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84화 (84/130)

38화

“저 휴대폰 잠시만 봐도 될까요?”

“아, 맞아. 지금 청춘은 음악을 타고 첫 화 방송하는 시간인데. 그거 보세요?”

“아니요. 다른 방송이요.”

한창 바쁘게 이뤄지던 작업을 멈춘 지구가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 DMB를 켰다. 이 곡 하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장난 아니게 많아서 숙소에도 잘 못 갔지만, 하현의 스케줄만은 어떻게든 외우고 있었다.

[연예이슈] 대세X대세의 만남… 비주얼 더블 MC

방송 시작도 전부터 올라오는 수많은 기사의 제목을 대충 훑다가 지구가 조금 거칠게 화면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시작하자마자 화면에 담기는 익숙한 얼굴에 지구가 저절로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않고 마구 내비쳤다. 바로 옆에 선 청순한 여배우는 안중에도 없이 하현에게만 똑바로 시선을 맞춘 지구가 집중해서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수들의 무대가 나올 때는 잠깐씩 다른 일을 하다가도 MC가 나오는 타이밍만 되면 지구는 귀신같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작 20분쯤 봤을까, 드디어 옆에 선 주현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둘이 톡톡 튀게 대사를 주고받고 훈훈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지구는 옆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물 더 드릴까요?”

“아니요.”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남아있던 물을 전부 마신 지구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한두 번으로 끝날 것 같았던 행동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어느새 살짝 찌푸리고 있는 미간은 세상 누구보다 진지해 보였다.

단순한 일일 뿐인데도 하현이 여자 연예인과 함께 뭔가 하는 게 처음이라서인지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뭐했다. 지금까지는 쭉 그룹 단위로 활동해서 옆에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방송으로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생각보다 엄청 속 좁은 인간이라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단순히 형식적인 관계로 곡 작업만 하는 자신과 다르게 분명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것임에도 굉장히 친해 보이는 모습이라 더 그랬다. 지금도 이쪽은 어색해서 서로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있는데, 저쪽은 굉장히 화기애애해 보였다.

심기 불편한 얼굴로 휴대폰에서 시선을 못 떼는 지구가 내심 궁금했던 에이제가 슬쩍 몸을 뒤로 빼서 화면을 쳐다봤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 웃으면서 선배 그룹에게 질문을 하는 하현을 한 번 보고 다시 지구를 바라봤다.

같은 그룹 멤버 방송까지 챙겨보네.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끌어 올린 에이제가 아예 그 뒤에 자리 잡고 앉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관찰했다.

“아…….”

탄식까지 흘리며 입술을 살짝 깨무는 지구에 생각은 점점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진주현이 예쁘긴 한데 혹시 같은 멤버 질투하는 건가? 그럴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 오해를 살 법한 진지한 얼굴로 방송을 보던 지구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실패한 애교를 보자마자 또 표정이 싹 풀렸다.

조금 전까지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보고 있더니, 갑자기 또 살살 녹아내려서는 흐뭇하게 웃는 지구를 에이제는 진심으로 영문 모를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

지구는 살짝 손끝이 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탄식이었다. 숙소에 혼자 있는 상황이었다면 별의별 소리를 다 했을 텐데 바로 옆에 사람이 있는 탓에 지구는 하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만 꾹꾹 눌러 삼켰다.

형 왜 이렇게 귀여워요. 저 지금 앞에서 한 번만 다시 해주면 안 돼요? 다시 돌아간 말들이 밖으로 치고 올라오기 위해서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괜찮으세요……?”

“아, 네. 이제 작업해요.”

한 번 호흡을 고른 지구가 휴대폰 화면을 껐다. 본방송으로 챙겨보고 싶었는데 차라리 작업을 완벽하게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서 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거기는 당장 실물도 있으니까.

현실로 금방 복귀해서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간 지구는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불렀고 듣기 좋은 미성의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 노래랑 진짜 잘 어울리는 목소리인 것 같아요. 이 파트는 이걸로 갈게요.”

“네. 다음은요?”

“잠시만요. 무대 의상 한 번만 골라보고 다음 녹음 가도 될까요?”

