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94화 (94/130)

6화

딱 세 시간만 자려고 했던 게 그다음 날까지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시계를 보니 꼬박 열두 시간을 잤다. 다행히도 몸이 개운해져서 감기약이 효과가 있었나, 생각하며 따뜻한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알림으로 깜빡이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구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있었다.

[감기걸린사람..]

[형ㅠ 형도요?]

[나돈데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봐도 감기 걸린 사람처럼 기운 없이 보낸 휘영의 카톡을 시작으로, 긍정의 대답을 하는 준과 화가 잔뜩 난 예준의 답장이 차례로 있었다.

[나머지 둘 안 보는 거 보니까 감기 걸려서 자는 거 빼박이네요]

[박하현은 그렇다 쳐도 온지구는 멀쩡하게 살아서 작업하러 갔을지도]

[아.. 인정인정]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휴식기에 생활 패턴도 제일 규칙적인 지구는 크게 아파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감기에 걸리는 게 전부일 정도니까 멤버들이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뭘 그렇게 봐요…….”

그 밑으로도 쭉 이어지는 카톡을 마저 읽어보려는데, 지구가 깼는지 팔을 뻗어 내 팔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감기 걸렸나 봐.”

“다들 고기 먹을 때까지는 팔팔하더니.”

무슨 짜기라도 한 것처럼 멀쩡하다가 다음날 다 같이 감기라니. 보고 있던 휴대폰을 넘기자, 카톡을 확인하는 듯 한참 화면을 위로 내려 보던 지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픈 사람들 같지가 않은데.”

나랑 지구가 나란히 누워서 낮잠 아닌 낮잠을 자는 동안, 나머지 세 멤버가 뜨겁게 달궈놓은 카톡방에는 사진이 수십 장이나 와있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준의 셀카부터,

“우리도 근황 보고해줘야겠네.”

평소 셀카를 자주 찍는 편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킬이 늘었다. 물론 멤버들뿐인 단톡방에 보낼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을 이유는 전혀 없었으므로 대충 휴대폰을 위로 들어 한 장을 찍어 보냈다.

[워; 저 각도에서 살아남기]

[방금 일어난 거 티나]

마침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답장들이 빠르게 날아왔고, 몸을 일으켜 답장을 보내는 동안 지구가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욕실을 쓰고 나오자마자 젖은 머리를 털며 침대에 앉아있던 지구가 말을 건넸다.

“방금 매니저 형한테 문자 했어요. 집 주변에 누가 있는 것 같다고.”

어차피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는 게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고, 일반인인 사생이나 기자에게 쉽게 손을 댈 수도 없으니까. 해결되는 건 없겠지만 일단 만약을 위해 미리 알려두는 게 좋긴 했다.

“매니저 형이 답장으로 욕해요.”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커지면 큰일 나잖아.”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쭉 그만두지 않고 일하고 있는 매니저 형도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스케줄 관리만 해도 힘들 텐데 사소한 거 하나하나 신경 써주고. 처벌을 해도 해도 계속 새로 생기는 사생에게 엄한 얼굴로 다그치던 매니저 형이 떠올라서 새삼 또 고마웠다.

“재계약 관련 이야기도 해야 할 텐데.”

“빨리 얘기할수록 생각할 시간도 많아지잖아요. 멤버들한테 얘기해볼게요.”

단체 카톡방에 들어가 대화 기록을 읽던 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5시간 전에 보낸 거 보니까 다들 나아서 팔팔한 것 같아요.

[지금 시간 있는 사람]

카톡이 전송됐지만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야 멤버들이 하나둘씩 답장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형 저 어머니랑 있어요~~ㅠㅠ]

[친구들 만나러옴]

[나도 부모님이랑 있는데]

“오늘은 그른 것 같아요.”

확실히 새해이다 보니 다들 사람들 만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다들 감기 때문에 1월 1일에 집에만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새해 첫날을 정말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어제 한 일이라고는 일주일 전부터 냉장고에 있던 케이크 먹기, 감기약 먹기 그리고 자기가 전부였다. 하다못해 노래 한 곡도 못 들었네.

[야 이따 저녁에 올 거지?? 8시쯤]

그때 마침 형에게 문자가 날아왔다. 저녁?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오늘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던 게 떠올랐다.

