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00화 (100/130)

12화

눈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눌러쓴 모자를 다시 살짝 올리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깔끔하게 입고 내려온 지구는 안경 하나를 쓴 게 전부였다. 훤히 드러난 얼굴로 내가 레브 메인보컬이라고 소리치는 듯한 모양새를 보니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얼굴 다 보여.”

저대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방으로 다시 들어와 옷장 문을 열었다. 입고 온 옷이랑 맞춰서 모자랑 목도리를 골라 나가자 지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평소에는 안 이러는 애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대놓고 어리광을 부리지.

“따뜻하게 하고 나가야지.”

“형도요.”

직접 모자도 씌워주고, 목도리도 둘러줬더니 지구가 답례라도 하듯이 내 패딩 지퍼를 더 위로 올려줬다. 나란히 마스크도 썼다. 겨울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집 밖을 나서는 그 순간에 딱 불어온 차가운 바람조차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둘 다 차도 없고 면허도 없어서 돌아다니는 건 두 발로 해야 했다. 어차피 근처만 돌아다닐 거니까 굳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일단 근사한 저녁을 고대하며 점심은 그냥 아파트 단지 바로 밖에 위치한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먹었다.

우리 아파트는 회사 건물과 굉장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편의시설이 발달한 만큼 유동인구가 적은 곳은 아니라서 조심해야 했다. 평일인 데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길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영화라도 한 편 볼래?”

“네.”

막상 나왔는데 할 일이 없을 때는 영화 보는 게 최고였다. 물론 그냥 들은 말이다. 영화라는 걸 제대로 보고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됐을 때는 연습하고,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정작 인생 살면서 몇 번 본 적은 없었다.

근처에 있는 영화관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달짝지근한 팝콘 냄새가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방학 기간이라 일찍부터 영화를 보러 나온 학생들로 영화관 안이 혼잡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상영 중인 영화를 살폈다.

“자리는 다 남아 있어요.”

지구는 로맨스 영화를 싫어했다. 코미디도 안 좋아하고, 액션은 더 싫어하고. 일단 지구가 선호하지 않는 장르를 싹 빼고 보면 네 개가 남는다. 스릴러, 공포 장르의 영화가 두 개, 3시간이 넘는 우주 배경 영화 하나, 따뜻한 색감의 지루해 보이는 애니메이션이 하나. 다 썩 재밌어 보이지 않았지만, 이 중에서 골라야 했다. 평소 취향을 고려해보면 우주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괜찮을 것 같은데. 두 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보다 먼저 지구가 고민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이거 볼래요?”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액션 영화였다. 표지부터 주인공이 특수 제작된 수트를 입고 날아다니고 있는 판타지 액션 영화.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형이 이런 장르 좋아하잖아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지루한 것보다는 화려한 CG와 격렬한 전투씬이 난무하는 영화를 더 선호하긴 했다. 그래야 보다 잠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잔잔한 영화를 못 보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걸 굳이 왜 봐. 이거 보자.”

“형도 이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같은 돈 내고 한 시간이나 더 보면 좋은 거 같아서 우주 영화를 추천했더니, 지구가 고개를 저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알면 이래서 문제였다. 연애 초기에는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면 열 개 중에 두 개는 믿었는데.

-Hello!

결국은 내가 졌다. 대신 지구 손에 커다란 팝콘 한 통을 안겨주고 들어오긴 했지만. 커다란 스크린에서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빌런을 바라보며 콜라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극장 안이 따뜻해서 얼음이 금방 녹았는지 벌써 밍밍했다.

“…….”

봐, 결국은 안 보게 되잖아. 화면 속 괴물의 얼굴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지구랑 딱 눈이 마주쳤다. 얘도 안 보네. 액션 영화는 웬만하면 잘 보는 편인데 오늘따라 재미가 없어서, 지구한테 기대 팝콘을 몇 개 집어먹었다. 역시나 볼 생각이 없었던 건지 지구는 그런 내 머리를 왼쪽 어깨로 자연스럽게 받아줬다. 결국은 둘 다 두 시간 정도 되는 영화를 통째로 날려 먹었다.

“어땠어?”

텅 빈 팝콘 통을 버리며 물었더니 지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본 게 있어야 대답을 하지. 얼마 마시지 않아서 다 남은 콜라를 버리는 지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저기…….”

우리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하는 게 시야에 바로 들어왔다. 좀 멀리 있긴 한데 얼굴을 인식하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긴가민가해 하는 것 같아서 바로 지구 손을 잡고 나왔다.

“사진 뜨겠지?”

“몇 장은 찍혔을걸요.”

