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78화 (78/130)

33화

“하루 사이에 닫았네.”

수많은 팔로워를 뒤로하고 홈을 닫은 계정은 난리가 나 있었다. 화가 난 듯 날카로운 말들과 틀린 스펠링 때문에 잔뜩 조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화면을 껐다.

비공개 스케줄을 찍어서 판 사진으로 얼마나 벌었을까? 포스트잇은 얼마에 팔았을까? 문득 드는 생각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매니저 형에게 아직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렇다는 건 갑자기 심경 변화가 일어났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하나밖에 없었다.

“아까 뭐라고 쓴 거야?”

지구가 뒷장에 정성스럽게 무언가 적어 건넨 포스트잇. 그게 아니면 큰 이유가 없었다. 앞뒤 없이 덜컥 물은 말에도 충분히 눈치챈 듯 지구가 이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약간의 경고?”

“그러니까 무슨 경고.”

“비밀이에요.”

대체 뭐라고 썼길래 비밀이라는 소리가 나오나 싶었다. 지구는 말이 별로 없고 먼저 자기 얘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지만 어떤 질문을 해도 항상 피하는 것 없이 꼬박꼬박 대답해줬다. 비밀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애가 숨기니 더 이상했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

고작 메시지 하나로 어르고 달랜다고 그만둘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약했나 보다. 사인회에서 팬들이 주고 간 선물이나 꺼내 보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지구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이랑 그 홈마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앞에 서 있는 팬에게 사인해주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그사이에 말은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야채 싫어한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더라고요. 형이 인터뷰에서 싫어한다고 언급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대형 홈 운영하는 사람이 모른다는 게.”

“아…….”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심지어 직접 대화를 나눴던 나도 그런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자퇴했다고 했잖아요.”

“맞아.”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거든요.”

정확히 뭐라고 적어줬는지는 말해주지 않고 지구가 거기서 말을 멈췄다. 가끔 보면 지구는 예준과 다른 느낌으로 그 나이대 같지가 않았다. 막 스물이 된 애가 기껏해야 한두 살 어린애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도 그렇고, 평소에도 너무 어른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상자 두 개 중 내 이름이 적힌 걸 골라내 열었다. 상자 속에는 팬들이 주고 간 선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참 뒤적이다가 뭔가 깨닫고 지구에게 물었다.

“먹을 건 다 없어졌네?”

“매니저 형이 위험하다고 음식은 따로 빼갔대요.”

“갑자기?”

“다른 아이돌 팬 사인회에서 팬이 준 음식에서 칼날이 나왔나 봐요. 그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다음 사인회부터는 음식 선물 아예 못하게 할 거래요.”

칼날……. 말만 들어도 섬뜩해져서 고개를 한 번 털어냈다. 나에게 주고 싶어서 새벽부터 직접 만들었다며 팬들이 건넨 디저트들이 생각나서 괜히 씁쓸해졌다. 호의 속에 생명의 위협이 섞여드는 바람에 다른 팬들이 준 정성조차 받지 못한다는 게. 결국, 상자를 뒤지던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일찍 자.”

걱정돼서 해준 말에 지구가 볼펜을 내려놓고 뒤돌아 웃으며 대꾸했다. 네.

평소에는 피곤해서 암흑 상태로 거의 기절한 것처럼 잠을 자는데 오늘은 조금 옅었는지 새벽에 눈이 떠졌다. 느리게 깜빡여보는데 잠이 오기는커녕 갈증만 심해져서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알았다. 옆 침대가 비어 있다는걸.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을 갔겠구나 싶어 조용히 문을 열고 발을 떼는데, 소파에 앉아있는 형체가 보여서 흠칫 놀랐다.

“죄송해요. 시간이 안 난다고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여전히 침대 위에서는 예준이 정체 모를 잠꼬대를 하고 있었고, 통화하는 지구의 목소리는 그 목소리보다 조금 작았다.

“연락받기 불편해요.”

깔끔하고 단정한, 길지 않은 손톱이 푹신푹신한 소파를 조금씩 잡아 뜯고 있었다.

“계약서에 서명해주신 건……. 하아, 제가 진짜 그거까지…… 그래서 한 번도 응원해달라고 한 적 없었잖아요.”

한숨 쉬는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지구가 지친 목소리로 이만 끊자고 했다. 이제 곧 다시 방으로 들어올 것 같아서 급하게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는데 이쪽으로 돌아온 고개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발을 어쩔 수 없이 멈췄다. 자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문 앞에 서 있고, 눈이 마주쳤는데도 지구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요?”

“어, 그…….”

거의 통화가 끝나가는 시점부터 들었지만 정말 솔직하게 대답할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목이 말랐는데 갈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천천히 발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오는 지구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망설이다가 결국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하.”

뒤꿈치까지 들어가며 목을 끌어안았더니 지구가 바람 빠지게 웃는 소리를 냈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방송 날도, 하다못해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도 지구 부모님을 뵐 수 없었으니까.

