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82화 (82/130)

37화

우리의 컴백 날짜가 확정되자마자 비슷한 시기에 컴백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던 스페이스가 잠적했다. 자숙기간을 가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스폰 뛰는 아이돌 타이틀을 막 단 상태에서 바로 활동을 하는 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거라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TN의 발 빠른 대처였다.

“도망은 잘 치네.”

“그런 거 잠깐 돌다가 금방 잊어버리니까요. 그래도 빠진 팬 수 보면 타격은 제대로 받은 것 같던데.”

기사가 뜨고 스페이스 공식 카페의 회원 수가 많이 줄었다. 팬들로서는 연애설보다 훨씬 큰 타격이었을 테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스페이스 팬들과 치고받는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쪽 회원 수가 줄고 우리 쪽이 많이 늘었어.”

“왜요?”

“스페이스 탈덕하고 너네로 옮겨타는 사람들 많아서.”

매니저 형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핸들을 돌렸다. 차는 부드럽게 샵을 향해서 미끄러져 나갔다.

오늘은 뮤직비디오 촬영일이었다. 감독님이 촬영 컨셉 때문에 단체 흑발을 요구하셔서 이미 흑발인 나머지 멤버들을 제외하고 나만 따로 염색했다.

“와. 형 흑발도 잘 어울려요.”

“원래 머리 색이잖아.”

“되게 다른 사람 같다.”

염색이 끝나고 오랜만에 새카맣게 변한 머리로 거울 앞에 섰다. 학창시절 생각도 나고 기분이 묘해서 옆에서 떠드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지구가 자연스럽게 옆에 와서 앉았다.

“형 그 머리 진짜 오랜만에 봐요.”

“아, 학교 다닐 때 봤지?”

“네. 형 앞머리 잘못 잘랐을 때도 봤고.”

어색한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순식간에 떨어진 한 마디에 팔을 툭 내렸다. 앞머리, 기억났다. 예전에 연습실에서 춤 연습을 하다가 눈을 찌르는 앞머리가 답답하다고 한마디 하자마자 자기가 앞머리를 잘 자른다며 가위를 들고 찾아온 친구에게 얌전히 머리를 내줬다가 큰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생각날 정도로 쪽팔린 기억이었다. 앞머리는 빨리 자라지도 않는데 복도 지나갈 때마다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춤을 출 때 눈썹 한참 위로 닿는 감촉까지 끔찍했다.

“야, 그건 언제 봤어.”

“매주 조회 때마다 나왔잖아요.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는데.”

“아…….”

왜 하필 같은 학교여서.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좋은 모습만 남기고 다닌 건 아니었다. 딱히 잘 보이고 싶다거나 예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애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지구가 봤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자괴감까지 슬슬 밀려왔다.

더 착실하고 반듯하게 살걸. 그때 연습 때문에 한참 폐인처럼 학교 다녔던 것 같은데.

“전 그때 형 귀여웠어요.”

“야, 야 그만해.”

“나중에 휴식기에 한 번 더 그렇게 잘라볼래요?”

평소와 다르게 크게 터져 나오는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지구는 그렇게 촬영장에 갈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놀렸다. 보통 이럴 때는 신나서 말투가 얄미워질 만도 한데, 지구는 끝까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며 조곤조곤 얘기했다. 그만하라고 옆구리도 한 번 찔러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에 얼굴을 묻길래 그냥 손을 들어 끌어당겼다.

* * *

연말이 다 되어서 겨울 스페셜 앨범이 발매됐다. 타이틀곡은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강렬했는데 수록곡은 또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중 지구가 참여한 곡이 두 개였는데, 둘 다 듣고 있으면, 눈이 오는 골목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곡이었다. 지구는 살짝 손댔다가 뗀 정도밖에 한 게 없다고 했지만, 노래에 자기 음악 취향을 잔뜩 녹여놓은 상태였다.

