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3
“너 라떼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게 제일 달대.”
정말 스쳐 가면서 한 얘기인데. 남에게 어떤 관심도 없을 것 같은 하현이 그런 사소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지구는 살짝 놀랐다. 캔 뚜껑을 따고 마시는데 정말 달았다.
“이거 과자도 맛있어.”
지구가 아무 말이 없자 하현이 봉지에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꺼내줬다. 봉지를 뜯어 먹기 좋게 펼쳐준 하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소속사 나갈까 봐요.”
“어?”
“데뷔 못하겠어요.”
처음으로 지구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나왔다. 쉽게 포기하고 놓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벼랑 끝까지 몰렸기 때문이 분명했다. 하현은 생각을 하느라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잠시의 침묵 동안 지구는 조금 부끄러웠다. 열심히 하겠다고 해놓고 금방 못하겠다는 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얼마나 한심할까.
“당연히 네가 힘들면 나가야지.”
먼저 이유를 물을 줄 알았던 하현은 예상외로 전적으로 지구의 편을 들었다. 지구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자기를 망쳐가면서까지 할 필요 없어. 네가 최고고 우선이야. 일단 너만 행복하면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잖아. 아직 열일곱이니까 조급할 거 없어.”
하현은 그 어디보다 경쟁이 치열한 예체능 입시를 챙겨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견디고 있었다. 당장 자신부터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리한 연습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뭐라도 말을 해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지구는 자신과 달랐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은 확실한 자기 꿈이 있고, 노력도 많이 했다. 세상에 행복한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지만 그래도 지구는 행복했으면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원래 같으면 절대 이런 오글거리는 말 입 밖으로 안 내뱉을 텐데.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하현이 당황스러움을 티 내지 않으려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
캔커피를 양손으로 꾹 쥔 지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쉽사리 눈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런 아슬아슬한 상태로 지구가 방금 전 상황을 털어놨다. 열일곱에게 스폰 강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하현이 손을 허공에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다.
“그냥 도망쳤어요.”
지구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작은 숨을 쉬었다. 하현의 말을 들어보니 이게 맞았다. 생각을 잘못했다. 이 상태로 데뷔해봤자 되는 것도 없었을 텐데. 혼자 앓느라 극히 좁아졌던 시야를 하현이 잡아 벌려 넓혀 주었다. 시기가 늦춰지는 것뿐 다시 도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뒤늦게 허탈감이 몰려와 시야를 덮쳤다.
지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하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영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뛰쳐나온 것을 자책하고 있을까 봐.
“괜찮아, 잘못한 거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지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품에 넣은 하현이 작게 숨을 쉬었다. 품 안에서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작은 머리를 든든한 가슴팍에 파묻고 꽤 오래 있었다. 그리고 지구는 그날 하현에게 반했다. 어쩌면 입학식 날 이미 반했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한 번 더.
그렇게 형의 도움으로 소속사를 나오고 여름방학, 지구는 갑자기 확 자라기 시작했다. 170cm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던 키는 금방이라도 하현을 따라잡을 기세로 자랐고, 마냥 아기 같던 얼굴도 조금씩 남자답게 자리를 잡아갔다. 극심한 성장통에 시달리는 바람에 걷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뼈가 조각조각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이 온몸을 점령했지만 지구는 티조차 내지 않고 의연하게 참아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는 천천히 운동도 시작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는 동안 하복이 춘추복으로 바뀌고, 그 위에 마이가 추가되고, 패딩까지 걸치게 됐다. 완전한 겨울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코앞으로 다가와 당연하게도 전교생이 풀어졌다.
“선배. 저 왔어요.”
여전히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귀여운 외모였지만 더 아기 같을 때부터 지구를 봐왔던 하현의 눈에는 최근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너무 빠른 시간에 변한 것도 한몫했다. 적응할 시간을 안 주잖아. 책상 위에 턱을 괸 채로 하현이 고개를 살짝 꺾어 지구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생각으로 쳐다보는지도 모르면서 지구는 그냥 맑게 웃었다.
지구는 이제 수업이 끝나면 회사 연습실이 아닌 학교 연습실을 갔다. 그날 이후로 지구가 신경 쓰이고 눈에 밟혀서, 하현은 방과 후에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로 학원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조금이라도 연습을 했다. 실기 성적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제공되는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면 지구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보러오는 식이었다.
말없이 입만 벌리고 계속 앉아있는 지구는 꼭 연습이 끝나면 잔뜩 들뜬 얼굴로 칭찬을 했는데, 하현은 그게 사실 좀 부끄러웠다. 실음과라면서 매일 춤 얘기만 하는 탓에 정작 지구가 노래 부르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노래 연습은 안 해?”
“네?”
처음 듣는 질문에 생수 뚜껑을 따던 지구가 되물었다.
“아니, 실음과인데 노래 부르는 거 본 적이 없어서.”
“노래 연습은 항상 하고 있어요.”
“그래? 어떤 거 연습하는데?”
“그냥 연주하면서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연주도 할 줄 알아?”
“피아노랑 기타 조금이요.”
“신기하네, 난 악기 못 다뤄서.”
