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알람이 작게 울렸다.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곤한 사람을 깨우기에는 무리가 있는 볼륨이었다. 새벽 스케줄 때문에 늦게 잠들어서 피로는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손을 움직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흐린 의식 사이로 자꾸만 활기찬 종소리가 파고드는데도 눈은 떠지질 않았다.
“일어나 봐…….”
평소에는 칼같이 일어나서 알람을 끄고 깨워주던 애가 웬일로 잠잠했다. 눈을 감은 그 상태로 팔을 뻗었는데 있어야 할 게 없었다. 휑하니 빈자리를 더듬다 눈을 번쩍 떴는데 역시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각자 집에서 자기로 한 걸 깜빡 잊었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알람을 끄는데 5분 간격으로 맞춰놓은 게 이미 4회차까지 울린 상태였다. 덕분에 예정보다 20분 늦게 일어나서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두 개 있는 칫솔 사이에서 내걸 찾아내 이를 닦고, 빠르게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딱 맞춰서 알람 설정을 해놨는데 20분이나 늦게 일어났으니 촉박한 게 당연했다.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면서 이불 정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매니저 형이라는 글자가 보여서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서랍장 위에 올려놨다.
“여보세요?”
-어, 하현아. 일어났지? 조금 있다가 촬영팀 들어갈 건데.
“이불 정리만 하면 돼요.”
오늘이 리얼리티 프로그램 첫 촬영 날이었다. 최대한 빨리 촬영하고, 편집해서 11월 컴백과 맞춰서 방송할 거라더니 정말 일정이 급했다. 촬영 내용과 주의사항은 전부 숙지했고, 어제 늦은 시간까지 청소도 전부 끝냈다. 집안 곳곳에 걸려있던 사진들은 떼어내서 박스에 담아 침대 밑에 완벽하게 은폐했다. 또 지구가 입었던 옷이랑 썼던 베개는 옷장 속에 잘 넣어 놨다. 이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당히 깨끗하고, 누가 봐도 혼자 사는 집처럼 보였다.
-그래, 카메라 설치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있고.
“네.”
-그럼 나 준이한테 전화 좀 해볼게.
“아직 안 했어요?”
-진작에 했지. 근데 전화 끊고 또 잠들었을 거 같아서.
다섯 명이 전부 독립하는 바람에 매니저 형은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이렇게 분주했다. 숙소에 살 때는 지구만 깨워도 알아서 다들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한 명 한 명을 따로 전화해서 깨워야 했다. 못 일어나는 요주의 멤버 하나만 제대로 깨우면 되지만.
이불을 각을 맞춰서 정리해두고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누웠다. 이렇게 천장을 보면서, 눈을 서른 번만 더 깜빡이면 잠들 것 같았다. 그때 딱 타이밍 좋게 손에 쥔 휴대폰이 울렸다.
[형 촬영 끝나고 바로 작업실 갈 것 같아요.]
지구한테 날아온 카톡이었다. 웬만해서 문자로 보내는 앤데, 무슨 일로 카톡을 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메시지 내용을 노려봤다. 평소에는 붙이지도 않는 온점까지 붙여가면서…….
[(이모티콘)]
흰색 배경과 검은색 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방심한 사이에 시야에 불쑥 나타나 버린 새하얀 토끼를 보며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3초가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이런 걸.
[유료 이모티콘(결제:200별)]
와중에 유료 이모티콘이었다. 분홍색 볼터치를 한 흰토끼를 보고 있으면, 추운 날 바깥에 서 있는 지구가 생각났다. 어디서 자기 같은 걸 사 와서. 스물여섯의 건장한 남자가 정말 토끼를 닮았을 리 만무했지만 내 눈에는 그냥 그렇게 보였다. 아직도 열아홉처럼 보일 때가 있으니까.
[샀어?]
[아니요 선물 받았어요]
[? 누가?]