지구가 아까 처리하지 못한 콜라 컵을 다른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곧장 영화관을 나와 멀리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데이트하는 거 곧 인터넷에 뜨겠네요.”

아무도 데이트인 줄 모르는데. 그냥 그룹 멤버끼리 기분 전환 겸 놀러 나온 줄 알겠지. 아무 관련도 없는 여자 연예인이랑은 아무렇게나 엮어대는데, 지구랑은 뭘 어떻게 하고 다녀도 친한 형 동생 얘기밖에 나올 일이 없었다. 편하고 좋은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SNS에 인증샷 정도 뜨겠지.”

“기사도 뜰걸요.”

하긴, 밖에 돌아다니다가 기사 뜬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인지도를 얻은 대신 자유를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많이 춥지도 않은데 마스크를 내릴 수 없어서 답답했다. 결국, 아쉬운 대로 목도리라도 풀어서 팔에 걸었다.

그러다 순간 눈에 PC방 간판이 걸렸다. 간판이 낡기도 했고, 지하에 있어서 사람이 많을 것 같지도 않았다. 멤버들이 다 같이 게임 얘기를 할 때 아무 흥미 없어 보이던 지구가 떠올라서 일단 발을 멈췄다. 나란히 발을 맞춰 걷고 있던 지구가 덩달아 멈춰 섰다.

“왜요?”

“PC방 갈래?”

지구가 게임을 하는 걸 한 번쯤 보고 싶긴 한데, 영 내키지 않는다고 하면 그냥 갈 생각이었다. PC방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지구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멤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은근히 흥미가 생겼나 싶을 정도로 빠른 수락이었다.

“현금 있어?”

“만 원 한 장 있을걸요.”

휴대폰를 케이스에서 빼낸 지구가 숨겨져 있던 만 원짜리를 꺼내 들었다. 통장에 수십억이 찍혀있는 애가 비상금이랍시고 저렇게 들고 다니는 건가 싶어 순간 웃음이 확 터질 뻔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나타난 PC방은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이게 도대체 몇백대야.

흡연구역과 최대한 떨어진 곳의 구석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이쪽 줄이 통째로 비어 있어서 안심하고 마스크도 벗었다. 잠깐 체험만 해보고 나갈 생각으로 오천 원씩 넣자 화면에 남은 시간이 떴다. 6:00.

“어떤 거 하려고요?”

“예준이 형 요즘 푹 빠진 거 있잖아.”

“그거 여기 말고 다른 회사 게임일걸요.”

유명한 게임 회사 홈페이지에서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려다가 무안해졌다. 결국, 카톡으로 예준에게 물어서 계정을 만들고, 게임을 실행하는 데만 20분이 걸리고 말았다.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했다. 대충 캐릭터를 생성하고 기본으로 주어지는 총을 장착했다. FPS 게임은 난생처음 해봐서 이것저것 다 어색했다. 물론 지구도 별다른 상황은 아니었는데, 침착하게 매뉴얼부터 정독하는 자세는 확실히 나랑 달랐다.

“뭐라는지 알겠어? 난 튜토리얼도 모르겠어.”

“그대로 따라 하면 돼요. 기본 키 설정은 여기서 보고요.”

열심히 읽어가면서 튜토리얼을 깨자마자 그냥 지구가 이끄는 대로 질질 따라가서 대전까지 참여했다. 어색하게 게임을 하는 지구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처음 하는 건데도 너무 능숙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움직임이 생각보다 더 수준급이었다.

한 판, 두 판. 노련하게 플레이하는 지구랑 다르게 나는 허둥대다가 다섯 번이 넘게 죽었다. 딱히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계속하게 되는 힘이 있었다. 그냥 캐릭터를 움직이고 맵을 돌아다니는 게 은근히 재미있었다.

[초보딱지ㅋㅋㅋㅋㅋㅋㅋㅋ 좀 꺼져 븅신들아]

[아직 5판도 안한건 심했다 ㅅㅂ]

[이걸 지금 시작한 새끼가잇네ㅋㅋㅋㅋ]

세 번째 판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팀에게 시비가 걸렸다. 6년간의 악플 세례로 단련된 멘탈은 저런 유치한 욕설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캐릭터를 이리저리 이동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데, 누군가 이쪽을 향해 총을 조준했다.

“쟤는 못 막아?”

“잠시만요. 뒤에서 쏴볼게요.”

침착한 컨트롤로 상대방 캐릭터 뒤로 이동한 지구가 그대로 쐈다. 정확히 들어간 공격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거로 칭찬을 해줬다. 초보 딱지를 보며 마구 비웃던 상대팀의 채팅은 멈춘 지 오래였다. 예준이 본다면 필시 팀원으로 매일 끼워 다닐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섯 판을 채우고 지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였다. 재미가 없나, 생각하는 순간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떨어졌다.

