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해체를 하자마자 삼촌에게 연락을 했다. 가기 전에 피디님까지 모시고 삼촌이랑 밥 한 끼 먹고 싶다고. 인생을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 일인 만큼 그 의미가 컸다. 마침 삼촌이 해외에서 촬영 중이던 프로그램이 끝나고 막 그저께 입국해서 오늘로 날짜를 잡았다.
“어서 오세요.”
미리 예약해둔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공개된 곳에서는 밥을 먹기 곤란해서 일부러 룸이 있는 식당을 골랐다. 안내받은 방은 인테리어도 단정하고 조명도 은은했다. 자리에 나란히 앉자마자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거의 다 오셨대요?”
“지금 막 주차하셨대.”
“아, 그럼 이걸로 4개 주세요.”
미리 주문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지구가 메뉴판을 펼쳐 가게에서 제일 비싼 정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지구가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형 때문에 피디님이 수고 많이 하셨잖아요.”
서바이벌 ID에 출연했던 게 삼촌의 부탁이었다는 말을 처음 했던 때가 떠올랐다. 3초 정도 가만히 눈을 깜빡이더니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래요?”하고 대답했다.
‘지난 일이 뭐가 중요해요. 형이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게 중요하지.’
왜 안 놀라냐고 물었더니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나름 한 소리 들을 각오하고 말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덤덤해서 내가 더 당황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서 테이블 위로 지구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떨어졌다.
“오셨어요?”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보는 피디님과 삼촌이었다. 한동안 이런저런 촬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며, 피디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피디님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삼촌은 너무 달라져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삼촌…….”
“선크림 안 바르고 돌아다녀서 좀 탔어.”
조금 탄 수준이 아닌데. 해외 나가서 고생 많이 했다더니, 얼굴도 푸석하게 상해 있었다.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피디님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요즘 너희 때문에 인터넷 난리도 아니잖아.”
“하하.”
“프로그램 처음 맡을 때는 이렇게 잘 될 줄 상상도 못했지.”
해체 직후에 난리가 난 인터넷은 여전히 뜨거웠다. 어떻게 팬들 통수를 치고 해체할 수 있냐며 다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올라왔고, 너무 슬퍼서 자살할 거라는 예고도 올라왔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칼에 찔린 멤버도 없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해체로 비관적인 자살을 했다는 기사도 뜨지 않았다.
“그거 촬영할 때가 방송국에서 일한 20년 중에 제일 힘들었지. 방송 노잼이라고 욕먹어본 적은 있어도 밤길 조심하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하하…… 그래도 피디님 그때 제가 커피 많이 사드렸잖아요.”
“그건 그랬지. 대타로 들어와서 싹 다 편집 당하고도 1등 먹고 데뷔라니……드라마가 따로 없어.”
“그때 형 어땠어요?”
사건의 전말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등장에 지구가 고개를 살짝 앞으로 뺐다. 네 명이 함께 공유한 사건이다 보니, 만날 때마다 항상 서바이벌 ID 이야기가 나왔다.
“가물가물한데…… 통편집 해달라고 했다더니 엄청 열심히 하고 그랬지. 아, 촬영 날 졸고 그러지 않았나?”
“맞아요. 형 처음 개인 무대 할 때 잤잖아요.”
“음식 나왔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잠깐 말을 멈추고, 잔뜩 앞으로 나가 있던 몸을 뒤로 살짝 뺐다.
정갈하게 나오는 음식들은 자극적인 뒷맛 없이 깔끔했다. 조금 밋밋했는지 중간에 안주로 골뱅이무침 먹으면서 소주를 까고 싶다는 말이 나왔지만, 질리지 않게 여러 소스로 요리된 음식들이 계속 나와서 먹을 만했다.
옛날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어느새 후식으로 나온 차까지 전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피디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잘 먹었다, 진짜. 근데 여기 비싼 곳 아니냐?”
“얘네가 얼마를 벌었는지 생각해보세요.”
“아…….”