이모티콘 선물 줄 만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승혁이 형이요. 별이 생겼는데 쓸데가 없다고 인기 순위에 있는 거 사서 보내셨대요]
아. 승혁이 형이라면 저번 수록곡을 같이 작업했다던 작곡가였다. 지구는 같이 작업하는 사람, 만나는 사람, 하다못해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사람까지도 알아서 다 알려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누군지 알긴 아는데……. 쓸 곳이 없다고 굳이 지구한테 보내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유부남인 사람이기 때문에 쿨하게 넘길 수 있었다. 알았다고 답장을 보낸 뒤 휴대폰 화면을 껐다.
“안녕하세요.”
잠시 뒤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것도 단체로. 촬영팀이 빠르게 집안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동안 소파에 얌전히 발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지시받은 대로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카메라를 향해 다가갔다. 각도도 얘기한 그대로였다. 커튼을 등지고, 정면으로 곧게 걸어와서. 손을 흔들면서 시청자, 그러니까 팬들에게 인사하기.
“네……안녕하세요. 여기가 제 집인데요.”
‘레브 멤버들의 집 대공개!’ 같은 타이틀이 왼쪽 상단에 걸리고, 그 아래는 어색한 표정으로 손 흔드는 내 모습. 카메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항상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여기가 제 방이고, 바로 옆이 욕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방마다 문을 열었다. 욕실까지 카메라에 선명하게 담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결국 집 구경이 전부 끝난 후에 혼이 빠진 것처럼 멍하게 소파에 앉았다. 뭐라도 계속해야 하니까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촬영에 정해진 형식은 없었다. 그냥 집안에서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것. 아니면 약간의 조미료를 첨가해서 색다른 활동을 해보는 것. 평소에 집에서 하는 거라고는 지구랑 대화하기, 지구랑 노래 듣기, 지구랑 TV 보기 정도밖에 없었기에 뭘 해도 색다른 거였다. 매니저 형이 팬들은 숨만 쉬어도 볼 거라고 했지만 이왕 하는 거 잘해보고 싶었다.
“그럼 오랜만에 요리를 해 볼게요.”
결국 고민 끝에 쿠킹 방송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위험성이 높은 요리에는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간단한 가정식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앞 마트에서 눈에 보이는 조미료와 재료들을 주문시켰다.
“지금 뭐 만들고 있어요?”
“계란 프라이요.”
커다란 카메라가 프라이팬 위를 찍었다. 기름을 너무 많이 부은 탓에 사방팔방으로 튀는 중이었다. 뜨거운 기름의 공격을 받으면서 겨우 익혔는데, 결국에는 바닥이 다 탔다. 소시지도 굽고, 떡갈비도 구워서 놨는데 다 모아놓고 보니까 그냥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우리 팬분들은 항상 건강하게 드세요. 이런 거 말고.”
초라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밥상을 먹으며 팬들에게 교훈을 전했다. 이런 음식 자주 먹지 말라고. 뭐라도 더 해보려고 했는데 멤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다 보니 할 게 없었다. 말주변도 없고, 예능감도 없고.
결국 이사할 때 설치만 해둔 새 컴퓨터로 신규 게임을 몇 판 하다가 촬영이 끝났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방송이었지만 촬영팀 별 상관없다는 듯 카메라를 철수시켰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고, 합쳐서 영상을 만들고, 그걸 멤버들과 함께 보면서 코멘트하는 것까지 찍어야 1화 방송이 나갈 수 있었다. 진행해주는 사람 없이 혼자 하려니까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보나 마나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렸을 게 뻔했다.
“하아…….”
그래도 마지막 리얼리티인데 좀 웃겼어야 했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개그라도 쳐볼 걸 싶어 천천히 소파 위로 엎어졌다.
끝나자마자 작업실로 간다던 지구가 떠올랐다. 해체 전에 팬들에게 주고 싶은 곡이 있다고 했다. 지금도 컴백 준비로 분주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짬짬이 시간을 내보려고 해도 불가능할 게 뻔했다. 11월 다음은 바로 12월이니까. 심지어 해체 직전의 연말이면 더 정신없을 게 뻔했다. 그때쯤이면 기사도 전부 나가서 떠들썩할 테니, 음악 작업을 하려면 지금이 유일했다.
