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캄캄한 저녁이었다. 1시 전에 병원에 왔던 거로 기억하는데, 벌써 9시가 넘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소파 위에 앉아있는 예준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이야……. 형이 왜 여기 있어요?”
“멀쩡하게 들어갔던 애가 갑자기 입원을 했다는데 안 와보냐. 나머지 둘도 여기 있다가 매니저 형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갔어.”
매니저 형이랑 밥 먹으러 갔다는 대목보다 둘이라는 숫자가 신경 쓰였다. 분명 휘영이랑 준일 텐데, 그럼 지구는. 매니저 형의 연락을 받았으면 바로 병원으로 와줬을 텐데. 그 잠깐 사이에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아직 호텔에 그냥 있나. 고집부리다가 입원한 거니까, 그게 화나서 안 왔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추측하다가 그냥 예준에게 물었다.
“지구 지금 호텔에 있어요?”
“뭐라는 거야. 너 진짜 정신없구나.”
“네?”
“걔 미국 갔잖아. 비행기에 있겠지.”
미국. 해외 투어의 두 번째 콘서트가 있었던 나라임과 동시에, 투어가 끝나면 지구가 작업하러 간다고 했던 나라였다.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이틀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고, 우리 앞으로 준비된 티켓은 4장이었다. 지구는 바로 다음 날 12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까 전화했을 때 안 받던 이유도 깨달았다. 이동할 때는 휴대폰 안 보는 애니까.
“배웅 안 했어요?”
“했지, 당연히.”
알아서 기억하고 때맞춰서 일어나야 했는데. 지금까지 미국 갔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자괴감이 밀려왔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공항인 것도 모르고 전화 걸고, 한참 비행기 타고 가는 중일 텐데 호텔에 있냐고 물어보고.
“정신없어서 기억 못 했어요. 멍청하게 고집부린 거 때문에 화나서 안 온 줄 알고.”
“네가 고집부린 건 아네?”
“……알아야죠.”
“그나마 멀쩡하게 끝나서 다행이지, 하다가 허리라도 한 번 잘못 삐끗했으면 진짜 좆될 뻔한 거야.”
좆될 뻔했다는 표현은 좀 과격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실수로 삐끗했으면 정말 큰일 났을 수도 있었으니까.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됐다, 네 입장도 이해하니까. 불참 공지 냈으면 어떻게 됐겠냐?”
“당연히…….”
“여기저기서 물어뜯고 루머 생성하고 난리도 아니었겠죠.”
욕먹었겠죠. 하고 대답하려던 말이 입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휘영이 대신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찰싹 붙어 준도 들어왔다. 나와 예준뿐이던 병실에 갑자기 사람이 늘어났다.
“형 일어났네요! 허리 괜찮아요?”
“괜찮아?”
“주사 맞았더니 좀. 밥은 맛있는 거 먹었어?”
“네. 세계 어디를 가도 맛집은 다 통하는 거 같아요.”
“얘 세 그릇 먹었어.”
휘영이 엄지손가락으로 준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성장기가 지나갔는데도 준은 여전히 잘 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준이 예준이 앉아있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야, 사람 있는 거 안 보이냐? 앉아.”
“피곤한 게 아직 다 안 풀렸어요!”
어이없다는 듯이 준을 위아래로 훑던 예준은 곧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얌전히 병실 벽에 기대섰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피곤하다면서 싸웠을 텐데, 확실히 앞자리가 3이 되어서인지 사람이 많이 얌전해졌다.
지구한테 연락을 해야겠다 싶어 휴대폰을 찾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쥐고 온 것 같은데 아니었나?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형, 혹시 제 휴대폰 못 봤어요?”
“네 호텔 방에 있겠지. 매니저 형이 네 폰 챙길 여유가 있었겠냐.”
듣고 보니 그랬다. 깜짝 놀라서 의료팀 부르고, 급하게 병원까지 왔는데 휴대폰을 들고 왔을 리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매니저 형이 챙겼을 리도 없고.
“매니저 형 어디 갔어요?”
“형 잠깐 호텔 들렀다가 온다고 그랬는데. 네 폰 챙겨오라고 해줄까?”
“아, 응.”
알겠다며 휘영이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를 하는 듯 화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적이 찾아왔지만, 그 잠깐의 고요를 참지 못하고 준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매니저 형 연락받고!”
“그렇지.”
“지구 형한테 아직 연락 안 했죠?”
“매니저 형이 휴대폰 가져다주면 바로 해야지.”
“12시 30분 비행기를 탔는데, 지금 내렸겠냐? 아마 네 전화 받으려면 여기서는 새벽 돼야 할걸.”
생각해보니 아직 비행기에서 내렸을 리가 없는 시간이었다. 걱정도 많이 할 텐데, 작업하러 간 애 방해하지 말고 그냥 말하지 말까. 손톱으로 이불을 잡아당기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예준에게 물었다.
“지구는 아직 모르겠죠?”
“지금 비행기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아, 가기 전에 제대로 못 풀지도 못했는데…….”
콘서트 끝나고 아파서 바로 들어간 바람에 결국 얘기도 못 하고 바로 미국으로 떠났으니까. 리허설 날 다투고 말도 안 했고, 그대로 무대에 올라갔으니까 분명 아직 화가 안 풀렸을 게 분명했다. 거기에 결국 고집부린 결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됐으니까 더 화나겠지.
“뭘 못 풀어?”
“우겨서 결국 무대 올라갔잖아요. 리허설 할 때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안 했는데…… 화 많이 났을걸요.”
“누가 화나? 걔가?”