왠지 모르게 미안한 표정을 짓던 피디님이 삼촌의 대답을 듣고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7년의 활동 기간 동안 정말 평생 써도 못 쓸 만큼의 액수가 통장에 찍혔다. 크게 돈이 필요한 곳도 없는데, 고마운 사람들에게 쓸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화장품 가게가 눈에 띄었다. 잠깐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뒤에 들어가서 얼굴에 바르는 크림을 집어 들었다. 비싼 게 좋은 거겠지 싶어 제일 가격대가 높은 걸 집어 들었더니 직원이 이 제품 정말 좋다며 극찬을 했다. 피디님과 삼촌 걸 각각 하나씩 세트로 구매해서 다시 가게를 나왔다.
“받으세요.”
“이거 뭐냐?”
“삼촌 얼굴이 많이 상해서요. 피디님도 얼굴 뻑뻑하실 때 바르세요.”
“오늘 무슨 날이야? 곧 군대 간다고 이러냐? 어쨌든 고맙다. 잘 바를게.”
잠깐 의심하던 삼촌은 곧 단순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엄연히 삼촌은 은인이었다. 삼촌이 대타로 잠깐 출연해달라고 얘기하지 않았으면 지난 7년도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지구랑 만날 일도 없었겠지.
“고마워요, 삼촌.”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준 삼촌에게 짧게 인사를 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삼촌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피디님이 불쑥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다음에는 이거 바르고 10년 젊어져서 와야겠네.”
능청스러운 말에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자리였다.
* * *
이름 모를 섬에 여행을 왔다. 숙소를 잡고, 비행기 표까지 예매한 예준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지구가 캐리어 안에 내 옷들까지 싹 집어넣어 짐을 싼 후였다. 날도 추운데 그냥 집에 있자고 했더니, 지구가 추우니까 따뜻한 곳에 가서 몸이라도 녹이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조용히 여권을 찾았다.
동태평양과 접해있는 섬에는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틀간 묵을 리조트의 바로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연중 따뜻하고 온화하다는 말이 정말인지 몸이 절로 풀릴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얇은 반팔 셔츠를 챙겨 입고 해변에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가끔은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정말인 것 같았다.
“애인이랑 여행 오기 딱 좋네.”
“형 애인 없잖아요.”
“그러니까 남자 다섯이서 왔잖아.”
칙칙해 죽겠다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제일 신나있는 건 예준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동생들을 대신해 뛰어가서 선베드와 파라솔까지 대여해왔다. 선베드에 길게 드러누워서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던 예준이 말했다.
“좀 있으면 이런 거 못 보니까 많이 봐둬라.”
“형은 안 가는 것처럼 말하네요.”
“주변에 다녀온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갔다 온 것처럼 자꾸 착각을 하네.”
예준이 스스로 머리를 한 번 툭 쳤다. 서른에 군대 가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니까.
“너는 제대하고 나오면 사진사 할 거라며.”
“나오면 바로 전시회부터 열 거예요.”
“그렇지, 돈 번 거 이럴 때 써야지.”
이미 휘영의 집에서는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돈은 충분하니까 마음먹고 준비하면 금방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휘영이 다른 건 몰라도 풍경 하나는 정말 잘 찍었다. 짐만 놓고 바로 나왔는데 그사이에 카메라는 또 언제 챙겼는지 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찍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야자타임 한 번 하자.”
“갑자기 뭔 야자타임이에요.”
“우리 지금까지 데뷔하고 한 번도 안 한 거 알아?”
뜬금없는 제안에 진짜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나 싶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는데 기억이 없었다. 예능이나 리얼리티에서 한 번쯤은 시켰을 법한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실 때도 기껏해야 손병호 게임이나 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맏형인 예준의 서열이 제일 밑에 있어서 아무도 야자타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지도 몰랐다.
“형이 나이 제일 많은데 야자타임이 하고 싶어요?”
“입대 전에 하극상 한 번 당해봐야 재밌지.”
“그래, 예준아?”
준이 예준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본인이 하자고 해놓고, 예준은 충격받은 듯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솔직히 말해서 계속 말 까고 싶었지.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형이라고 불러야죠.”
