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80화 (80/130)

35화

강한 사람. 약한 사람. 괜찮은 사람. 괜찮았으면 하는 사람.

둘 다 확실한 후자였다. 뭐든 괜찮아 보이고 싶었다. 걱정 받는 게 싫었고 그냥 누가 괜찮냐고 묻게 만드는 상황이 싫었다. 얼굴에서 티가 난다는 말이었으니까. 든든하고 뭐든 담담한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어머니는 응석 부리는 걸 싫어하셨다. 아주 어릴 때부터. 둥글게 살라는 말만 강조하며 예의 있는 아들을 키우고 싶어 하셨고, 과묵하지만 공부도 잘하고 어디 내놨을 때 부끄럽지 않은 번듯한 직업을 가진 아들을 갖고 싶어 하셨다. 첫째 아들이 먼저 그 루트에서 벗어나고 어머니의 기대는 방향을 바꿔 나에게로 왔다.

“의학 쪽이나 법학 쪽이 괜찮지. 아니면 대기업 입사도 괜찮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은 막연한 바람이었다. 책가방을 메고 학원을 세 개씩 다니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은 형을 따라 음악을 하겠다는 다짐을 갖던 시기였다. 듣기 싫어서 대답하지 않았다가 머리를 맞았다. 얼마나 아팠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확실히 소파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연애를 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받으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고백을 받았고 2주일도 못 가서 먼저 사과하고 헤어졌다. 막 교복을 입은 어린아이들의 연애가 다 그렇듯 별거 없었고 그게 당연한 거였는데도 대체 이 관계의 어디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불편했다.

그 후 고집으로 음악의 길을 걸을 기회를 얻었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는 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도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형이 부른 팬 사인회에서 같은 학교 교복을 봤다.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선배였는데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장소를 다시 살폈다.

입학식 날 선배 축하 공연에서 춤추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가 단번에 납득되는 실력이었다. 형만큼 하려면 넌 아직 멀었다고 웃으며 어깨를 치던 민서진과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재능이라는 건 이렇게 무섭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월요일 조회시간에 좋지 않은 화질로 간간이 보던 얼굴을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 인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과도, 학년도 다른 우리 반 애가 좋아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언제나 덤덤하게 남들의 수 배를 연습하는 선배는 전공을 떠나서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모르는 학생들이 자기 얘기를 얼마나, 어떻게 하든 항상 노력했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모두에게 보여줬다. 증명, 나에게 가장 간절했던 그걸 당당하게 해 보이는 게 멋졌다.

선배가 나간 대회를 보러 갔고, 영상도 틈틈이 챙겨봤다. 범인과 천재, 그 사이의 따라잡을 수 없는 무수한 벽. 거기에 열등감 대신 동경이 생긴 건 처음이었다.

“들었냐?”

“뭘.”

“3학년 박하현 선배 실기 미참석으로 떨어졌대. 대박이지.”

“미친, 3년 개 빡세게 해놓고 왜 안 갔대?”

“쓰러져서 못 간 거라던데.”

“왜? 그 선배 어디 병 있었냐?”

“연습 잘하던데. 어떻게 딱 당일에 쓰러지냐?”

“와, 나 같으면 목매달았다.”

“그래서 지금 학교 안 나오잖아.”

수많은 결과로 실력을 증명한 선배는 단 한 번의 실패로 여기저기서 입을 타고 오르내렸다. 동정할 입장도 걱정할 입장도 아닌데 자꾸 부정적인 소리가 들리니까 괜히 내가 다 껄끄러웠다. 그래서 둥글게 살자는 신조랑 안 어울리게 불쑥 한마디 끼어들었다.

“남 얘기 너무 하지 말자.”

“……어, 뭐.”

“…….”

“아, 존나 분위기…….”

머리를 거칠게 헝클며 친구는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때 또 한 번 느꼈다. 세상은 남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졸업식을 마친 선배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가끔 들어가 무대 영상을 찾아보던 페이스북은 업로드가 된 지 한참이었고 졸업하자마자 친구들 연락도 다 끊고 잠적했다는 소문만 간간이 돌았다.

그래서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이제 기회를 잡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열심히 연습하던 중에 형에게 연락을 받았다.

