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크리스마스 날 이후로는 지구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다. 그 이후로 국내 음악 시상식만 다닥다닥 붙어서 세 개나 있었고, 중간에 끼인 해외 시상식 때문에 출국까지 했으니까. 거의 하루 종일 카메라에 찍히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밤에도 피곤해서 손만 잡고 자기 바빴다.
오늘은 드디어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이면 새해였고, 데뷔 6주년만 챙기면 그다음 활동까지는 큰 스케줄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몸 관리 좀 하겠구나 싶어 숨통이 확 트였다. 어제 눈이 내려서인지 온통 하얗게 변한 거리도 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눈 따가워.”
창문 밖을 내다보며 길 구경을 하는데, 잔뜩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준이 달리는 차 안에서 용케 흘리지 않고 눈에 안약을 넣고 있었다. 3일 전부터 하루에 두 시간도 자지 못했으니 눈이 뻑뻑한 것도 당연했다.
“오늘 무대만 하면 끝이니까 열심히 하자.”
준을 달래는 매니저 형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차는 부드럽게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유일한 스케줄은 매년 12월 31일에 있는 연말 무대였는데, 야외에서 진행되는 터라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레브 잠깐 대기해주세요.”
카메라 체크를 위해서 잠깐 대기하는 동안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평소보다 추워서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하얀 지구 뺨은 이미 날카로운 바람에 난도질당해서 빨갛게 변한 지 오래였다. 귀도 곧 터질 것처럼 빨개졌길래, 뒤로 슬쩍 다가가 패딩 안에 입고 있던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씌워 주었다.
“야, 이거 쓰고 해. 추워.”
“형.”
갑작스럽게 머리를 눌린 지구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형은 지금 패딩도 안 입었으면서.”
“너도 안 입었잖아. 패딩 입고 추면 불편해.”
“두꺼운 옷 입었으면 말을 안 해요. 얇게 입어놓고.”
결국, 나란히 패딩을 챙겨 입기로 합의를 본 뒤에 바로 드라이 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다. 몇천 번을 연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춤은 이제 노래만 흘러나오면 자동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고, 능숙하게 리허설을 끝냈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매니저 형에게 떠밀려 다시 차에 탔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중요한 자리가 있을 때마다 들르는 샵에 와 있었다. 얼굴을 지나가는 브러시가 간지러웠지만, 이제는 이것도 익숙해진지라, 오랜 시간을 가만히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인 방송은 7시부터였지만, 레드카펫 입장은 5시 시작이었다. 전 세계에 생중계로 나가는 만큼 항상 긴장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언제나 그렇듯 준비가 오래 걸렸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무난한 정장 스타일의 옷과 염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밝은 금발이 대조돼서 머리색이 더 화려하게 보였다.
“이거 코트는 왜 이렇게 길어요?”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디자인의 코트는 180cm가 넘는 준의 발목까지 덮을 정도로 컸다.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의문을 제시하는 준의 뒤로 셔츠에 달린 이상한 모양의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는 휘영이 눈에 들어왔다. 의상은 복불복이었기 때문에 언제 누가 깜짝 놀랄 만큼 획기적인 디자인의 옷을 입게 될지는 미지수였고, 다행히 오늘 내 의상은 가장 멀쩡했다.
“오늘 진짜 제일 멋있다. 사진 잘 나올 거 같은데.”
매니저 형이 언제나처럼 멤버 전원을 확인하며 칭찬을 마구 쏟아냈다. 그리고는 세상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한 운전으로 정확한 타이밍에 레드카펫 앞에 도착했다.
잠시 대기하다가 밖에서 관계자가 보내는 신호에 맞춰 차문을 열었다. 붉은색 카펫을 다 같이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 포토존 앞에 서자마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터졌다.
날씨가 추워서 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기사 사진이 잘못 나오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까이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신경 써서 표정을 관리하고 어깨를 폈다.
“레브가 이렇게 올해에도 또 귀한 발걸음을 해줬는데, 오늘 준비한 무대 스포 하나만 해주세요.”
“어…….”
마이크를 건네받은 예준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곧 준비한 무대 퍼포먼스를 잠깐 보여줬다. 바닥에 앉아가면서까지 열정적인 스포를 하는 예준을 보며 뒤에서 준이 저 형 오늘 오버한다며 웃었다.
