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사라진 지구는 허무하게도 아파트 현관 계단에서 발견됐다. 무작정 찾으러 나가겠다고 전화를 걸면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인 얼굴에 힘이 쭉 빠졌다.
“왜 여기 있어.”
내 목소리에 지구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이쪽을 바라봤다. 소매를 걷어 올린 겉옷 밑으로 여전히 붙어있는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처음 봤는데 씻고 나서 바꾼 건지 살구색 밴드가 귀여운 캐릭터 밴드로 바뀌어 있었다.
“형.”
“여기서 뭐 해. 7시밖에 안 됐어.”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바로 옆에 앉았다. 집 안은 조금 후덥지근했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계단은 아직 차가웠다. 더위가 싹 물러가는 게 시원한 기분이었다.
“새벽 공기 맞으러 나왔어?”
“아니요.”
“그럼 여기 왜 있어.”
지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막 새로 산 것처럼 깨끗한 휴대폰이 하얀 손 위에서 한 바퀴 굴렀다. 그 과정에서 케이스 뒤쪽의 공간에서 살짝 삐져나온 포토카드가 눈에 걸렸다.
“새벽에 전화 받을 일이 조금 있었어요.”
“무슨 일이었는데?”
“그냥…….”
그냥, 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팔을 잡았다. 뭔가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항상 이렇게 넘기려는 게 속상했다.
항상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해주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건 전부 오해였다. 저렇게 속으로 꾹꾹 혼자 눌러 담아 놓는데.
“그냥 말고.”
“네?”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주면 안 될까?”
허공에서 방황하는 손을 잡아 밑으로 내려 깍지를 꼈다. 뭔가 잡아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을 굳이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러다가 정말 훅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말해줬으면 좋겠어.”
“…….”
“정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강요하는 건 아니야. 근데 궁금해서. 혼자 계속 힘들어하는데 이유를 모르니까 답답해서.”
지구는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앞만 바라보면서 조용히 하는 말을 똑같이 엘리베이터를 쳐다보면서 들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신중을 가해서 이야기를 마친 지구가 살짝 몸을 기울여 내 어깨에 얼굴을 떨어뜨렸다.
“저 회사는 참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구나. 스폰 뛰어줄 멤버였다가 논란에 휩싸이니까 이제는 가족. 세상에 누가 가족한테 그래요.”
말을 듣고 있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답답한 것과는 별개로 화가 났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애한테 스폰 제의를 한 것도, 그때의 사진을 다시 보게 한 것도. 목구멍에 온갖 욕들이 다 차올라서 나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쪽이 왜 가족이야. 네 가족 여기 있잖아.”
“네?”
할 수만 있다면 TN 개새끼들, 하고 이 아파트 복도 계단 위에서 소리치고 싶었는데 일이 두 배로 커질까 봐 차마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대신 반대쪽 손까지 꽉 붙잡고 말해줬더니 지구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진지한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부분이 웃겼어?”
“아니요. 좋아서요.”
“가족?”
“형이요.”
지구가 어깨에 기댔던 얼굴을 떨어뜨리고 나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계단에 오래 앉아있어서인지 시원한 몸이 바싹 맞닿았다. 단단한 팔로 꽉 끌어안은 지구가 귀 바로 옆에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싫다고 했어요.”
“잘했어. 좋은 일을 네가 왜 해줘.”
“일이 커질 거예요. 상대가 TN인데. 이사님이 진짜 독하거든요.”
확실히 상대는 아직까지 대형 소속사로 불리는 TN이었다. 우리 그룹과 스페이스의 싸움이면 모를까, 회사 대 회사로 따지면 우리 쪽이 훨씬 불리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 싸움의 경우고 지금은 누가 봐도 TN에게 더 큰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거짓말해주는 게 싫어.”
툭 튀어나온 진심에 맞닿은 몸이 살짝 움찔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는 더 독한 사장님이 있잖아.”
