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21화 (121/130)

#외전 5-5

어릴 때부터 해왔고, 재능도 있었고, 스스로가 재미도 있었다. 현대무용을 전공하려다가 실용무용으로 틀었음에도 슬럼프 한 번 없이 즐거웠다. 춤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전공으로 선택했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참고 해낼 만큼 좋아했다. 태어나길 뛰어났고 노력도 절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한 하현은 주변에서 치고 올라오는 애들 때문에 불안감을 느낄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슬럼프가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벽까지 학원에서 온몸이 부서져라 연습하고 돌아와서 시체처럼 자고, 수업시간에도 피곤해서 거의 엎드려 있었다.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참 많았다. 밤을 새서 연습하고 그대로 학교에 오는 애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하현의 춤이 뭔가 나사가 하나 풀렸다는 걸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인철이었다. 항상 라이벌로 하현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인철이 슬럼프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절대 슬럼프 같은 건 겪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하현이 중요한 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한 건 인철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회이자 즐거운 이벤트였다.

“박하현 슬럼프 온 거 빼박이라니까.”

하현은 진작 학원에 갔고, 학교에 남아서 노래 연습을 하던 지구가 순간 들리는 목소리가 걸음을 멈췄다. 다들 하교한 시간에 남아서 음침하게 뒷얘기라니. 마시고 있던 망고맛 음료수의 빨대를 놓은 지구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3층 복도 다목적실이었다.

“천재라서 절대 안 흔들릴 것처럼 굴더니 천하의 박하현도 입시 앞에 무너지죠?”

“존나 재수 없는데 이러다 떨어졌으면 좋겠다. 걔도 실패 한 번 해봐야지.”

“걔 못하면 일단 자리 하나 늘어나네. 나 들어가게 떨어져라.”

예술을 하는 고등학생들의 최종적인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예대는 경쟁률이 엄청났다. 그런 곳에서 선생님들이 수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할 정도면 일단 합격은 떼놓은 당상인 실력이었다. 하현이 떨어진다고 해서 본인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신나 보였다.

지구가 모여있는 네 명의 얼굴을 순서대로 훑었다. 대부분이 초면이었지만 중앙에 있는 사람은 익숙했다. 조회마다 하현의 옆에서 자주 상을 받던 선배였다. 미간에 난 커다란 뾰루지가 워낙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지구가 뾰루지에 시선을 맞추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동안 아래쪽에 있던 입이 열렸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자기도 얼마나 답답하겠어. 혼자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듯이 사는 놈인데 슬럼프 온 거 쪽팔리잖아.”

흐리멍덩하지만 착하게 생긴 뾰루지 선배가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듯이 산다고? 대체 누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지구가 인상을 찡그렸다. 자기 욕을 들은 것보다 더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빴다. 결국 충동적으로 다목적실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너 뭐야?”

하현을 물어뜯으며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선배들이 단체로 놀라 지구를 쳐다봤다.

“너 2학년이지?”

3학년이라는 선배의 권력을 이용해 위협적인 물음을 던져봤지만 지구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남 평가하고 헐뜯을 시간에 자기 연습이나 더 하세요.”

꽤 위협적으로 자란 몸으로 지구가 경고했다. 얘 뭐야, 협박하나? 앞에서는 착한 척을 하면서 뒤에서 까는 게 취미인 인철이 살짝 겁먹어서 미간을 움찔댔다.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매일 박하현이랑 붙어 다니는 연습생이었던 놈. 실음과 주제에 몸이 좋았다.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인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새끼 골때리네. 우리가 네 얘기 했냐?”

“아니요. 근데 하현 선배 떨어지면 그 자리 들어가신다면서요. 한국예대 준비하는 거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으세요?”

할 말이 없어진 선배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씨발, 네가 뭔 상관이야?”

사실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꽤 괜찮은 실력이라고 학원에서 칭찬을 받아서 한국예고에 입학했는데, 자기보다 잘난 놈들이 깔려 있어서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벼락을 맞았다 깨어나도 합격할 수 없는 실력이었기에 반박할 말도 없었다.

욕으로 상황을 대처하기 시작한 선배의 말을 모조리 씹은 지구가 다목적실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하현을 생각했다. 선배는 정말 잘못한 게 없는데. 춤을 좋아하고 열심히 한 것뿐인데. 입시가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싸우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서는 할 수 있었다. 세상 모든 다툼은 말로 해결하는 게 최고지만 혹시라도 저런 얘기를 선배 앞에서 꺼내면…… 생에 처음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결심을 해본 지구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집이에요?]

답장은 지구가 학교를 나와서, 놀이터에 약 30분을 앉아 기다리다가 결국 집에 가던 도중에 도착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아니 30분만 더 하다가 나가려고]

[학원이에요?]