-너 서바이벌 데뷔 프로그램 하나 나가볼래?

“나 소속사 없어.”

-일반인으로 진행하는 프로야. 캐스팅하느라 바쁘던데 괜찮은 애 있으면 일단 다 데려와 달라더라.

그렇게 나가게 된 프로그램에서 선배를 만났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아이돌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선배는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생각을 했길래 여기 나와 있을까. 아예 때려치운 건 아니었구나.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 보인 김성원의 얼굴에 안도감은 다 박살 났다.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본 선배는 남에게 칭찬도, 설명도 친절하게 잘 해주는 사람이었다. 평생 대화 나눠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선배와 친분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기분이 오묘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무대를 꾸미고 있는 것도, 내가 선배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춤을 배우는 것도.

그러다 일이 터졌다. 대놓고 엿 먹이려고 대기실에서 김성원이 꺼낸 형 소리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좋아하는 언론 플레이까지 실컷 해준 덕분에 인터넷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미디어에 노출되기 시작한 사람이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감수해야 하는 일인데도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에도 안 들어가고 학교 앞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있던 중에 선배가 보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무 말 없이 레모네이드 한 캔을 올려두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속에 있는 얘기를 횡설수설 털어놨다. 누군가에게 힘든 일을 털어놓는 건 처음이었는데 선배는 별소리 없이 단순한 위로만 끊임없이 해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음악이 아닌 다른 말에 위로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어쩌다 최종 미션까지 쭉 함께했다. 생에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컨트롤하기에 너무 낯설고 서툴러서 가만히 두고 있었더니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다 보니 인정은 쉬웠다. 혼자 깨닫고 간직하는 것 정도로는 어떤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피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같이 데뷔했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데 정말 나란히 같은 최종 멤버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꽤 긴 계약 기간 동안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마음이 없는 연애,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마음.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고통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 다행히 일이 바빠서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다.

어느 날 거지 같은 샐러드를 씹으면서 머리를 비우고 연습하다가 일이 터졌다. 술주정도 모르고 첫술을 멤버들과 같이 마신 게 잘못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는데 형, 진짜로 좋아해요.”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혼자 중얼중얼하다가 잠든 것까지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았다.

‘망했다.’

혼자 자책하다가 이래도 저래도 어색해질 것 같아서 결국 솔직하게 털어놨다. 혼자 좋아하겠다는 말을 형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고 고백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 뒤로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신인 아이돌의 삶이 평탄한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유독 일어나는 일들이 컸다. 정신없이 여러 사건을 넘기고 졸업식이 다가왔을 때였다. 작곡은 마음대로 잘 안 됐고, 해외로 나간 부모님은 관심 없는 문자를 계속 보내는 탓에 그리 좋지 않은 기분으로 졸업식을 마쳤을 때였다.

“졸업 축하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파란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는 형이 보였다. 눈에 담긴 그 모습에 순식간에 살짝 맴돌던 우울함이 싹 걷혔다.

아, 난 이렇게 멋진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지. 새삼 상기하며 꽃다발을 한 박자 늦게 받아들면서 생각했다. 형이 계속 들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너랑 나 사이에 굉장히.”

단둘만 남은 운동장에서 형은 우리 사이에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겠다고 했다. 왠지 좋아하지 말라는 소리일 것 같아서 심장이 쿵 떨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멋지게 하고 와서 하필 지금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하는 건 괜찮은 거야?”

필사적으로 말을 막아보려는 내 노력을 무시한 형이 물었다. 놀란 나는 형이 준 꽃다발을 떨어뜨렸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꽃잎을 덮치는데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너무 믿을 수 없는 말이라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한 번 생각하고, 의미 해석을 잘못한 건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했다.

“나도 좋아해.”

확정처럼 떨어진 말에는 진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허락을 받고 천천히 끌어안았을 때는 우주를 가진 기분이었다. 정말 과장 없이.

그다음부터 연애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손만 잡아도 기분이 좋고 같이 누워있으면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바빠서 뭔가 따로 시간 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사소한 걸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성년의 날은 사실 캘린더에 표시도 해놨다.