돈에 관해서는 TN 이사보다 우리 사장님이 독할 게 확실했다. 내심 대형 소속사에게 열등감도 많이 느끼고.
“회사도 회사인데 넌 괜찮아?”
“저요?”
“안 좋은 기억이잖아. 다 끄집어내야 할 텐데.”
TN이 미성년자에게 스폰 제의를 했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타격을 받을 일이었지만 지구 입장에서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묻자마자 지구는 안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팔에 힘을 줘서 자기 쪽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좁아터진 계단 위에서 애인에게 안겨있는 기분은 굉장히 애매하고 모호했다. 날이 더워서 슬슬 후덥지근해지는 것도 같았다.
“괜찮아요. 이제 기억도 잘 안 나고…….”
지구가 내려놨던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고 두드리더니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누가 봐도 스페이스로 보이는 사람들이 쭉 앉아있고 그 가운데에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지구가 앉아있었다. 대체 이 얼굴을 보고도 스폰을 해라 소리가……. 말문이 절로 막혔다.
“이 사진이거든요. 보자마자 이때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다 사라졌어요.”
“그랬어?”
“형 덕분에요.”
지구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내 목 근처에 얼굴을 박았다. 뜨끈한 숨이 뚜렷하게 느껴져서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 온도로 아직 감기 기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슬슬 들어가자.”
“조금만 더 있다가요.”
“너 감기 걸렸잖아.”
“아…….”
어제 있던 미열은 아직 다 안 떨어진 것 같았다. 하얀 피부는 온도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이마에 손을 대보려고 했더니 지구가 순식간에 멀리 떨어졌다.
“오늘 스케줄 있는데 옮으면 안 되잖아요.”
살짝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리길래 멀어진 몸에 팔을 감아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서 하자.”
“네?”
“더 이러고 있고 싶으면 침대 위에서 하자고.”
멍청하게 서 있는 지구를 데리고 현관문을 열고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대충 걸친 얇은 겉옷을 벗겨서 바닥에 대충 던져놓고 내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열이 잔뜩 오른 두 팔을 붙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키스하고 싶어서 닫혀 있는 입술을 살짝 열어보려는데 지구가 손을 들어 올려 몸을 아주 살짝 밀어냈다.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감기 옮는다니까요.”
“감기 타액으로 전염되는 거 아니야. 연구결과 있어.”
“진짜요?”
처음 알았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뜬 지구가 곧 먼저 입을 맞춰왔다. 안된다고 밀어놓고 급했는지 평소보다 속도가 빨랐다. 생각보다 더 금방 숨이 차서 입을 떼자마자 지구 쪽으로 몸이 넘어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정적으로 받아준 지구가 그대로 몸을 침대에 눕혀주고, 자기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와중에 살짝 맞닿은 손가락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다 잠드는 바람에 예준이 깨우러 왔을 때 겨우 눈을 떴다. 잠든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잠에서 헤어 나오는 게 힘겨워서 지구 팔을 붙잡고 인상만 찌푸리고 있는데 예준이 한마디 했다.
“연애도 좋은데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심기 불편한 웃음에 가슴팍 위에 올라와 있는 지구의 팔을 살며시 들어서 내려놨다.
* * *
회사와 협의를 끝내자마자 우리 쪽에서 공식 입장을 냈다. 해명 글을 낼 준비를 하고 있던 TN은 우리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듯 심하게 당황한 눈치였다. 멍청하게 문자며 전화며 기록들은 또 잔뜩 남겨둔 상태라서 우리 쪽이 중요한 카드를 쥐고 있는 상태였다.
“TN이랑 연락됐어요?”
“먼저 왔어. 지구한테 말 맞춰달라고 했던 것만 터뜨리지 말아 달라더라.”
처음에는 소속사 이름으로 갑질하려고 하더니 상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하니 TN은 구구절절 길게 말을 늘어놓으며 합의를 보려고 했다. 입 막으려고 했던 게 알려지면 소속사까지 타격을 받게 되니 많이 급한 모양이었다.
