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17화 (117/130)

#외전 5-1

3월 2일, 한국예고 입학생들이 낯선 교복을 걸치고 교문을 넘었다. 지구도 올해 1학년으로 실용음악과에 입학하게 된 학생이었다. 괜히 숨이 답답할 정도로 긴장이 되는데,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교실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건물일까 싶어 가봤는데 급식실이었고, 학년별로 넥타이 색이 구분되지 않아서 누가 신입생이고 선배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보통 입학 첫날에는 선배들이 교문 앞에 서서 길 안내해주지 않나. 하다못해 종이라도 붙어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일찍 온 탓인가 싶어 지구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도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 좁았던 중학교와 달리 한국예고는 넓어도 너무 넓었다. 예술관 2층이라고 적혀있긴 한데 그게 어느 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구가 프린트를 다시 한 번 빤히 들여다보며 발을 계속 옮겼다.

마침 입학식 리허설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던 하현의 눈에 길 잃은 어린 양이 딱 걸린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길 잃어버렸어요?”

누군가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말을 거는데도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지구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앞을 쳐다봤다. 이쪽을 향하는 동그란 눈과 마주치는 순간 하현이 생각했다. 완전 아기네. 중학생티를 아직 벗지 못한 말랑말랑해 보이는 하얀 볼이 싸늘한 바람 때문에 붉었다.

“아…… 네.”

“어느 과에요?”

“실용음악과요.”

지극히 평범하게 나타난 구원자의 얼굴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대형 기획사에 몸을 담고 있는데도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구가 혹시 기분 나빴을까 싶어 금방 고개를 숙였다. 저 얼굴로 아이돌 안 하고 뭐 하지. 아니면 이미 연습생인가? 푹 숙인 동그란 머리통 위로 궁금증이 퐁퐁 피어올랐다.

“1반은 여기, 2반은 바로 옆.”

“감사합니다.”

건물만 알려줘도 됐을 텐데 지나치게 친절한 선배는 교실 앞까지 지구를 배달해줬다. 실용음악 2반에 배정받은 지구가 교실 문을 열고 반으로 들어가 칠판이 가장 잘 보이는 맨 앞자리 책상에 가방을 걸고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 주변에 사람이 가득 모였다. 낯을 많이 가리는 지구가 받아쳐 준 말은 몇 개 없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잘생긴 대형 기획사 연습생에 대한 소문은 전교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한편 길 잃은 동그라미를 구조한 하현은 얌전히 자신이 배정받은 실용무용 1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재 한국예고에서 단연 가장 유명한 학생인 하현은 다양한 인사를 받으며 중간 자리에 착석했다. 크게 친한 친구는 없었지만 안면을 튼 아이들은 많았기에 무리를 형성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모여서 떠드는 것에 크게 흥미가 없는 하현의 주위로 당연하다는 듯이 모여든 아이들이 현재 한국예고 내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를 꺼내놨다.

“야, 신입생 중에 연습생 있대.”

“헐, 여자?”

“아니, 남자라던데.”

“아, 안 궁금해짐.”

“실음과라던데? 소속사 존나 유명하던데, 로젝있는.”

“진짜?”

오로지 실기 위주로 재능이 있는 아이들만 선발하는 한국예고에서 아이돌 연습생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남 얘기에는 관심이 없는 하현은 평소 같으면 그렇구나, 하고 넘기고 까먹었을 텐데 이번에는 머릿속에 얼굴 하나를 그려냈다. 아이돌로 데뷔한다면 누나 팬들을 잔뜩 끌고 다닐 것 같은 외모를 떠올려보니 자신은 소문의 주인공을 이미 만난 것 같았다.

“귀엽게 생겼더라.”

“아, 뭐야. 박하현 너 봤냐?”

하현은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SNS 알림을 옆으로 밀어 치우고 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예고 입학식은 각 과 선배들의 환영 공연으로 시작됐기 때문에 조금 먼저 가 있어야 했다.

전통을 그대로 이어 내려오는 2시간짜리 입학식을 마치고 진이 빠진 학생들은 간단한 새 학기 공지만 받고 하교했다. 완벽하게 공연을 마친 하현은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마침 학원도 없는 날이니까 하루만 푹 쉬어볼까 싶어서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짧게나마 몸을 풀고 연습을 했다. 아무리 쉬는 날로 정했다지만 하루라도 연습 없이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게 끝나고 나서는 어제 있었던 노블의 음악방송 영상을 봤다. 아직까지 크게 유명한 그룹은 아니었지만 언제 봐도 칼군무가 매력적이었다. 춤을 표현할 때, 동작과 선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신경 써야 할 게 표정이었다. 추는 것도 좋아하지만 감상하는 것도 좋아하는 하현은 그렇게 다섯 시간을 망부석처럼 누워서 영상만 봤다.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슬슬 자려고 이불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야 대숲에 실음과 연생 걔가 너 찾는다고 글썼던데ㅋㅋ]

카톡 알람을 꺼두지 않은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의 연락이었다. 하현이 급히 페이스북에 접속해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를 찾았다.