“형, 병원 가요.”

* * *

“끝났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물리치료를 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당연히 하루 빠질 예정이었다. 열심히 치료받기로 한 건 사실이지만 설마 데이트하는 날에도 병원을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게임 재미없었어?”

물리치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복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지구에게 가서 물었다. 상대 캐릭터 열심히 쏘아 대길래 재미있는 줄 알았는데. 너무 칼같이 일어나서 가자고 하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요. 형은요, 재밌었어요?”

“그럭저럭 괜찮던데. 인기 많은 이유는 알겠어.”

“으음.”

지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병원비를 결제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PC방을 나온 시점부터 데이트는 끝났고, 결국 저녁은 그냥 시켜 먹기로 합의를 봤다. 어영부영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갔지만, 영화도 봤고, 게임도 했으니까. 지구랑 야외에서 뭔가 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안까지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지구가 걷는 게 느려졌다. 자꾸만 중간에 멈춰 섰다가, 다시 한 발자국 움직였다가 했다.

“어디 아파?”

“아니요.”

금방 대답하는 목소리가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더 묻지 않고 그냥 같이 띄엄띄엄 발을 움직였다. 일정한 속도로 규칙적으로 발을 떼는 게 아니라, 순간 지구의 발이랑 엇갈려서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괜찮아요?”

허리로 다가오던 손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위로 올라갔다. 목덜미로 다가왔던 숨도 갑자기 멀어졌다. 어쩌다 어정쩡하게 어깨를 붙잡은 손 위로 한숨이 흩어졌다. 어쨌거나 덕분에 넘어지지 않은 몸을 똑바로 세워 균형을 잡았다.

“아까부터 짜증 나게.”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구가 저렇게 직설적으로 감정 표현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더니 놀랄 틈도 없이 갑자기 주차장을 향해 고개를 돌려 손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마치 팬들에게 사진을 찍으라는 듯 팬 서비스를 해주는 것 같은 포즈였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다는 사실이 겨우 이곳이 사인회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너 뭐 해?”

어이가 없어서 물었더니 지구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언제 천진난만한 포즈를 취했냐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사진 마음껏 찍으라고요.”

“…….”

그 말에 며칠 전부터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 주차된 차로 눈이 돌아갔다. 터치하지 않으니까 이제 그냥 대놓고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사생활이 그렇게 궁금한가.

지구는 유독 이런 것에 예민한 편이었다. 졸고 있다가도 누군가 쳐다보면 귀신같이 시선을 느끼고, 멤버 중 누군가가 조공 받은 향수를 바꿀 때마다 바로 눈치를 챘다. 하지만 그렇다고 느낀 걸 모두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선이 넘는 행동이 아니면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숙소 앞에서 사진을 찍어 팔기 위해 기다리던 파파라치들이 가득할 때도 지구가 저렇게 반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득도라도 한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었다.

‘빌미를 주면 더 물어뜯는 거예요. 어차피 내쫓아도 계속 오는데. 저 사람 중에 진짜 기자도 있고, 기자한테 사진 파는 사람도 있는 거 알잖아요. 안 좋은 기사만 나요.’

분명 그랬는데. 티는 안내도 스트레스 진짜 많이 받았구나.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려고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지구가 입을 열었다.

“어련히 알아서 가겠지 싶었는데.”

지구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던 손이 무안해졌다. 뒤돌아서 계단 세 칸을 한 번에 훌쩍 내려간 지구가 차 쪽으로 다가갔다. 예준이 파파라치들에게 제발 집 가서 잠 좀 자라며 한소리 할 때도 끝까지 입을 닫고 있던 게 지구였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충돌은 피하고, 이해를 위해 노력해보자. 이게 지구의 인생 모토였다. 아마 지구가 선생님이었다면 반 급훈은 ‘둥글게 살자’였을 게 분명했다. 그런 앤데.

그런데 지구가 잘 가다가 방향을 틀었다. 기자 차는 저건데. 검은색 중형 승용차를 그냥 지나친 지구가 아직 주차하지 않은, 단지 안을 지나가고 있던 소형차를 향해 걸어가더니 그대로 멈춰 섰다.

“저기요.”

길고 예쁜 손가락이 차 창문을 두드렸다. 톡톡.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선팅이 짙게 되어있지 않은 차는 내부가 훤히 보였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바라봤다.

“사진은 많이 찍으셨어요?”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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