“지구야, 오늘 어디 갈 거야?”

“아니요. 그냥 집에 계속 있으려고요.”

부모님은 해외에 계시고, 현직 아이돌인 형은 때마침 긴 해외 투어 중이었다. 일정이 안 맞아서 이번 연말 시상식에 전부 참여하지 못한 노블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작업은?”

“고민 중이에요. 가서 손을 좀 더 볼까…….”

새해부터 틀어박혀서 작업이라니. 하기야 크리스마스에 녹음했던 그 곡을 제외하고도 손보고 있는 곡이 많으니까 바쁠 만도 했다.

“했는데, 얼마 만에 푹 쉬는 건데 형 두고 어떻게 작업실을 가요. 오늘은 안 갈래요.”

오늘은 잠이나 푹 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베개에 얼굴을 푹 묻은 상태로 지구가 말했다. 웃느라 살짝 접힌 눈과 마주치자마자 문자 답장을 보내려던 손가락을 틀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연결음이 끊겼고, 형보다 먼저 선수를 쳐서 물었다.

“형, 지구도 같이 가도 돼?”

-웬일로?

“혼자 남으면 심심할 거 같아서.”

-잠깐만. 예진이한테 물어보고….

형수님에게 물어보겠다는 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밝은 형수님의 목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네, 모셔오세요! 안 그래도 반찬을 너무 많이 해서 남아돌았는데.

그렇게 저녁 식사 자리에 지구까지 합류하게 됐다.

깔끔하게 챙겨 입고 7시쯤 집을 나서서, 미리 불러둔 택시를 타고 형의 집 앞에 내렸을 때는 거의 8시였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는 단지가 넓고 깨끗했고, 저 멀리 형과 형수님이 다니는 회사의 본사 건물이 시야에 바로 들어왔다. 부부가 같은 회사에 다니니까 집 고를 때 참 편했겠구나 싶었다.

“왔냐?”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을 열어준 형의 얼굴이 막 퇴근한 사람답게 초췌했다. 어제 하루 종일 푹 쉬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피곤한 얼굴로 우리를 식탁 앞까지 안내한 형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러더니 세뇌된 사람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식탁 위에 수저를 놓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찌개만 끓이면 돼요.”

변함없이 밝은 형수님이 국자를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같이 퇴근했을 텐데 왜 형만 상태가 안 좋지.

“오늘 부장한테 까여서 그래요.”

궁금해하는 게 표정으로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냄비를 들고 오며 형수님이 이유를 말해줬다. 형은 말도 하지 말라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얼른 드세요. 맛을 보긴 했는데 맛있을지 모르겠네.”

“감사합니다.”

퇴근하자마자 손님맞이를 하는 게 썩 신나는 일은 아닐 텐데, 형수님은 다행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지구가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진짜 맛있어요.”

“그래요?”

지구가 평소처럼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이것저것 칭찬을 했고, 형수님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형은 파워풀하게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레브한테 밥해줄 수 있는 인생을 살게 될 줄은…….”

초반에는 팬 소리만 나와도 어쩔 줄 몰라 하던 형수님은 이제 다 적응이 됐는지, 가끔 이렇게 식사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도 하곤 했다.

“넌 남편 앞에 두고 그런 말이 나오냐?”

“좋아하는 아이돌이랑 남편이 어떻게 같냐.”

평소처럼 시작된 형과 형수님의 가벼운 말다툼은 5분 만에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다투다가도 끝에는 꼭 애정 표현하는 거. 3년이 지났는데도 결혼할 때 하고 변한 게 없어서 웃음이 났다.

식사가 끝나고, 내일이 주말이니 술을 꼭 마셔야겠다며 형이 치킨을 시켰다. 형이 술을 고주망태로 마실 때마다 코를 때려주고 싶다던 형수님도 오늘은 반대하지 않았다. 맥주뿐만 아니라 소주까지 꺼내온 형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소맥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마실 사람은 형밖에 없는데 왜 잔을 세 개나 들고 온 거야.

“나는 이 친구 참 좋아.”

형이 지구의 어깨에 팔을 툭 얹었다. 과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행위였지만 지구는 불편하지 않은지 웃었다.

“근데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술 못하는 거.”

“하하…….”

