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03화 (103/130)

15화

투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종종 비슷한 꿈을 꿨다. 매일은 아니고 보통 3일에 한 번 정도 꿨다. 일종의 악몽 같은 거라 잠에서 깰 때는 항상 놀라서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연애 사실이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져 나가는 내용이었다. 꿈에서 만난 기자의 수만 해도 몇 명인지 셀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같은 성별인 지구랑 연애한다는 사실로 세상의 질타를 받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처음 고백을 받았을 때도 충격받을 정도로 놀라지 않았고, 혹시라도 걸릴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지금까지 기자나 사생들을 만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불안해진 건 왜일까. 너무 익숙해진 상황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허리가 아파서 이제 편하게 자기도 힘들었다. 어떻게든 투어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오른손을 들어 하나씩 접어봤다. 이제 드디어 아시아니까, 하나, 둘, 셋…….

“아, 깜짝이야.”

마지막으로 네 번째 손가락을 접는데, 갑자기 침대 위에 올려놨던 휴대폰이 마구 울렸다. 진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떨어지려는 휴대폰을 낚아채서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지구였다.

“왜?”

-거기로 가도 돼요?

“심심해?”

-아니요. 작업하고 있는데 형 보고 싶어서.

한 번 작업에 빠지면 누가 불러도 모르는 앤데, 중간에 보고 싶다고 전화라니. 휴대폰을 대고 있던 귀가 순간 뜨끈해졌다. 굳이 오라고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가방을 뒤지는 과정에서 바닥에 던져놓은 셔츠를 밟아서 넘어질 뻔한 위기를 한 번 겪었다.

-가면 안 돼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해.”

겨우 중심을 잡은 뒤에, 대충 대답하면서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고 나갔다. 바로 옆방이라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통화를 끊지 않은 상태로 문을 두드리자마자 열렸다.

“오는 줄 알았어?”

“휴대폰 너머에서 엄청 쿵쿵대는데 어떻게 몰라요.”

벗겨지기 직전이었던 슬리퍼를 벗어두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역시 지구 혼자 써서 그런지 깨끗했다. 아무도 누워 본 적 없는 새 침대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침구도, 착착 접혀서 가지런히 놓여있는 옷들도 익숙한 풍경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형.”

책상 앞에 앉아서 계속 노트북을 두드리던 지구가 뒤를 돌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지구의 뒤로 노트북 화면이 우연히 눈에 걸렸다. 영어로 가득한 페이지는 읽기에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폰트 크기도 작았다.

“저 투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갈 것 같아요.”

“어? 갑자기 왜?”

미국이라니. 투어의 마지막 종착지는 홍콩이었다. 거기서부터 미국이면 완전히 지구 반대편이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밴쿠버 국제공항까지 날아간 그 정도의 거리를 다시 한번 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작업 때문에요. 전에 협업하기로 한 가수랑 얘기가 됐어요.”

아, 그 지구가 작업해보고 싶다고 했던 사람. 회사끼리 얘기해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고 하더니, 얘기가 잘 풀린 모양이었다. 유명한 가수도 아니었는데 노래를 듣자마자 독특한 음색에 딱 꽂혔다고 했다. 작업하고 있던 곡에 딱 맞는 목소리라고 기뻐하던 게 떠올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소리 좋다고 했던 분?”

“네. 벌써 다 완성된 기분이에요.”

지구가 음악을 좋아해서 항상 작업에 목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럴 때면 좀 서운했다. 작업만 같이 하는 비즈니스 관계라지만 이렇게 흔쾌히 미국까지 갔다 온다는 게. 그동안 지구가 먼저 나서서 함께 작업한 가수들을 다 뒤져봐도 외국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목소리가 마음에 드나. 바쁜데 굳이 거기까지 갔다 올 정도로.

“바쁜데 네가 미국까지 가?”

“얘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지구는 노래를 정말 좋아했다. 만들고, 부르고. 살면서 노래 부르는 걸 크게 즐긴 적이 없어서 그게 참 신기했다. 지구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긴 한데, 6년을 활동했어도 음악을 잘 아는 건 아니라서 모든 걸 공감하긴 힘들었다. 같이 유닛 활동도 짧게 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노래가 부족해서 한 번 하고 그만뒀다. 지구는 춤도 어느 정도 잘 추는데 좀 민폐인가 싶어서 미안하기도 했고.

거의 모든 걸 함께 하지만 지구가 음악 작업을 할 때만큼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응원도 해주고, 완성된 걸 같이 듣기도 하지만 함께 한 건 아니니까. 내가 노래를 잘 불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종종 들긴 했다. 그럼 좀 더 같이 나눌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 하고.