예준이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매니저 형이 너 깨우려고 했는데, 온지구가 깨우지 말라 그랬어. 너 피곤할 거라고, 그냥 자게 내버려 두라고.”
어쩐지 다른 멤버들은 전부 배웅하러 갔는데 나만 안 깨웠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피곤할 거라고, 깨우지 말라고……. 예준의 입으로 전해 들은 지구의 말에 코가 찡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다시 침묵이 찾아와서, 다정한 배려를 느리게 곱씹는데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매니저 형이 들어왔다.
“너 휴대폰 가져왔어.”
매니저 형에게 건네받은 휴대폰을 켜려는데, 전원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켜놔서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았다.
“배터리 나갔네.”
“진짜? 아씨, 충전기 가져다줄까?”
“됐어요, 내일 퇴원하는데요 뭐.”
어차피 지금은 비행 중일 테니까 연락도 안 되고. 켜지지 않는 휴대폰을 대충 치운 다음에 이불을 덮었다. 할 것도 없으니 그냥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제 다들 가서 자요. 저도 잘 거니까.”
“이제 허리 괜찮냐?”
“진통제 맞아서 괜찮다니까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예준이 벌떡 일어났다. 소파에 누워있던 준을 잡아당겨서 일으킨 예준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빨리 가자며 매니저 형을 불렀다.
“얘네 데려다주고 올게.”
“형도 그냥 가서 자요. 병실 좁은데 뭐 하러.”
“담당 연예인 혼자 병실에 내버려 두고 어떻게 호텔 가서 자냐. 자고 있어.”
정말 금방 오겠다며 매니저 형이 셋을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병실에서는 시계 초침 소리 빼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초침 소리에 맞춰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보니 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느즈막이 점심까지 먹은 뒤에 퇴원을 했다. 확실히 하루 종일 편하게 누워있었더니 좀 안정이 된 상태였다. 처방받은 약을 챙겨서 돌아오자마자 절대 안정이라면서 매니저 형이 강제로 침대에 눕혀줬다. 물리치료사가 직접 방까지 올라와서 짧게 치료도 받았다.
“푹, 진짜 푹 쉬어. 내일모레 비행기니까 그전까지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절대 밖을 돌아다니지 말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침대 위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한정적이었다. 일단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워서 휴대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꺼져있던 사이에 도착한 알람을 살폈다. 그리고 부재중 목록에 잔뜩 쌓인 익숙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 지구한테서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문자도 수십 통이었다.
[형 전화 왜 했어요? 비행기 기다리느라 못 받았어요]
[형 저 조금 있으면 비행기 타서 연락 못 해요]
[다들 통화 중인데 무슨 일 있어요?]
일어나자마자 지구한테 전화를 걸고, 병원에 실려 가던 도중에 도착한 문자였다. 비행기 타기 바로 직전에 부재중을 발견하고 남긴 문자인 것 같았다. 이걸 지금 봤네.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전원이 꺼져있다는 암담한 기계음만 들을 수 있었다. 무음은 해놔도 전원을 꺼놓는 애는 아닌데. 지금이면 미국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연락이 안 되니까 기운이 빠져서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지구 보고 싶다.’
새까만 천장에 그 무엇보다 익숙한 얼굴을 그려냈다. 당연하게도 평소처럼 순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변했지만 성격은 그대로였다. 화도 잘 안 내고, 남 배려 잘하고. 섬세한 성격이라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상처도 많이 받고.
그러다 문득 6년을 연애하면서 싸웠던 경험을 떠올려봤다. 언제였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언성을 높이고, 손가락질을 하는 지구는 기억 속에 없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게 연예계 선후배들이랑 마음에 들지도 않는 술자리를 가졌을 때, 한 번 취해서 늦게 들어간 날이었다.
‘형, 11시 이후로 연락도 안 되더니 누가 이렇게 마시라고 했어요?’
대략적인 기억으로는 새벽 3시쯤이었다. 2년 전에 살던 숙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바로 시계가 있었는데, 시야가 흐린 와중에도 눈치는 보여서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던 기억이 있었다.
지구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들과 약속이 있을 때 취해서 들어온 적이 없었다. 자정을 넘기고 들어온 적도 없었다. 술에 너무 약해서 본인이 알아서 입을 안 대기도 했고, 또 나랑 약속한 건 절대 어기지 않았다. 그런 애인 걸 알아서, 꼬박꼬박 연락하고 자정 전에 들어오기로 한 약속을 와장창 깨먹은 게 너무 미안했다.
근데 취하면 헛소리가 심해지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툭툭 뱉는 게 문제였다. 결국 취한 상태에서 다퉜다. 취했을 때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별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가슴팍도 몇 대 쳤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 새벽의 나는 정말 진상이었는데, 결국 지구가 씻겨주고, 재워줘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부끄러웠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비슷한 사건들이 두 개 더 떠올랐다. 둘 다 내가 잘못하고, 가볍게 다퉜다가, 지구가 먼저 사과하고 끝난 일들이었다. 크게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목소리가 높아지려고 하면 지구가 그 상황을 빠르게 끊어냈으니까.
다른 일들을 더 떠올려 보려는 순간, 복도를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만 쓰는 이 복도에서 이렇게 뛸 사람이 없는데. 그나마 바쁘게 돌아다닐 사람이라면 매니저 형밖에 없어서 일단 몸을 일으켰다. 왠지 내 방으로 올 것 같아서였다.
예상은 정말 맞아떨어졌다. 딱, 발소리가 멎고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매니저 형 대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보였다.
“형.”
지금쯤 미국에서, 같이 작업할 가수와 한참 회의를 하고 있어야 할 지구가 숨을 몰아쉬면서 서 있었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