다룰 수 있는 악기가 극히 관악기에 한정되어 있는 하현은 사실 리코더 음 잡는 것도 힘겨워했다. 춤도 음악이라 기본적인 이론과 악보는 볼 수 있는데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는 구역이었다. 필요한 건 춤 하나뿐이었다.
“매일 춤추는 것만 봐서 그냥 궁금했어. 나중에 한 번 들려줘.”
스치듯 말하고 음악을 찾기 시작한 하현의 얼굴을 지구가 빤히 쳐다봤다. 만난 지 반년이 넘어가는데 하현은 처음 만난 그때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만들어 놓은 것처럼 잘생긴 얼굴을, 흐트러진 앞머리 때문에 드러난 이마부터 쭉 훑어 내려가다가 문득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연습…… 하고요.”
노래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하현에게 들려주기는 쑥스러웠다. 아마 백 번을 연습해도 떨지 않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노래 가사를 읊을지 스스로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짧은 연습이 끝나면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운동장이 꽤 길어서 교문까지만 해도 거리가 꽤 됐다. 교문을 나서면 하현은 학원으로, 지구는 집으로 갔다. 최근 연말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노블도 못 보고 있는데 지구만은 매일 꼬박꼬박 만나서 이렇게 함께 하교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현의 학원은 지구의 집 반대편에 있어서 함께 갈 수 없었다. 집 위치를 거짓말을 해서라도 조금 더 함께 걷고 싶었으나 하현은 제 집 주소를 알았다. 아쉽게 인사를 건넨 지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었다. 추위 때문에 빨개진 볼을 보니 처음 만났던 입학식 날이 생각났다. 피부가 하얀 편이라 빨개지면 티가 금방 났다. 그래서 하현은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서 볼에 손등을 툭 가져다 댔다.
“그래. 잘 가.”
금방 뒤돌아선 뒷모습에 대고 지구가 입을 살짝 벌렸다.
형, 좋아해요.
입안에서 나오지 못한 말이 간질거렸다. 말을 했다가 혐오의 눈빛을 받게 될 게 두려웠고, 더 이상 친한 후배조차 할 수 없게 될까 봐 겁이 났다. 하현의 제일 가까운 후배. 그 정도 자리도 충분하고, 과분했으며, 잃어버릴까 불안했다. 열일곱의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열여덟과 열아홉의 봄이 동시에 찾아왔다. 지구는 2학년이 됐고, 하현은 3학년이 됐다. 2반이었던 지구는 1반이 됐고, 1반이었던 하현은 2반이 됐다. 작년과 똑같이 입학식 리허설을 마치고 익숙한 학교 복도를 따라 3학년 교실이 모여있는 곳으로 왔다.
“어, 박하현 하이.”
“같은 반이네?”
하현이 반으로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관심들이 쏟아져 내렸다. 대충 인사를 주고받으며 3분단 맨 끝, 뒷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가방을 놨다. 어차피 입학식 무대 때문에 또 금방 나가봐야 했다.
[선배 강당이에요?]
[아니 지금 가려고]
아침부터 몰려든 다른 친구들의 메시지는 전부 씹고 지구와 열심히 연락을 주고받던 하현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인철이었다. 또 같은 반이네, 하현이 피곤한 숨을 뱉으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입학식이 끝난 하굣길에는 자연스럽게 지구랑 만났다. 이제는 그 어떤 친구보다 지구랑 더 친했다. 학년이 다르다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자주 만나서 익숙해졌다. 매일 바쁘니까 오늘만 좀 놀자는 친구들을 떼어내고 하현은 지구와 단둘이 운동장을 걸어 나가는 걸 택했다.
“오늘 바빠?”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집 올래?”
얼마 안 걸은 것 같은데 금방 교문에 도착해서, 아쉽게 하현과 반대쪽으로 발을 옮기려던 지구가 멈췄다.
집? 항상 학교나 밖에서만 만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갈래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잔뜩 표출한 지구가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하현을 따라갔다. 혼자 사는 곳이라 빌라일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하현이 향한 곳은 아파트였다. 그리 넓어 보이진 않지만 고등학생 혼자 살기에는 좀 컸다.
“방이 좀 더러울 거 같아서, 미안한데 여기서 잠깐만….”
“아니에요.”
미안하다는 말에 급히 도리질을 친 지구가 얌전히 문을 등지고 섰다. 그에 빠르게 도어록을 풀고 들어간 하현은 어제저녁에 허물 벗듯 내팽개친 옷들을 정리했다. 집으로 들어온 지구는 좀 놀랐다. 엄청 깨끗하네. 옷이나 책을 바닥에 두는 것 빼고는 어지를 것도 없는 하현의 자취방은 과하게 심플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온 게 있다면 책꽂이에 꽂혀있는 노블 앨범이었다. 한 장도 아니고 몇 장씩……. 며칠 전에 아무도 모르게 시간을 내서 팬 사인회에 한 번 갔다 왔던 흔적이었다.
“선배 노블 좋아해요?”
“어? 저거?”
누가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꽂아놓은 하현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변명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춤 잘 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