“그래도 좀 쉬고 가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오는 게 좋으니까요. 투어 끝나고 또 금방 스케줄 생길 거고.”

정식으로 컴백을 안 하더라도 스케줄은 끊기지 않을 게 확실했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개인 스케줄도 익숙했다. 혼자서 예능에 출연한다거나, 아니면 화보 촬영을 한다거나. 데뷔 초에는 멤버들 없이 홀로 촬영장에 나가면 부담스러워서 입도 잘 안 떨어졌는데 이제는 그것도 익숙했다.

“콜라보 하면 좋은 곡 나오겠다.”

“형한테 제일 먼저 보낼게요.”

“그래.”

다른 멤버들도 다 각자 일이 있고, 나도 따로 하는 게 있을 때가 있으니까. 이런 일 하나하나에 질투하다 보면 끝이 없는데도 좀생이처럼 마음이 좀 그랬다. 저번 작업 때는 이렇게까지 질투 안 났는데. 이번에는 상대가 젊은 여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먼 미국까지 손수 가서 그런가.

어쨌든 같은 일이잖아, 일. 고개를 양쪽으로 젓는데 노트북 화면에 뜬 여자의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가 작업하러 간다던 그 가수였다.

‘예쁘게도 생겼네.’

금방 눈을 떼고 침대 위에 누웠다. 사진을 한 번 보고 나니까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타자를 치는 지구를 위아래로 한 번 쓱 훑었다. 어딘가 언짢은 시선이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지구랑 눈이 딱 마주쳤다. 살짝 놀라서 주춤하는 바람에 곱게 정리해놨던 침구가 다 망가졌지만, 지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으면서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조금 있다가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래요?”

“갑자기?”

“형 지금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여서요.”

표정에서 티가 났나 보다. 닫힌 노트북 화면 안의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이 궁금했지만, 그냥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가자.”

“신경 쓰여요?”

내 기분은 또 귀신같이 안다. 뻐근한 허리 통증을 무시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딱 작업만 하고 바로 올 거니까 걱정 마요.”

나란히 방을 나서면서, 안심시켜주려는지 지구가 한마디 했다. 네가 작업만 하고 바로 올 건 알지. 그냥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런 건데. 속으로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좋아질 것 같지는 않지만.

* * *

문제는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있는 홍콩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보다 조금 전. 홍콩에 막 도착한 4월 5일, 콘서트를 앞두고 물리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였다. 너무 무리했는지 가만히 있어도 힘들 정도로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밤에 자려다 말고 같은 호텔에 머무는 물리치료사를 찾아갔다.

13번의 콘서트 중 12개를 끝낸 직후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공연 하나를 끝낼 때마다 밤에 잠을 자기가 힘들 정도였다. 회사에서도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중간에 해외 투어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일모레 마지막 홍콩 콘서트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길게 치료를 받기로 했다.

“어느 정도에요?”

“참을 만하긴 한데, 자려고 하는데 좀 아파서…… 아!”

얌전히 엎드려서 증상에 대해 설명하는데, 언질도 없이 갑자기 허리를 누르는 손길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숨을 한 번 집어삼키고 고개를 돌려 물리치료사를 쳐다봤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잠깐 좀 볼게요.”

투어 내내 함께했던 물리치료사는 누구보다 우리 상태를 잘 알았다. 바로 저번 콘서트도 신경 써서 관리해준 덕분에 어찌어찌 잘 넘길 수 있었으니까. 이것저것 물어보고, 한참을 몸 상태를 확인하던 물리치료사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 콘서트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평소처럼 찜질팩을 놔줄 줄 알았는데 마치 사형선고 같은 말이 뚝 떨어졌다. 제발 살살 좀 하라고 잔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빠지라는 말이었다.

“항상 적당히를 모르고 너무 무리하니까 몸이 금방 낡는 거예요.”

“무리 안 했어요…… 공연 때마다 일부러 더 힘 빼고 하는데.”

“평소 스타일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무대가 중요해요? 허리 부상은 흔한데 이렇게까지 티 안 내고 참는 사람은 처음 보네.”

애써 변명을 해보는데 물리치료사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그러더니 의자에 앉았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많이 심한 건 아닌데 혹시 모르니까 빠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 길로 바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연락을 받고 놀란 매니저 형이 멤버들을 한곳에 모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커튼까지 치고, 심각한 목소리로 문제를 알렸다.

“의료팀 쪽에서 내일모레 공연에 하현이를 빼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네?”

자려다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온 듯, 잠옷 차림의 준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다른 멤버들 반응도 썩 다르지 않았다. 지구만 말없이 소파에 기대 있었다.

“빠져요? 그렇게 심해요?”

