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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를 피하는 방법-106화 (106/130)

18화

미국에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 있지. 잔뜩 흐트러진 상태로 숨을 몰아쉬던 지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원 버튼을 끈 것처럼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몸을 붙잡고 문을 좀 더 열었다.

“일단, 일단 들어가자.”

두 손을 붙잡고 잡아당기자 몸이 힘없이 끌려왔다. 얼굴이 좀 빨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상태가 영 안 좋았다. 문을 닫는 사이에 지구는 얌전히 신발을 벗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어제 12시 30분 비행기로 미국에 가놓고, 하루 만에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으면서 급히 양쪽 볼을 잡았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얼굴에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손에 닿는 온도가 뜨거워서 손을 위로 올렸다. 이마를 한 번 쓸어보니 열이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심한 거 아니었어. 그것보다 너 지금 열…….”

“대체 얼마나 아팠으면 병원을 가요!”

열이 높은 것 같아서 매니저 형을 부르려고 일어나는 순간 팔이 붙잡혔다. 그리고 동시에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지구가 이렇게까지 크게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투어 중에 병원 가는 일 없게 하려고 의료팀 대동하고 다니는 건데. 근데도 병원을 갔다는 거잖아요. 뭐가 심한 게 아니에요?”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느리고 낮아졌다. 하지만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했다. 그저께 콘서트 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여유롭게 노래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항상 목 관리 잘한다고 칭찬받는 앤데, 이틀 만에 다시 듣는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형 전화도 못 받고…….”

지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목이 눈에 띄게 울렁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숨을 한 번 가쁘게 몰아쉰 지구가 말을 이었다.

“비행기 탑승하기 직전이라 가방에 넣어놔서 몰랐어요. 무음이라서 울리지도 않았고. 들고 있었으면 바로 알았을 텐데.”

이동할 때는 휴대폰 안 하는 것도, 무음으로 해두는 것도 다 아는데. 그게 잘못된 게 아닌데도 지구는 횡설수설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다 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을 뗄 틈도 없이 계속 말이 쏟아졌다.

“탑승하기 직전에 잠깐 확인했는데 부재중이 있는 거예요. 근데 몇 번을 걸어도 형이 안 받아서, 매니저 형한테 걸었는데도 안 받고. 로드 매니저 형이 빨리 가자고 해서 그냥 탔는데.”

“알았어, 응.”

스케줄 담당이 업무이다 보니 매니저 형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일부러 벨 소리도 크게 맞춰놓으니까. 놀란 건 알겠지만 일단 이걸 계속 듣고 있는 것보다는 달래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은 다음에 등을 두드려줬다. 진정하라는 의미였는데도 지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비행기 탈 때도 계속 후회가 돼서. 내가 너무 형 생각을 못 한 것 같아서. 왜 그렇게 말했지, 괜히 목소리 높이고. 콘서트 끝난 날 저녁에도, 형 방에 찾아갈 걸……하고.”

항상 침착하고 차분한 지구가 이렇게 헐떡거리면서, 뇌를 거치지 않고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열이 올라서인지 본인도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빠르게 터져 나오던 말이 어느 순간 느려지더니, 뚝 끊겼다. 어긋나 있던 초점이 똑바로 돌아왔다. 그제야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마주친 눈이 일렁였다. 새까만 눈동자에 곧 물기가 어렸다.

“너 왜 울어.”

너무 당황해서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튀어 나가는 바람에 음이 나갔다. 팔을 뻗어서 손을 어깨에 올리는 순간 결국 툭 하고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한테 화가 났어요. 콘서트 끝나고 바로 확인할걸, 괜찮냐고 한 번 더 물어볼걸, 같이 있을걸…….”

점점 잦아드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투명한 액체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단단한 물건으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갑자기 숨쉬기가 버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어깨에 손만 가만히 올려둔 채로, 마음대로 정지한 사고 회로를 돌려보려 애썼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디스크가, 무리해서 콘서트를 한 탓에 덧나서 병원에 입원한 게. 얘는 지금 그걸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야, 그게 왜…….”

입을 벌렸는데 말문이 막혀서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게 왜 네 잘못이냐고 다그치려고 했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방금 전까지 지구가 없던 방에서 혼자 떠올렸던 것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연애하면서 싸웠던 기억이 거의 없었던 것, 화내는 지구 얼굴이 흐릿한 것, 내가 잘못한 일인데 지구가 사과하고 끝난 것.

지금까지 작게라도 다툰 것 중에 네 잘못이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툰 기억이 별로 없는 이유는 순전히 지구 때문이었다. 싸울 빌미를 안 주니까. 뭐든지 다 져주고, 다 양보해주고…….

“그게 왜 내 잘못이야, 다 내 탓인데.”

그제야 한 마디가 겨우 나왔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였다. 이유가 있었다. 어쩐지 목이 울렁인다고 생각했는데, 똑바로 바라본 지구 얼굴도 일렁이기 시작했다.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더니 이번에는 흐릿해졌다.

“사과하지 마.”

미국에서 홍콩까지, 잡혀있던 작업을 던져가면서 여기까지 와서는 자기 잘못이라고 사과하고 울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사람이랑 6년을 연애해왔는지가 갑자기 밀려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았다. 울지 말고 달래주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치니까 생각처럼 잘 안됐다.

“내 잘못이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도, 무리해서 무대에 올라간 것도, 콘서트가 끝나고 아프다고 말하지 않은 것도 다 난데. 전부 내 잘못인데 왜 지구가 자책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꾸역꾸역 끄집어내서 한마디 더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많은데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울지 마요.”