[응]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려던 지구가 발을 돌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하현의 학원은 반대 방향이지만 버스 타고 1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저 마침 거기 근처인데 만나서 같이 가요]

11시 48분에 말도 안 되는 개뻥을 치며 지구가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막차에 올라타서 다섯 정거장을 지나자 하현의 학원 바로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학원 건물 1층의 편의점에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얼음 컵에 부어 두 개 들고나온 지구가 얌전히 발을 멈췄다. 곧 건물 안에서 하현이 걸어 나왔고, 지구는 주인을 만난 대형견처럼 뛰어가 손에 들린 컵을 내밀었다.

“뭐야?”

“선배 마셔요.”

“넌 왜 만날 때마다 이런 걸 자꾸 사 와…… 고마워.”

말은 그렇게 해도 마침 덥고 목이 말랐던 하현이 빨대로 음료를 쭉 빨아들였다. 시원하긴 하네. 무의식중에 얼굴에 드러나는 만족스러움에 지구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 아닌 척 하현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척 봐도 잔뜩 지친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했어?”

“친구 선물 샀어요. 연습은 괜찮아요?”

산적도 없는 친구 선물을 들먹이며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한 지구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주변에 선물을 살 만한 곳이 없는데도, 잔뜩 지친 하현은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던 하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보다 좀….”

자꾸만 실수가 늘었다. 춤에 대해서는 항상 완벽했던 하현은 원래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하루 종일 연구하고, 또 연습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춤이 갑자기 손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잠깐 피곤해서 그럴 거예요.”

집에 가는 내내 하현의 어깨를 토닥여준 지구는 자연스럽게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위로를 받아도 상태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의 병보다 겉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몸의 병이었다. 원래도 크게 건강한 몸은 아니었지만 크고 작은 근육통 정도만 끌어안고 살았는데,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먹고 토하다 보니 위에 무리가 간 듯 속이 쓰려서 수업시간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다. 약국에서 약들을 사다가 들고 다녔지만 먹어도 딱히 나아지는 게 없었다. 병원에 가볼까 싶다가도 어차피 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관뒀다.

“아…….”

아침을 넘겼더니 또 속이 쓰렸다.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교실 안의 학생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엎드렸고, 하현은 가방 속에서 약들을 뭉텅이로 꺼냈다. 뭘 먹어야 하지. 일단 속쓰림이라고 적혀 있는 것들은 다 먹으려고 하나씩 꺼내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왜 왔어?”

보통 찾아와도 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지구가 반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모두가 자고 있어서 조용한 교실 안에서 지구가 앞에 놓인 약들을 눈으로 훑었다. 위통, 속쓰림…….

“선배, 어디 안 좋아요?”

“아, 조금.”

황급히 주먹을 쥐어 손바닥 가득 놓인 약들을 감춰보는데, 지구가 약들을 하나씩 들어 확인해 보더니 앞으로 손을 뻗었다.

“주먹 펴요.”

“어?”

펴라는 말에 일단 하현이 주먹 쥐었던 손을 풀었다. 앞으로 내민 지구의 손바닥 위로 알약들이 떨어졌다. 같은 용도의 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기 색을 뽐냈다.

“이런 거 하나씩만 먹는 거예요. 계속 이렇게 먹었어요?”

지구는 당장 그날 됐다는 하현을 끌고 병원으로 갔다. 내시경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구 덕에 하현은 순식간에 검사실로 들어갔다. 수면 마취가 덜 깬 상태로 비몽사몽하게 있는 하현을 데리고 진료실로 돌아간 지구가 살짝 뜬 머리를 툭툭 정리해주며 의사의 말을 들었다.

“위염하고 식도염 증상이 있는데 꾸준히 관리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자극적인 거 먹지 말고.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고요.”

위염에 식도염 진단을 받은 하현이 진료실 밖으로 나와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원비 결제가 끝난 상태였다. 직원에게 체크카드를 돌려받는 지구를 보며 하현이 당황해서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야, 너 돈이 어디서 나서. 계좌번호 불러봐, 보내줄게.”

“저 돈 잘 안 써서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빨리 불러.”

통장에 적힌 0의 개수와 별개로 검소한 삶을 사는 지구는 돈이 많았다. 안 가겠다는 하현을 억지로 끌고 데려왔으니까 자신이 결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현이 계속 계좌번호를 달라며 사정했지만, 끝끝내 알려주지 않은 지구는 밥이나 사달라며 맑게 웃었다. 혹시 한 끼 얻어먹고 그 많은 병원비를 퉁 칠까 봐 하현이 덧붙였다.

“알았어. 병원비만큼 나올 때까지 계속 사달라고 해.”

지구는 그렇게 밥을 얻어먹는다는 명목으로 하현에게 밥을 먹일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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