바로 대기실로 이동해서 무대 진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출연 가수들이 모두 모이는 오프닝 시간이 되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 날씨에 야외에서 공연하는데도 많이 오셨구나. 익숙한 응원봉들을 보이니까 몸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을 맡게 된 전우진입니다.”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예능인이 나와서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오프닝이 끝나자마자 가벼운 분위기에서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됐다. 큰 자리인 만큼 한 해를 대표한 곡들을 만든 가수들이 대규모로 출연했고, 데뷔 20년 차부터 신인 그룹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따뜻한 대기실로 돌아와 모니터로 무대를 보다가, 우리 차례가 와서 급히 무대 뒤쪽으로 가서 섰다. 2분이 넘는 인트로를 시작으로 세 곡이나 연속으로 무대를 해야 했기에 다 같이 급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오, 추워.”
구두 신은 발목을 돌려가며 스트레칭을 하던 예준이 몸을 떨었다. 의상이 워낙 얇다 보니 바람을 전혀 막을 수가 없었다. 아까 매니저 형이 건네준 핫팩을 왼손, 오른손 번갈아 가며 쥐면서 대기하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오늘 왜 이렇게 춥냐?”
“영하 12도래요.”
“사람이 살 수 있는 온도야?”
“살 수는 있는데 이렇게 입고 춤출 온도는 아닌 것 같네요.”
연달아서 세 곡을 하고 내려와야 하는 상황에서, 야외무대에 한파까지 겹치는 것만큼 최악인 경우는 없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작게나마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옆에서는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땀 흘리면 금방 더워지겠지.”
올라갈 시간이 다 돼서 매니저 형에게 쓰던 핫팩을 건넸다. 그나마 손으로 전해지던 온기가 사라지자마자 더 큰 추위가 닥쳤다. 큰 버팀목 하나를 잃은 기분이었지만 야외인 만큼 팬들도 이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보고 있을 텐데, 대충하고 내려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관계자가 3분 남았다는 신호를 보냈고, 다들 각자의 위치로 빠르게 이동했다.
“지금 올라갈게요!”
이 무대를 위해 따로 준비한 퍼포먼스가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먼저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올라오자마자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왔다. 그동안 추운 날씨에도 무대 의상을 입고 이동한 적은 많았지만, 이런 한파에 야외에서 무대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따뜻한 공연장이 얼마나 좋은 환경이었는지 절절하게 느끼며 빠르게 무대에 누워 자리를 잡았다. 순간 등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놀라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며 반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AR을 깔아놓긴 했지만, 너무 추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봐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인트로에 나머지 세 곡을 합쳐서 거의 15분 동안 추운 만큼 온 힘을 다해 뛰어다녔더니 어느샌가 느껴지는 추위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15시간 같았던 15분이 지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대기실로 뛰어가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마셨다.
일 년의 마지막 날에 즐기는 느낌으로 하는 축제에 가까운 무대라 끝까지 분위기가 가볍고 좋았다. 10시가 다 돼서 엔딩까지 끝난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고, 급하게 메이크업을 지우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연말 파티 있는 거 알지. 사장님이 음식점 빌려놓으셨대.”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회사에 있는 아티스트라고 해봤자 몇 팀 안 됐기 때문에, 예전부터 연말 파티는 거의 우리의 그해 기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 정도로 기획되고는 했다.
이런 날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사장님이 예약한 곳은 꽤 비싸 보이는 고깃집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준과 준이 한우를 잔뜩 주문했기 때문에 입 한 번 벙긋할 필요도 없이 편하게 겉옷을 벗을 수 있었다.
밑반찬이 먼저 깔리고, 다음으로 술병들이 우르르 테이블로 도착했다. 순진한 얼굴로 소주병을 딴 뒤, 멤버들에게 술잔을 싹 돌린 지구가 다시 얌전히 바른 자세로 앉았다.
“올 한 해 수고 많았습니다!”
근 한 달간 본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사장님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커다란 목소리를 시작으로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곧이어 젓가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망설이다가 쭉 들이켠 소주는 썼다. 취하면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주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마시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올해도 수고했어.”
처음 계약했을 때 중소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던 ATM 엔터테인먼트는 6년 사이에 엄청나게 커졌다. 연이은 활동 성공으로 앨범 판매, 콘서트, CF 촬영까지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나왔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소속사에 나타나고 있었다. 건물을 확장하고, 업무가 세분되면서 직원들도 몇 배로 늘어났다.
“여기 24시간이니까 마음 놓고 먹어. 늦게까지 달려야지.”
물론 그 변화는 사장님에게서도 나타났다.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의 가격이 몇십 배로 치솟고, 3천만 원짜리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차고 다니고, 얼마 전에는 서울 한복판에 2층짜리 단독 주택을 새로 샀다며 자랑도 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젊어진 얼굴로 웃는 사장님을 보니, 우리보다 더 열심히 관리받는다고 직원들 사이에서 돌던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다 익기만 하면 족족 입으로 가져가는 준과 예준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구워도 고기가 부족했다. 올리자마자 익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집게를 움직이는데, 잔에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사장님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조만간 재계약 건으로 얘기도 해야지.”