“아예 못 설 정도는 아닌데 나중 생각해서 빠지는 게 나을 거 같대. 괜히 무리하는 거보다 빠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해서.”

다섯 명 중의 한 명이 빠지는 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동선도, 파트도 빈다. 그리고 독무대도 있는데. 이미 짜놓은 퍼포먼스도 망가질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았다. 매니저 형도 말하는 표정이 곤란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까지만 하고 쉴게요.”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우리 그룹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콘서트고, 나는 거기 멤버고. 나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공연 이틀 전에 다짜고짜 불참 소식을 낼 수는 없었다. 회사 입장도 곤란해지고 말도 많이 나올 게 뻔했다.

“그래? 과격한 안무 몇 개 빼고 가면 공연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안 돼요.”

매니저 형이 여러 가지를 따져보는 듯 손가락을 접으면서 말을 잇는데, 어디선가 단호한 목소리가 날아와서 툭 잘라버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말없이 듣고 있던 지구가 입을 열었다.

“의료팀에서 빼라고 했다면서요. 그럼 빠져야죠.”

“완전히 빼라고 한 건 아니고, 그 편이 낫다고.”

“선택지가 두 개가 있으면 당연히 더 나은 쪽을 골라야죠.”

안 그래도 투어 내내 걱정 많이 해줬으니까, 저렇게 나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공연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매니저 형과 지구 사이에 끼어들어서 의견을 꺼냈다.

“이번 콘서트가 마지막이잖아. 한국 돌아가서 바로 쉬면 되고.”

“지금 상태가 그만큼 안 좋다는 거잖아요. 3시간짜리 콘서트 섰다가 어떻게 될 줄 알고요.”

“이미 공지도 다 나간 거고, 당장 내일모레잖아.”

“그렇다고 못 빠지는 건 아니잖아요.”

조용히 설득하면 금방 들어줄 줄 알았는데 지구가 생각보다 단호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도 다 일인데. 이틀 남기고 무대 구성을 뒤집는 것도 무리고. 이미 돈 주고 티켓을 예매한 홍콩 팬들한테 못할 짓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망친 공연이 몇 갠데. 데뷔 초에 콘서트 하다가 쓰러졌던 걸 시작으로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공연 망치지 말라고 욕도 많이 먹고…….

“형. 내가 괜히 이러는 것 같아요?”

“아예 안 올라가는 건.”

“형은 예전부터 그래요. 융통성 있게 물러설 때도 있어야 하는데 항상 꼭 하려고 해요. 이것저것 따져보고 그냥 형한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하면 안 돼요? 무리해서 돌아오는 게 뭐예요?”

“야, 그런 게 아니잖아. 일이니까 그렇잖아. 그냥 한 번 하고 끝내는 게 마음 편하니까.”

“마음 편하자고 몸을 망치면 어떡해요.”

걱정돼서 하는 말인 건 알지만 나 하나 때문에 공연을 망치는 건 싫었다. 괜한 얘기가 나오는 것도 너무 싫어서. 나만 참으면 되는 건데. 몇 주를 더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3시간짜리 무대 하나인데. 이미 두 달이 넘게 투어를 했는데 무대 하나 더 한다고 여기서 더 심하게 나빠질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게 맞았다. 이런 불참 소식 하나하나에 죽자 살자 달려드는 사람들한테, 그런 빌미를 아예 주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그래서 그냥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한 마디 꺼낼 때마다 지구가 칼같이 반대했다. 절대 물러날 것 같지 않은 기세라 결국 대화가 길어졌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말싸움에 가까웠다. 화가 나는 건 아닌데 서로 좋은 어투로 말이 안 나가니까 분위기가 나빠졌다.

“진짜 무리 안 하고 할게. 정 그러면 힘든 안무 몇 개 빼면 되잖아.”

“형이 그 허리로 동선을 다 따라올 수 있냐고요. 무리가 안 갈 리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할 수 있다니까?”

“생각이라는 걸 좀 해요.”

목소리를 높여 말을 내뱉다가 깜짝 놀랐다. 지구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듣는 게 처음이었다. 잔소리를 할 때도, 가끔 다툴 때조차도 일정한 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방금 지구가 한 말을 잠깐 생각하다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둘 다 너무 흥분한 것 같았다.

“일단 그만 얘기하자.”

지구랑 이렇게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상황을 끝내기로 했다. 일단 물러났다가 조금 가라앉히고 다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말을 하던 우리 둘이 입을 다물자 방이 조용해졌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게 보여서 먼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그냥 한 번 하고 끝내면 안 되는 건가. 걱정돼서 저렇게 말하는 건 알지만 정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정해진 무대에 서지 않았을 때 날아올 것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단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빨라진 호흡을 진정시킨 후에,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3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