“네, 형.”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봤지만 이름만 들은 적은 없었다. 술에 취했을 때도, 정신없이 섹스하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형을 붙였다. 지구는 전혀 참여 의사가 없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예준과 준을 구경하고 있었다.
“왜요, 형도 하고 싶어요?”
그냥 쳐다본 것뿐인데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지구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 번쯤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해보라고 팔을 툭툭 쳤다.
“하현아.”
형 하나 떨어졌다고 이름이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불러놓고 분명 쑥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구는 생각보다 즐거워 보였다. 그 증거로 소리까지 내면서 웃고 있었다.
“형이 더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좋으면 진작 이름 한 번 불러보지 그랬어요.”
“그래도 형이잖아.”
지구한테 반말을 들어보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그냥 말을 놓으라고도 했었는데, 존댓말을 쓰는 게 말을 조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어느 날 기분이 안 좋거나 감정이 나빠졌을 때 하면 안 될 말을 꺼낼까 봐 그렇다고. 지구 나름대로의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딱딱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야자타임은 이렇게 수줍게 하는 거 아닌데요, 형들.”
중간에 끼어든 예준이 팔을 쭉 뻗으며 저지하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우리 그냥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의 국민답게 존대하자.”
본인의 주장으로 시작된 야자타임을 예준은 마음대로 끝내버렸다. 사진 찍는데 정신이 팔려 있느라 아직 한마디도 못 한 휘영이 눈을 깜빡이더니 뒤로 누우면서 웃었다.
“난 아직 한마디도 못 했는데 갑자기 유교 사상이 왜 나와.”
“하고 싶으면 해.”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뒷머리를 받친 휘영이 오랜만에 신나게 웃었다. 유교 발언 하나에 즐거워하는 걸 보니 정말 장소가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바다 앞에 있으니까 별게 다 재밌네. 다섯이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누워있는데 찰칵 소리가 계속 났다. 족히 200장은 찍었을 게 분명했다. 셔터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한숨 잘까 했는데, 휘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시회에 걸 사진 한 장만 찍자.”
휘영이 손을 휘저으며 우리를 일으켜 바다 앞으로 밀었다.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섰더니, 휘영이 지금 딱 거기라며 크게 소리쳤다. 대체 삼각대는 언제 들고 나온 건지 모래사장 위에 익숙하게 세우더니 카메라를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쟤 뭐야? 저거 언제 들고 나왔어?”
“아까 나올 때요…….”
“이제 찍을게요.”
초점이 잘 안 맞는지 카메라를 자꾸 이리저리 만지더니, 곧 다 정리가 됐는지 휘영이 이제 찍겠다고 했다.
“넌 안 와?”
“여기서 이거 찍어야죠.”
“하나, 둘, 셋 하면 찍히는 거 있잖아. 타이머 설정해. 그러라고 삼각대 세우는 건데.”
“그렇게 하면 사진 똑바로 안 나와요.”
“우리가 한 프레임에 있는 게 작품이지 뭘 그래.”
예준의 뻔뻔한 말에 휘영이 정색했다. 아무래도 사진이 흔들리거나 할 수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때마침 앞을 지나가는 외국인을 불렀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잘 풀렸는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찍어주신대.”
휘영을 가운데에 끼워 넣고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몇 번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초점을 잡아보는 듯하던 외국인이 찍어도 되겠냐는 신호를 보냈다.
“오케이!”
준이 큰 목소리로 준비 완료 사인을 보냈다. 딱히 특별한 포즈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눈이라도 똑바로 떠야겠다 싶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데, 갑자기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던 손이 덥석 잡혔다.
“다시 찍는대요.”
나도 모르게 놀라서 살짝 움직였는데, 흔들렸는지 외국인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맞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는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정면을 보며 웃고 있던 지구가 말했다.
“앞을 봐요.”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에서, 난생처음 마주한 풍경 앞에 나란히 섰다. 매일매일 다른 날 중에서도 유난히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넓은 모래사장과 맞닿은 바다가 푸르고, 하늘이 맑고,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다시 한번 찰칵 소리가 났다. 우리는 그대로 하나가 됐다.
[데뷔를 피하는 방법 3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