“네?”
재계약?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놀라서 쳐다보는데, 뭘 놀라냐는 표정으로 사장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네 1년만 더 있으면 7년이잖아.”
아. 우리 계약 기간이 7년이었지. 다음 주가 데뷔 6주년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재계약 건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 했다. 너무 바쁘게 달려온 탓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쭉 나아간다고만 생각했는데.
당황한 시선을 나머지 멤버들에게로 돌려봤는데, 준을 빼고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들 알고 있었나 보네. 하기야 계약만료까지 1년밖에 안 남았는데, 슬슬 재계약에 대해 생각을 할 때였다.
“너네 지금 정상이잖아. 앞으로 쭉 더 달려야지.”
앞으로 더 달려야 한다고.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사장님은 잔뜩 신난 얼굴로 소주병을 하나 더 땄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어있던 잔에 투명한 술이 차올랐다. 두 세잔에 취할 정도로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라, 날이 날인만큼 분위기에 맞추기로 했다. 한입에 쓰디쓴 술을 털어 넣고 급히 고기를 한 점 집어먹는데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너 술 마셨어?”
사이다 마시라니까. 한 잔 마셔놓고 벌써 취했는지 내 어깨에 기댄 지구가 고개를 꾸벅꾸벅 움직이고 있었다. 더운 공기 때문인지 빨갛게 익어가는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가, 천천히 놓은 뒤에 다시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편하게 기댈 수 있게 했다.
“야, 하현아 불편하게 뭐 하냐! 걔 그냥 저기 눕혀놔.”
“아니에요. 별로 안 불편해요.”
옆옆 테이블에서 로드 매니저 형과 함께 운전 때문에 술은 마시지 못하고, 고기만 열심히 구워 먹던 매니저 형이 소리쳤다. 뒤에 눕혀 놓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냥 그 자세 그대로 오른쪽 팔만 움직여서 고기를 집어먹었다.
“자정이다, 1월 1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자정이 넘어서 1월 1일이 됐다.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인데도, 어깨에 기댄 지구의 숨소리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일정했다. 원래 예민한 편이라 방문만 열려도 금방 깨는 앤데, 술만 들어갔다 하면 이렇게 곤히 잠들곤 했다.
그렇게 계속 어깨를 빌려준 탓에,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어서 자리를 정리할 때쯤에는 굳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손으로 몇 번 주무르는 사이, 지구가 한 번 술에 취해서 잠들면 잘 깨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멤버들은 잠든 애를 짐짝처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넓은 차 안으로 대충 던져진 지구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는 사이에 출발한 차는 금방 아파트에 도착했다.
“걔 이리 줘봐.”
집까지 데려다주려는지, 매니저 형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차 문을 열려고 하길래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제가 데리고 올라갈게요. 같은 라인 사니까.”
“너 얘 들 수 있어?”
“네.”
차에서 내려 허리를 살짝 숙이자, 예준이 영 못 미더운 얼굴로 지구를 들어 내 등 위에 올려줬다. 6년을 빡세게 춤을 추다 보니 웬만한 헬스 뺨치는 운동량으로 체력만 좋아졌다. 나보다 6cm나 큰 데다가 몸까지 좋은 지구를 업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엘리베이터까지 갈 만은 할 것 같았다.
“우리가 들어다 줄까?”
“됐어.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는데.”
“키도 작은 게. 질질 끌리겠다. 질질질질.”
“형은 취한 거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좀 해요.”
영 불안정해 보였는지 같이 가주겠다는 멤버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아주 천천히 발을 옮겨 아파트 출입문까지 걸어갔다. 정신도 못차리는 애를 침대 위에 던져두고 나오는 것보다는 우리 집에 데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단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잠깐 멈췄다.
“…….”
6년 동안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다사다난한 일들을 참 많이도 겪었다. 공항에서 팬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넘어져서 발목을 접질린 적도 있었고, 재작년에는 숙소까지 들어와서 속옷을 들고 가려다 잡힌 사생도 있었다. 그러니까 절로 그런 것들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령 누군가 뒤에서 따라온다거나, 몰래 사진을 찍고 있다거나.
조금 전 틀림없이 시선을 느꼈다. 급히 뒤를 돌아봤을 때는 우리를 내려주고 밖으로 나가는 매니저 형의 차를 제외하고, 새벽 세 시의 아파트단지 내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