하현이 형은 생각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었다. 지구야, 하고 불러줄 때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름이 유난히 특별히 들리기도 하고 별거 아닌 일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웠다. 취향, 취미, 버릇, 무심코 흘러나오는 말들을 빠짐없이 주워 담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컨디션이 별로였다. 곧 다가올 미래를 암시라도 하듯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리지 않나, 의상 때문에 피도 봤다. 무대가 우선이라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끝내긴 했지만 팔이 계속 따끔거렸다. 결국, 대기실에 오랜만에 보는 민서진이 뜬금없이 들어옴으로써 하루 종일 마음껏 느낀 불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거.”

민서진이 내민 사진은 화질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뚜렷했다.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해상도였다. 쭉 앉아있는 스페이스 멤버들 옆에 내 얼굴이 보였다. 그곳은 굉장히 익숙한 장소였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퍼지는 그날의 풍경에 뭔가 올라올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형이 순식간에 다가와서 숨 쉬라고 등을 쓸어줬는데 놀라울 정도로 금방 진정됐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일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방금 본 사진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형 얼굴만 순식간에 한가득 담겼다.

누가 찍었는지 모를 사진은 여러 장이었다. 강제로 스폰 제의를 받았던 그날의 술집 사진. 다각도로 여러 장이 찍혀서 내 얼굴까지 나온 판에 절대적으로 사실을 부정해야 하는 소속사는 합의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무조건 아니라고 해야 해]

[그냥 관계자 생일파티 간 거야. 말만 맞춰주면 되잖아]

[어???]

[결국 그날 네가 피해 본 것도 없잖아]

[없었던 일인 것처럼 넘기면 된다고]

스페이스 멤버들에게 돌아가면서 문자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번호를 바꿀걸.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다 삭제해서 몇 개 없었지만, 저쪽에는 내 번호가 있었다. 계속 대답을 강요하길래 대놓고 읽고 씹었다.

“지구야.”

흐린 눈으로 쏟아지는 문자들을 대충 읽어 내리는데 옆 침대에서 다정한 부름이 들려왔다. 자다 깨서 부르는 줄 알았더니 목소리가 또렷한 게 아닌 것 같았다. 황급히 대답하자마자 조용히 질문이 하나 들어왔다.

“네 침대로 가도 돼?”

한참 고민하다가 안 된다고 했다. 이럴 때 옆에 있으면 감기에 걸렸는데도 키스하고 싶을 것 같아서 거절한 건데 옆 침대에서 자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계속 흐르는데도 잠에 못 드는 것 같은 형을 계속 곁눈질로 살피다가, 2시가 조금 넘어서야 완전히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줬다. 이불을 차고 자다가 내가 감기에 걸렸으니까.

자정부터 조금씩 흘러나오던 이런저런 말들이 새벽 사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딱 그 시기에 소속사를 나갔던 나 때문에 더 확실하게 굳어지고 있는 스폰서 논란은 공식 입장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간이 안 보이는 건지 매너 없이 전화를 걸길래 형이 깰까 봐 급히 겉옷만 챙겨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지구야. 지금 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전화를 받자마자 들리는 목소리는 스페이스 멤버 중 한 명이 아니었다. 들은 지 한참 됐지만, 틀림없이 TN 이사님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말만 해주면 돼. 다른 말은 필요 없고 너한테 질문 들어갈 때 생일파티였다고 해. 여자분은 관계자였다고 하고.

문자로 질리게 들었던 말들이 똑같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페이스는 현재 TN엔터테인먼트의 큰 주력 가수였다. 데뷔 7년, 8년쯤에 징크스를 맞은 선배들은 더는 컴백마다 큰 화제성을 몰고 오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준비해온 그룹이었던 만큼 대형 엔터의 반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TN에게 스페이스는 중요했다. 제일 돈을 열심히 벌어오는 그룹이니 당연히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지구야. 우리가 같이해온 것도 있고……. 너도 데뷔조 식구였잖아.

“왜요?”

-뭐?

“저는 식구였던 적 한 번도 없어요. 말 맞출 생각 없으니까 이만 끊을게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계단에 앉았다. 새벽 공기가 차고 상쾌했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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