이번 앨범은 상상 이상으로 대박이 났다. 타이틀곡이 중독성 있게 잘 나온 탓에 음원 순위도 쭉 1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앨범 판매량도 신기록을 찍었다. 데뷔하고 나서 단 한 번도 반응이 아쉬웠던 활동은 없었지만, 수많은 수치가 이번 활동이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했음을 증명했다. 하루에 수십 번씩 멤버들과 여러 음원 사이트들의 실시간 차트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번 활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케줄이 쏟아져 내렸지만 피곤할 새도 없었다. 시상식이 코앞이라 팬싸인회 횟수도 늘어났고, 미디어에 노출이 많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견 때문에 CF보다 TV 출연이 중심이 돼서 거의 하루 종일 방송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바이벌 ID 마지막 방송이 끝난 지 1년이 다 되었는데도, 지속되는 화제성에 꾸준히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 게 신인으로서는 감사할 뿐이라 여기저기 불러주시는 곳들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작곡은 어쩌다 시작하게 됐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조금 더 폭넓게 하고 싶었어요. 직접 만든 노래에는 제 감정이 녹아 있잖아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기자의 질문에 지구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 말이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괜히 어깨 위로 손을 올려 곧게 뻗은 목을 살짝 주물렀다. 말을 왜 이렇게 예쁘게 잘하지.

지구는 이번 활동으로 인지도를 확 올렸다. 컨셉 때문에 주 의상이 된 정장이 심각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동그란 눈에 메이크업을 해놓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고 여름부터 꾸준히 헬스를 하더니 이제 셔츠 너머로 보이는 몸이 훨씬 탄탄했다. 무엇보다 이마를 완전히 덮고 있던 앞머리를 반쯤 넘기니까 드러난 이마조차도 잘생겼다.

매니저 형이 말해주는 팬 반응을 5분만 들어봐도 얼마나 반응이 좋은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마 숨겨놓고 뭐 했냐, 예쁜 얼굴에 정장이 얼마나 좋은 조합인지 증명했다……. 대충 기억나는 건 이 정도였다.

“확실히 스타일링이 사람을 바꾸나 봐.”

“왜?”

매니저 형이 사 온 초코 라떼를 마시면서 한참 의상 점검을 하는 지구를 보면서 중얼거렸더니 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이제 진짜 형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목구멍으로 따끈하게 넘어가는 라떼를 내려놓으며 턱을 괴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반듯한 이마에서부터 시작해서 여전히 동글동글한데도 묘하게 가늘어 보이는 눈, 그 밑으로 쭉 내려가다가 어제저녁에 키스한 입술을 보고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야, 너랑 지구 한 살밖에 차이 안 나. 그 정도면 동갑이지.”

“아. 맞다.”

지구가 워낙 깍듯이 존댓말을 써줘서 가끔 잊어버리곤 했다. 나이 차이가 고작 한 살이라는 사실을. 하긴, 한 살 차이면 그냥 친구랑 다름없는데. 머릿속으로 지구가 몇 번 반말을 쓰면 어떨지 생각해봤지만, 곧 그만뒀다. 전혀 상상도 안 간다.

“아, 언제 한 번 야자타임 해야겠네.”

휘영과 도란도란 잘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예준이 불쑥 끼어들어 한 마디 얹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술판을 벌여서 야자타임을 하겠다는 리더의 끔찍한 선언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쪽으로 다가온 지구에게 마시던 초코 라떼의 빨대를 물려줬다.

그렇게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활동하던 게 거의 끝나갈 때쯤. 지구가 음악 예능에 캐스팅됐다. 그것도 고정 멤버로.

같이 촬영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하는 건데 지구가 신인 여자 래퍼 곡에 피처링을 해주는 역할이라고 했다. 그 연습 과정을 방송으로 내보내고 실제로 무대에 서는 걸 마지막 화로 해서 끝나는 5부작의 짧은 예능이었다.

“신인이랑 신인 조합이야?”

“응.”

“이번 기회로 보컬적으로 좀 알려지면 좋겠네.”

예준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지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걸 힐끔 보면서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그 래퍼의 이름을 검색해봤다. 고양이상의 올라간 눈꼬리가 매력적이었다. 음원 사이트에서 노래도 하나 찾아서 들어봤는데 목소리도 랩 하는 사람치고 맑았다. 지구의 미성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예상대로 둘은 음악 성향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지구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함께 콜라보 작업을 하러 갔고, 활동이 끝나서 전보다 조금 한가해진 스케줄에 나는 숙소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 노래를 찾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주 그리고 너 – SJ]

지구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생긴 습관대로 최신 음악을 뒤지며 좋은 노래들을 찾아냈다. 벌써 쓴 지 꽤 된 블루투스 스피커 사이로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목소리 참 좋은 것 같은데.