“여긴 나름 한때 대형이었는데 왜 이렇게 일을 못해.”
“그러니까요. 대놓고 문자하고 전화하고……. 나도 그렇게는 안 한다.”
매니저 형을 졸라서 얻어낸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준이 신나게 TN의 멍청함을 지적했다. 아까까지는 더위 때문에 시들시들하더니 아이스크림 하나로 싱싱하게 살아난 막내 덕분에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시원했다. 보통 우리 그룹의 분위기는 준의 컨디션이 좌우했다.
“아. 그리고 지구는 바로 회사로 가자.”
“네.”
“뭐 하러 가?”
“작곡 때문에요. 선생님 오늘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작곡은 지구가 하는데, 매니저 형이 더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백미러로 이쪽을 살폈다.
“선생님이 칭찬 많이 하시더라. 다음 활동 수록곡 참여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수록곡 참여라.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단했다.
“같이 작업하는 거야?”
“네. 아직 혼자서 한 곡 다 쓰기는 부족해요.”
“배운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당연하지.”
“혼자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되면 제일 먼저 형한테 들려줄게요.”
갑자기 귓가로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안전벨트로 속박당한 몸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매니저 형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운전 내내 행복해 보였다.
지구를 회사에 보내놓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켰다. 요즘은 농장 게임도 재미없었고 연락할 만한 친구도 당연히 없었다.
한참 방황하다가 결국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뉴스 기사를 몇 개 읽고 나왔다. TN이 다른 소속 가수들에게도 반강제로 스폰 제의했던 사실들이 뒤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건지 다른 아이돌들 이름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본인이 뜨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스폰도 아니고 회사에서 강제로 등 떠미는 스폰. 그것도 막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열일곱한테. 그걸 또 옆에서 부추기는 스페이스 멤버들을 상상해보니 그렇게 역겨운 상황이 있을 수가 없었다.
“연예계가 원래 다 이런가…….”
“뭐가?”
침대 위에서 초콜릿 잼을 퍼먹던 예준이 혼잣말에 빠르게 반응했다. 저렇게 커다란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는데 입가에 묻은 게 전혀 없었다. 정말 뛰어난 스킬이구나 싶어서 조금 전 중얼거린 혼잣말을 다시 재방송해줬다.
“원래 연예계가 다 이런가 해서요.”
“다 그렇지. 우리는 특수한 케이스로 데뷔해서 그렇지, 신인에서부터 이 악물고 올라오는 게 쉬울 리가. 순수하게 자기 노력하고 우리 팀 실력 하나만으로 정상 밟는 건 100만분의 1의 확률이야.”
“그래요?”
“온지구 보면 알잖아. 치 떠는 거. 나도 혼자 랩만 했지 직접 기획사에 발 담가 본 적은 없으니까 잘 몰라. 쉽게 보고 도전할 곳이 아니긴 하지. 그런데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고.”
말을 마친 예준이 갑자기 달아서 혓바닥이 사라질 것 같다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하지만 통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너무 쉽게 잡은 자리인가. 괜히 애꿎은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다가 풀었다. 복잡해진 생각에 또 스페이스가 파고들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떠올리니까 손에 힘이 또 들어갔다.
“합의금 주면 때려도 되나.”
혼자 중얼거린 말에 멀리 침대에 있던 예준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넘어갔다. 끅끅대면서 열심히 웃는데 상황상 내 말을 듣고 웃는 게 분명해서 뒤돌아 물었다.
“형 갑자기 왜 웃어요.”
“그 글 생각나서.”
“무슨 글이요?”
이왕 웃을 거면 같이 웃자 싶어서 물었더니 예준은 대답을 하는 대신 웃기만 했다.
“합의금으로 커피 주고 때리면 되겠다. 참고로 스페이스 취향은 칸타타.”
“웬 커피……?”
예준은 끝까지 영문 모를 말을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한참을 킥킥댔고 중간에 시끄러워서 이불을 슬쩍 걷어차 줬을 때 조용해졌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