지구가 자기가 먼저 울어놓고 울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쭉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앞에서 점점 숨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아까 이마를 만지면서 느꼈던 열을 떠올렸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매니저 형을 불렀다. 지구가 홍콩으로 다시 돌아온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매니저 형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척 봐도 안 좋은 지구 상태에 놀란 것 같았다.

“얘 상태가 왜 이래?”

일단 방으로 데리러 가서 눕혀야겠다며 둘이서 양쪽에서 부축하고 내 방을 나섰다. 바로 옆에 있던 지구 방 문을 열었더니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을 하던 스태프가 깜짝 놀라서 과자 봉지를 쏟았다. 한 층을 통째로 빌린 거라 지구가 쓰던 방만 미리 뺄 수 없어서, 스태프들이 휴게실로 쓰고 있다더니.

“뭐예요?”

“미국 갔다가 돌아왔네요. 자리 좀 비켜주세요.”

빠르게 물건들을 챙긴 스태프들이 나가고, 침대 위에 눕힌 다음 열을 쟀는데 생각보다 높았다. 의료팀에게 연락해서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도 올려줬다. 푹 자고 일어나면 금방 열이 내릴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다들 밖으로 나갔다.

“얼마나 아프면 눈까지 빨갛냐?”

울어서 그런 건데, 완전히 잘못 짚은 매니저 형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먼저 나가보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괜찮아?”

바닥에 살짝 앉으면서 손을 붙잡았는데, 지구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그리고 눈짓으로 왜 거기 앉아있냐고 물었다.

“너 잘 때까지 있으려고.”

“금방 잘 거니까 얼른 가요. 방에 가서 누워요.”

둘 다 목소리가 잠긴 게 웃겼다. 사실 지구는 잠긴 게 아니라 거의 목감기에 심하게 걸린 수준으로 다 갈라져 있었다. 울어서 눈가도 빨갛고.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것보다 그냥 푹 쉬게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심조심 일어나요, 허리 삐끗하지 말고요. 가서 약도 먹고.”

“알겠어.”

퇴원하면서 약 새로 처방받은 건 어떻게 알았지. 약 먹는 시간 챙기는 게 알람시계 급인 지구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순순히 대답한 다음에 나가려는데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천천히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괜히 나가기 싫어서 일부러 느릿느릿 묶었는데, 한참 있다 뒤를 돌아보니 벌써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빨리 잠드는 애가 아닌데. 아파서 피곤했나 보다 싶어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거기서 뭐 해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란히 서 있는 매니저 형과 로드 매니저 형이 눈에 들어왔다. 왜 복도에서 저러고 있나 싶어서 물었더니, 매니저 형이 말없이 손을 까딱했다. 이쪽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어, 너도 눈 빨갛네. 둘 다 왜 그래? 울었어?”

“아니, 그것보다 왜요?”

“아, 쟤 자냐?”

“바로 잠들었어요.”

매니저 형에게 방금 전에 막 보고 나온 걸 보고하는데, 로드 매니저 형이 툭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꼬박 30시간을 깨어 있었는데 잠이 안 들고 배기겠냐.”

“비행기에서 안 잤어요?”

30시간을 깨어 있었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지구랑 같이 미국으로 갔던 로드 매니저 형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건지는 하나도 전해 듣지 못했다. 미국에서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아니, 비행기 내리자마자 너 입원했다는 문자 봤는데 바로 홍콩으로 가겠다는 거야. 작업은 어쩌냐고 물어봤는데 홍콩 가는 비행기 찾느라 정신없더라. 결국 그쪽에 양해 구해서 일정만 취소하고 정신없이 바로 들어왔지. 어차피 열두 시간 가야 되니까 눈이나 좀 붙이라고 했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끝까지 안 자더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로드 매니저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내 안부를 물었다.

“넌 괜찮아? 입원했다는 문자 받고 깜짝 놀랐잖아.”

“괜찮아요.”

내리자마자 바로 홍콩 가는 비행기를 찾았다고. 미국 시간으로는 아침이었겠지만 홍콩에서는 새벽이었다. 그때는 병실에서 자고 있었고, 휴대폰도 없었다. 그래도 아침까지 기다려봤다가 연락 먼저 해봤을 수도 있는 건데.

마음에 꽂힌 목소리라며 같이 작업할 날을 기대하던 지구가 머릿속에 스쳐 가면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미국이 바로 옆 나라도 아니고, 직항으로 꼬박 열두 시간이 넘게 날아가야 하는 곳인데.

“3년 일하면서 쟤가 손톱 물어뜯는 거 처음 봤잖아.”

“지구가 데뷔 초부터 하현이 많이 챙기긴 했지. 난 처음에 하현이가 동생인 줄 알았잖아.”

“그건 그런데 작업까지 취소하고 들어올 정도는 아니지 않나.”

매니저 형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도란도란 주고받는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얼마나 과분한 애정을 받고 있는지가 느껴져서 또 머리가 멍해졌다.

“좀 과한 게 있어. 아니, 어떻게 미국까지 갔다가 바로 돌아와?”

“저 정도면 나중에 그룹 나가도 쫓아다니겠는데.”

“하현아, 너 나중에 은퇴하고…… 야, 어디 가?”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피곤해서.”

“아, 그래. 너도 들어가서 쉬어야지.”

매니저 형이 얼른 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내 방 앞에 서서 한 번 더 인사한 뒤에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으로 문을 밀어 닫으면서 쓰러지듯이 문에 기대 현관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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