형이 지구의 등을 토닥이며 남은 손으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번 마셨다고 벌써 바닥이 보이는 잔을 힐끔 보며 형이 말을 이었다.

“근데 너네는 다 못 마시더라.”

같은 그룹이 되고 예준과 휘영, 지구까지 전부 다 술에 취약한 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첫 송년회 날이었다. 심지어 쾌활한 성격 탓에 왠지 좀 마실 것 같던 준마저 반병이 최대라는 걸 알게 된 이후, 우리끼리라도 술자리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었다. 그 누구보다 알코올을 사랑하는 형은 우리 멤버들과 만날 때마다 이런 사실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우리 원래 알코올 쓰레기 그룹이야.”

“그나마 넌 내 동생이라 좀 마시는 거야.”

혼자만 계속 마시는 게 좀 안타까워서 가득 담겨있는 잔 하나를 들어 마셨다.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생기니 신이 났는지 형이 맥주를 한 캔 더 땄다.

“예진아, 한 캔만 더 먹으면 안 돼?”

……토할 것 같다.

한 잔, 두 잔 하다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너무 많이 마셨다. 자정을 넘긴 지가 오랜데, 그만 자리를 접고 일어날 생각은 안 하고 빈 캔을 흔드는 형에게 형수님이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현관에서 자고 싶으면 더 먹고.”

“……갑자기 머리 아픈 게 그만 마셔야겠다. 너네도 슬슬 가야지.”

놀라울 정도의 태세 전환을 보여주며, 나보다 배로 마셨는데도 어지럽지 않은지 형은 우리 겉옷까지 찾아 건넸다.

“택시 불러줄까?”

“아니요, 제가 불렀어요.”

휴대폰 만지는 것도 못 봤는데 대체 언제 부른 거지. 내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감은 지구가 형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형수님과 형의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와 1층에 서 있던 콜택시에 올라탔다.

막힘없이 나아가던 택시는 30분도 안 돼서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 사람이 없는 시간이라 여기서 내려도 될 것 같았는데, 지구는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며 기사님께 추가 요구를 했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 주세요.”

“아, 네.”

멈춰 섰던 택시가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미터기가 살짝 올라갔다. 단지 안으로 쭉 들어가 A동, 우리 집 라인 앞에 택시가 서자마자 지구가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나 카드 안 들고 나왔어.”

“그럴 거 같아서 챙겼어요.”

오랜만에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택시에서 내리다가 살짝 휘청거렸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본 지구가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형 취한 것 같은데요.”

“별로 많이 안 취했어.”

“많이 취했는데 무슨.”

지구가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눈높이가 딱 맞는 걸 보니 허리를 살짝 숙인 것 같았다.

“얼른 들어가요, 여기서 잘 거예요?”

출입문 앞까지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한 지구가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잠깐 멈춰 섰다.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아침에 먹을 거 사갈까요? 형 일어나면 분명 속 쓰릴 텐데.”

팔을 들어 올린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서서 고민하는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날이 좀 춥다고, 그 잠깐 사이에 붉어진 뺨을 손으로 감싸 붙잡았다. 손바닥 사이에 끼인 얼굴은 아무리 봐도 이제 귀엽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정면에서 보다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서 보다가, 아래에서 내려다봤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잘난 얼굴을 구경하다 보니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취해서 흐려진 시야 때문인지 입술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아, 뽀뽀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아무리 밤이어도 밖에서 함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입술 다음에는 턱, 그 밑으로 목, 가슴…….

“어디 봐요, 지금.”

그냥 시선만 조금 내렸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어이없는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어 보인 지구가 얼굴을 붙잡힌 그 상태로 눈을 이리저리 굴려 주변을 살폈다.

“들어가서 해요, 일단 들어가서.”

양 뺨을 붙잡은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을 살짝 겹쳐서 떼어낸 지구가 빠르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부드럽게 열린 문 안쪽으로 나를 밀어 넣은 지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편의점 안 가?”

대답은 없었다. 5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는 금방 내려왔고, 올라탄 뒤에 문이 닫히고 나서야 지구가 입을 열었다.

“형이 제대로 본 거 맞네요.”

“뭐가?”

“기자예요.”

아파트 앞에 차 세워놨어요.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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