몇 번 마우스를 움직이던 에이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물을 뒤로하고 휴대폰을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무대 의상이라고 보여준 옷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색이 다르고 디자인이 똑같거나, 색이 같고 디자인이 다르거나. 색색의 옷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넘기던 지구는 고민도 하지 않고 의견을 기각했다.

“저는 피처링이니까 심플한 거 입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피처링이라고는 해도 파트가 이렇게 많은데요?

“이건 듀엣 느낌이 강해서요. 그리고 굳이 옷을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각자 컨셉에만 맞춰서 따로 정해요.”

굉장히 단호하게 거절해서 끝내버리는 지구에 에이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요. 그럼.”

분명 지구가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린데도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스무 살짜리가 이렇게 딱딱해. 말투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배려심 넘치고 착하긴 한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철벽을 치는 것도 심할 정도로 높고 견고했다. 반듯하고 예쁘게 생긴 얼굴이 자상하게 웃으며 악보를 집어 들었다.

“그럼 다음 녹음…….”

순간 벨 소리로 돌려놓은 지구의 휴대폰에서 문자음 소리가 들렸다. 짧고 경쾌한 알림음에 지구가 눈빛으로 살짝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구야]

[숙소 언제쯤 와?]

[할 얘기 있어]

깔끔한 말투로 도착한 문자 세 통에 지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퀴 달린 푹신한 의자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할 얘기는 자신도 있었다.

“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머지 녹음은 내일 몰아서 할게요. 괜찮을까요?”

“예? 아, 네. 넉넉하니까.”

“안녕히 계세요.”

끝까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자마자 빠르게 작업실을 뛰쳐나가는 지구를 보며 에이제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애인 있나 본데?

* * *

‘청춘은 음악을 타고’의 첫 방송은 운 나쁘게도 내가 MC로 나온 음악방송과 동 시간대에 방송했다. 정확히 7시에 각자 다른 방송사에서 방송되는 두 프로그램 중 나는 망설임 없이 지구가 나오는 쪽을 택했다. 나중에 따로 찾아봐도 되고, 무엇보다 편집 없이 들어간 몇몇 장면들 때문에 별로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원래 같으면 서로 원하는 걸 보겠다며 TV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겠지만, 지금 숙소에는 나뿐이었다. 오랜만에 프리한 날인데 다 같이 놀러 가자는 멤버들의 제안을 잠이나 더 자겠다며 거절한 탓이었다.

조용한 거실에서 TV를 켜자마자 화면에 지구가 잡혔다. 벌써 시작했네.

둘이 함께 작업하는 곡은 딱 내 취향이었다. 적당히 감성적이면서 몽환적인 멜로디. 음원으로 나오면 분명 인기가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새삼 우리 지구 목소리 좋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점점 무표정이 되어갔다.

“…….”

SNS를 볼 때도 느꼈지만 둘이 함께하는 작업 시간이 확실히 길긴 한 모양이었다. 거의 반나절을 붙어서 노래 구성을 짜는데 그게 계속 반복되니까 보기가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저기서 굳이 손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나?’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서 뜯어놓고 먹고 있던 과자 봉지를 대충 옆으로 밀어놨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속 좁아 보이지만 보고 싶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둘이 털털하게 친구처럼 있는 관계라면 모를까 저런 분위기는 더 묘하게 느껴졌다. 혼자서만 비즈니스 관계까지 질투하고 있는 꼴이 웃겨서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봤지만, 질투 나는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결국, TV를 중간에 꺼버리고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지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단순히 같이 작업을 하려고 만나는 관계인데 조금 거리를 두라고 말하면 진짜 치졸해 보일 것 같아서 그 얘기는 빼고 아메리카노에 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싫어하는 걸 왜 굳이 같이 마셔준 건지. 그 정도는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형.”

놀랍게도 답장 대신 지구가 30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작업실이 꽤 멀리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택시를 탔는지 손에는 아직 집어넣지 못한 카드가 들려있는 상태였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설마 내 문자를 받고 평소보다 훨씬 빨리 온 건가 싶어서 당황스러움을 한가득 담아 물었다.

“문자 봤어?”

“네. 형이 말할 거 있다면서요.”