근처에 있는 회사 건물 3층에 지구의 개인 작업실이 생긴 지도 꽤 됐다. 초반에는 회사 아티스트들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작업실을 사용했는데. 어차피 쓰는 사람도 몇 없어서 거의 개인 공간처럼 쓰긴 했지만. 가서 작업하는 것 좀 구경해야겠다 싶어 바로 매니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지금 어디 있어요?”
-나 지금 회사.
“저 지금 회사 가려는데.”
-그래? 10분만 기다려.
회사에 가겠다는 말에 매니저 형은 정말 거의 10분 만에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인데 차를 타니까 정말 눈 깜빡한 사이에 도착했다. 회사 건물 앞에는 언제나처럼 몇몇 팬들이 있었고, 매니저 형은 부드럽게 운전해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 들러서 카페라떼랑 아이스초코를 하나씩 주문했다. 지구의 취향을 고려해서 카페라떼에는 시럽도 잔뜩 넣었다. 매니저 형은 마실 것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고 해서, 카운터에 있는 초코칩 쿠키 두 개를 같이 계산했다.
얼마 전에 수리했다던 엘리베이터는 잠깐 올라가다가 2층에서 멈췄다.
“나 먼저 내릴게.”
마저 할 일이 있다며 매니저 형이 먼저 내리고, 나는 두 층 더 올라가서 4층에 내렸다. 4층에는 연습실과 작업실이 있었다.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지구가 쓰는 작업실은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복도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놀라서 옆을 쳐다봤다. 한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세 사람이었다. 건장한 성인 남자 셋이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 부담스러워서 급히 인사를 받았다.
“아, 네.”
우렁찬 인사로 발걸음을 붙잡은 세 사람은 우리 회사 연습생들이었다. 원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회사를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낯이 익었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얼굴을 비춘 탓이었다.
지구가 이야기를 해줘서 연습생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얘네는 그중에서도 높은 편이었다. 우리가 데뷔하고 1년인가, 1년 반인가. 그쯤에 들어왔으니까. 중학생일 때부터 본 것 같은데 벌써 성인이 된 애도 있었다.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얼굴을 보며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선배님. 저희 이번에 데뷔조로 발탁됐어요.”
아, 이번에 데뷔하는 애들이 얘네였구나. 웃는 얼굴이 세상 그 누구보다 밝았다. 어쩐지 인사할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니. 아이돌 연습생들이 가진 간절함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저 기쁨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5년을 연습한 끝에 다가온 데뷔가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할지는 이해가 됐다.
“아아, 대충 얘기 들었어요. 축하해요.”
“늦어도 내년 안에는 데뷔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재계약을 포기하겠다는 의견을 전하자마자 사장님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회사의 규모를 유지하던 그룹이 하루아침에 통째로 사라지는데, 대체할 그룹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작년에 솔로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는 잘생겼지만 노래 실력이 떨어져서 데뷔와 동시에 가라앉았고, 3년 전에 데뷔한 걸그룹은 음원 성적은 좋지만 팬들 화력이 약했다. 콘서트나 굿즈 판매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는 회사 입장에서는 새 보이그룹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바쁘겠네요. 데뷔 준비하려면.”
“드디어 바쁠 수 있다니까 너무 좋아요. 근데 선배님들은 재계약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키가 가장 큰 연습생이 말을 흐렸다. 재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니까, 아마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진짜 잘 나가시잖아요. 제가 다 아까워서…….”
안타까운 표정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공존했다. 예전에는 사람 표정 읽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이를 먹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이제는 상대방의 얼굴이 다 읽혔다.
“멤버들끼리 얘기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데뷔 정말 축하하고 열심히 해요.”
“네, 선배님들 몫까지 열심히 할게요!”
세 명이 동시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몫까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정말 실감이 됐다. 이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그룹이 데뷔하고, 팬들은 또 다른 가수의 팬이 되고. 내 앞에 선, 막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는 세 사람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작은 파도가 치는 걸 느꼈다. 무언가가 넘실넘실 밀려와서 현실을 곱씹게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신인 그룹을 데뷔시킬 준비를 하고, 우리는 마지막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로 곧 해체하는구나.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