 안 되지만 전력을 다해야 했다. 몸 관리를 하면서 빡세게 연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챙겨준 지구가 아니었으면 이미 병원에 실려 가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아무리 연습이 급해도 밥은 먹어가면서 해야 된다니까요.”

거의 교수에 빙의한 수준으로 식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지구가 정말 실음과인지 이쯤 되면 의심이 됐다. 사실은 식품의학과인 게 아닐까. 지구는 정말로 하현에게는 몸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력은 이미 완벽하니까 잘 관리해서 당일에 최고의 컨디션을 뽑아내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돈 내고도 못 받을 1:1 완벽 케어를 받은 하현은 10월 첫째 주 토요일로 실기 시험 날짜를 배정받았다. 딱 시작일이었고, 평일이 아닌 주말이라 지구도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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