한참 그렇게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보다는 잠이 쏟아졌다. 좋은 노래를 듣고 있는데도 기분이 쉽게 좋아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혼자 듣고 있어서였다.

[#작업 #청춘은음악을타고 #브이

작업 순조롭게 잘 되고 있어요~ (이모티콘) 많이 기대해주세요!]

지구는 숙소에 와서 단 한 번도 나에게 작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지만, 그날 뭘 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본인의 SNS에 하루에 다섯 번씩 꾸준히 작업 현황을 업로드해주는 파트너 래퍼 덕분이었다. 가끔 작업하는 지구의 옆모습이 올라오기도 하고 잠깐 카페에 왔다며 아메리카노 두 잔이 찍힌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구 아메리카노 안 마시는데.”

라떼만 마시는데. 심지어 거기 시럽도 왕창 넣어서 먹는 앤데 웬 아메리카노를. 대충 스크롤을 내리며 혼자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용케 들었는지 매니저 형이 신호가 걸린 틈을 타 고개를 뒤로 꺾어 물었다.

“지구 아메리카노 왜?”

“아니요. 그냥.”

“지구 개인 스케줄 나가서 심심하냐? 너도 음악방송 MC 하나 잡혔는데.”

“음악방송 MC요?”

“더블 MC. 배우 진주현 알지?”

“잘 모르겠는데요.”

“맨날 뉴스 보면서 본 적 없어? 아역배우였는데.”

매니저 형이 놀랐다는 눈치로 쳐다보더니 휴대폰으로 이름을 검색해서 보여줬다.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담기자마자 한 박자 늦게 저절로 아, 하는 탄식이 흘렀다. 요즘 연예 뉴스 쪽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었다. 월화였나, 수목이었나. 요즘 10대들 사이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드라마 여주인공이었다.

쌍꺼풀 있는 큰 눈이 접히면서 웃는 얼굴이 청순하면서 귀여웠다. 작중 역할이 발랄하고 상큼한 대학생이라던데 정말 딱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며칠 전에 이 드라마에서 나온 애교가 그렇게 유행이라는데 막상 들어본 적은 없었다.

“지금 하는 드라마 나오는 배우 아니에요?”

“맞아. 예쁘지?”

“네.”

“일만 하고 와. 예쁘다고 들이대고 그러면 큰일 난다.”

지구가 더 예뻐서 그럴 일 없는데요. 순간 헛소리를 하는 매니저 형에게 정색한 채로 말할 뻔하다가 겨우 삼켜내고 다른 말을 꺼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저 그럴 것 같아요?”

“아니지. 근데 상대가 누구든 연애는 절대 안 되는 거 알지? 지금 데뷔 초야.”

“알아요.”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모르는 척 어물쩍 넘어갔다.

그렇게 지구가 작업 막바지에 들어가고, 청춘은 음악을 타고 1화 방송을 이틀 앞두고 처음으로 음악방송에 아이돌 대신 MC 신분으로 참석했다.

주현은 생각보다 더 바른 사람이었다. 아역 때부터 활동해서 분야는 달라도 연예계로 치면 한참 선배였는데도 막 데뷔한 신인처럼 예의 바르고 스태프들에게도 친절했다. 당장 나에게만 해도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하는데 그게 너무 친숙해서 금방 편해졌다.

“저 대본에 선배님 드라마 애교 있거든요. 그 얼굴 감싸는 거요.”

“아, 이거 어떡해. 할 수 있어? 못할 거 같은데? 이게 애교 있는 눈웃음이 포인트야.”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까 생각보다 진행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웠다. 잠깐 대화한 것 가지고 이렇게 호흡이 잘 맞을 수 있는지 만족스럽게 카드에 적힌 대로 멘트를 쳤다.

“이번에 무려 2년 만에 컴백한 분들이 있다고 하시던데! 하현 씨, 어떤 분들이신지 소개 좀 해주세요.”

“저도 이분들 활동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무대 위에서 표정 천재라고. 아, 저도 빠지진 않는데. 한 번 보실래요?”

물론 대본에 적혀있는 망할 드라마 애교를 하다가 삐끗해서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인 것만 빼면 정말 만족스러웠을 텐데 안타까웠다. 멘트 하나를 망치고 나오면서 방송 모니터링은 흐린 눈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