▶ 한국예술고등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

오늘 아침에 교실까지 데려다주신 선배님 알고 싶습니다. 회색 후드 집업 입고 계셨고 입학식 때 실무과 무대 하셨어요. 연락 주세요.

익명 신청을 따로 하지 않은 탓에 실명이 그대로 까발려져 올라온 게시글이었다. 아까 교실까지 데려다줬다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 탓에 이미 자신을 언급한 댓글들이 한가득 달려 있었다.

└ 백퍼 박하현이네 이쯤되면 관계자도 귀찮겠다..

└ @박하현 아침에 리허설 때문에 피곤하다더니 교실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니?

└ 박다정 ㅇㅈ^^

└ 한국예고 대슈스 새학기 되자마자 또 다시 대숲 점령 클라스ㄷㄷ

└ 박하현이 또… 난 언제 대숲 올라와보냐

└ 안녕하세여 한국예고 재학생인데요~ 오늘 실기평가 시간에 보니까 진짜 역대급으로 못추는 분이 있더라구요;;;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누구인가요? 퇴학 조치 취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교위상이;;

└ 닥쳐 씹새끼야

└ 박하현 이런글에 안 와요~ 실무1반이니까 직접 가보세용

└ @박하현 하혀니 울 동아리 후배ㅋㅋ

└ 민경아 친한척 하디말자ㅠㅠㅠ 박하현이 너 이름 안대?ㅠ

└ 친하거든ㅡㅡ

└ 얘 그 연생이자나

└ 헉 그르게;; @박하현 << 얘에욤

잘 알지도 못하는 애들이 잔뜩 신나서 댓글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 소란스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고민하던 하현이 조심스럽게 댓글을 남겼다.

└ 메시지 보내요. 답장할게요.

한편 댓글들을 확인하고 있던 지구는 이름이 박하현이라는 것과 실용무용 1반이라는 두 개의 사실을 알아낸 상태였다. 친절하게 데려다준 건 고마웠지만 딱 거기까지뿐이었던 지구는 입학식에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춤에 반쯤 홀려 생각을 고쳐먹었다. 같이 연습하는 형들도 나름 춤은 한 가닥 하는데, 완전히 다른 차원의 수준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을 할 정도로 용기 있는 성격은 아닌데, 그래도 아침에 데려다준 선배를 찾는다고 적으면 조금 티가 덜 날 것 같아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대신 전해드립니다 계정에 메시지를 보냈다.

월말평가 때마다 잘 추긴 하는데 너무 무난해서 눈에 잘 띄지 않고, 강약 조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지적받는 지구에게 춤은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산이었다. 연습할수록 늘긴 했지만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널렸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현의 춤은 열일곱 연습생의 마음에 동경의 불길을 질렀다.

이런 글에는 잘 안 온다는 다른 학생들의 댓글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예상 외로 곧 하현의 댓글이 달렸다.

메 시 지 보 내 요 답 장 할 게 요.

무려 11글자의 정성어린 댓글에 지구가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 요청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나치게 정중하게 시작된 메시지는 성공적으로 하현에게 도착했다. 남부럽지 않은 잘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둘은 기본으로 제공되는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대충 대답하고 메시지를 끊으려고 했던 하현은 어느 순간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아 진짜? 나도 그랬는데]

[가끔 보면 재미있어요]

[아.. 저 근데 시간이 늦어서 그만 자야될 것 같아요]

“뭐야, 언제 이렇게 됐어.”

지구가 그만 자러 가겠다며 페이스북을 떠났을 때, 확인한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성스럽게 보내오는 메시지에 차마 단답을 하거나 읽고 씹을 수 없어서 계속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던 결과였다. 결국 다음 날 하현은 피곤에 절은 채로 등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현아.”

오자마자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던 하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익숙한 얼굴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들어왔다. 조회 때 강당에서 자주 보는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대화해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지만 이름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본인의 기억을 더듬으며 하현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덕철인가?”

“……정인철이야.”

인철이 언짢은 표정을 숨기고 어색하게 웃으며 틀린 이름을 정정해줬다. 미안한 표정을 한 번 지어 보인 하현이 눈빛으로 용건을 물었다. 단상 위에서 자주 만난 사이긴 했지만 말을 걸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 하루에 연습 몇 시간씩 해?”

인철이 책상에 턱을 괴며 물었다. 하현은 질문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다 같은 목표를 가진 학교에서는 견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순순히 말해주기 싫어서 하현이 역으로 되물었다.

“얼마나 할 것 같은데?”

인철의 눈썹이 티 나지 않게 살짝 올라갔다. 얼마나 할 거 같냐니, 그걸 질문이라고. 재능이 밑받침하는 타고난 센스와 노력으로 항상 1등만 해왔던 인철에게 하현의 존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놓고 천재. 근데 또 노력도 남들의 배로 하는 천재. 아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춤에 전부 쏟아부을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냥 그 정도 하려면 얼마나 해야 되나 궁금해서. 너 잘하잖아.”

더 이상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인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하현이 그제야 졸음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는 건 네가 더하잖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하지 않은 말이었다. 인철이 겨울방학에도 학교에 매일 나와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연습하다가 쓰러져서 경비 아저씨가 병원에 데리고 갔다는 소문은 이미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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