숨을 몰아쉬며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소파 위에 올려놓은 지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칼 같은 바람에 에인 볼이 빨갰다. 줄곧 집안에만 있어서 따뜻하기 그지없는 손으로 익숙하게 양쪽 볼을 잡았다.

“야, 진짜 차갑다.”

새빨개진 귀도 양쪽 손으로 감싸고 차가운 온도를 마음껏 느끼고 있는데 지구가 손을 들어 내 손을 감싸 아래로 잡아 내렸다. 온도가 낮은 손과 깍지를 끼고 맞잡고 있으니 시원함이 확 몰려왔다.

“형 그래서 말할 게 뭔데요?”

“어 너 그 래퍼 분이랑 아메리카노 마시러 갔었잖아.”

“웬 아메리카노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문하는 지구에게 내가 본 SNS를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들은 지구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카페 간 적 없어요. 그럴 시간이 있었으면 형이랑 갔죠.”

“그래?”

“근데 형은 그 사람 SNS 글을 왜 찾아봤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놨다.

“네가 너무 잘해주는 거 같길래 걱정돼서 찾아봤어.”

“아…….”

“알겠으면 너무 많이 웃어주지 마. 손은 못 잡게 주머니에 꽂고 있고.”

결국, 속 좁은 사람이고 뭐고 다 내려놨다. 아까 ‘청춘은 음악을 타고’ 1화를 보고 난 뒤 어떤 기분이었는지까지 다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지구는 나름 거의 반년 넘게 연애한 사람이 별 같잖은 이유로 비즈니스 파트너한테 질투를 해대는데도 기분 좋은 듯 고개까지 살짝 젖혀가며 오랜만에 소리 내서 웃었다.

“형이 질투해줘서 기분 좋아요. 저만 치졸한 놈인 줄 알았는데.”

“어?”

“형도 음악방송에서 신나게 같이 MC 했잖아요.”

작업하러 가서 당연히 못 봤을 줄 알았는데 지구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 애교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요?”

놀리듯 물은 말에 괜히 넓은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작업 끝나면 연락 안 할게요.”

한참 소파 위에서 서로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토론을 하다가 지쳐서 나란히 뒤쪽 쿠션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소파는 넓은데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는 굉장히 좁았다. 먼저 약속을 하나 하겠다는 지구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생각을 조금 고치기로 했다.

“됐어. 그냥 같이 음악 작업하는 사람인데 다음에 또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작업하는 게 재밌긴 한데.”

“응.”

“전 이왕 할 거면 형이랑 하고 싶어요.”

“나랑 무슨.”

“듀엣곡을 하나 하는 거예요. 형이 부르고 싶은 곡 아무거나 불러주면 제가 거기 맞춰서 화음 넣고. 피아노 반주도 덧입히고.”

같이 노래를 하고 싶다는 건지, 아니면 키스를 하고 싶다는 건지 알 수 없게 자연스럽게 입을 맞춰왔다. 조심스럽게 입안을 헤집는 소심한 행동이 오늘따라 평소보다 속도가 빨랐다. 빨라진 키스를 열심히 따라갔을 때는 이미 입술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간 후였다.

목 부근에서 자꾸만 숨결이 느껴져서 간지러웠다. 밀어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지구가 하는 대로 따라갔다. 어느새 소파에 등이 닿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허리를 살짝 틀었지만 이미 지구가 위쪽에서 두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차단한 터라 그냥 움찔거리기만 하고 말았다.

“형, 있잖아요.”

허리를 살짝 움켜쥔 지구가 목덜미에서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 순간. 숙소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고작 여섯 숫자밖에 되지 않는 비밀번호 때문에 빛과 같은 속도로 지구에게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웬일로 거실에 있네요.”

나머지 두 형은 어디에 내팽개치고 왔는지 준이 빨개진 손에 바람을 불며 팔에 비닐봉지를 하나 끼우고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투명한 비닐 안에는 누가 봐도 음식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들 생각나서 먹다가 하나 포장해왔어요. 예준이 형이랑 휘영이 형은 자정까지 놀고 온다는데 전 이거 주려고 먼저 왔어요. 잘했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준을 향해 형이 된 도리로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식고, 결국 첫 시상식 날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 했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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