뭔가 해줄 말이 없어서 입은 꾹 다문 상태로 그냥 등만 천천히 토닥여줬다. 품 안에서 한참 가만히 있던 지구가 갑자기 귓가에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저 평생 통틀어서 졸업식 날 제일 행복했으니까.”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이고 본인 침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절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뭐라고 평생을 통틀어서 제일 행복할 정도야. 야심한 새벽에 심장이 마구 뛰어대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또다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기분과 함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가슴속 스위치를 툭툭 치고 가는 것 같았다.

너무 예쁜 거 아니야. 더 오래 안고 있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마음이 눈덩이처럼 너무 빠르게 불어나서 스스로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비밀이 하나도 없을 것 같기는 무슨. 난 아직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 * *

“형. 향수 많이 쓰죠?”

“어.”

게임에 정신이 팔린 예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준과 휘영이 오랜만에 같이 밥 먹으러 간다며 나간 덕분에 함께 게임 할 사람이 없는데도 예준은 꿋꿋하게 싱글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에 끊임없이 패배한 예준이 세 판쯤 더 하고는 결국 게임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놨다.

“향수 왜?”

“오늘 성년의 날이잖아요. 같이 좀 봐주세요.”

“아, 온지구?”

귀찮다며 거절할 줄 알았던 예준은 의외로 쿨하게 게임을 껐다.

“심심해 죽을 뻔했는데 잘됐네.”

역시 혼자 게임 하는 게 재미없었던 모양이다. 선물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겠지만 이왕이면 좋은 거로 선물해주고 싶었다.

“온지구 집에 없어?”

“아까 아침에 회사 갔잖아요.”

지구는 잠깐씩 주어지는 휴식 기간마다 꼬박꼬박 회사에 출석했다. 오늘은 만들어진 곡에 녹음을 해본다고 하던데, 언제 생각해도 지구는 열정적이었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지구를 보고 있으면 나까지 자극을 받았다. 덕분에 그저께는 노래가 많이 안정됐다고 칭찬도 받았다.

예준이 곧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 옆에 걸려있던 정장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제발 중간 옷도 좀 사라니까. 빠르게 이루어지는 환복에 나도 급히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마스크를 찾아 썼다.

든든히 무장한 덕분에 백화점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쭉 늘어서 있는 향수들을 눈으로 훑는데 예준이 툭툭 쳤다.

“걔 무슨 향수 쓰는데?”

“지구 향수 안 써요. 섬유 탈취제 쓰는 것 같던데.”

“야, 그럼 그걸 줘야지.”

“……성년의 날 선물로요? 뭐 어떤 거요? 페브리즈?”

예준이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하더니 테스트용 향수를 하나 집어 들었다. 테스트 용지에 한 번씩 뿌려보면서 한참 고민하는데, 몇 분이 지나도 고르지 못하고 주춤대자 직원이 다가와서 친절하게 도와줬다.

“성년의 날 선물로는 이 제품이 잘 팔려요.”

결국 향수 보는 눈이 조금 있지 않을까 싶어 데려왔던 예준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은 채로 계산을 했다.

“그냥 혼자 와도 됐겠네.”

“형은 여기 있는 거 다 사셔야겠어요.”

좋네. 이거 사자. 잘 어울리네. 이 세 가지 말만 돌아가면서 해준 예준에게 장난으로 한 마디 해주며 잘 포장된 향수를 받았다. 택시를 타고 다시 텅 빈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예준이 정장 마이를 벗어던지며 말했다.

“너 진짜 그것만 주고 끝낼 건 아니지?”

“뭐 키스라도 해줄까요?”

툭 뱉은 말에 예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이었다.

“온지구보다 네가 더 숙맥일 것 같다는 생각 취소할게.”

“저도 잘 모르거든요.”

중학생 때 사귄 누나랑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안 나고 그때도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성년의 날 대표 선물이라는데. 사실 전부터 타이밍을 빈번히 놓쳐서 계속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저녁에 숙소 비워줘?”

“……무슨, 아니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건지 예준이 게임기를 집어 들며 히죽 웃길래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예준은 알겠다며 왼손으로 게임기를 켜고 오른손으로 넥타이를 푸는 멀티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렇게 반나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준과 휘영이 시간차를 두고 숙소에 돌아오고, 간단히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하는 동안에도 지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녹음해본다더니 오래 걸리나 보다.

기다리다 못해 일단 씻으려고 갈아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지구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그래서 바로 조심스럽게 화장실에서 다시 발을 뺐다.

“형 안 씻어요?”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머리를 털어내던 지구가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넌지시 물었다.

“너 지금 들어왔으니까 먼저 씻으라고.”

“괜찮아요. 형 씻고 나오면 씻을게요.”

저렇게 말하면 내가 씻고 나올 때까지 들어가지 않을 게 뻔했으므로 최대한 빨리 씻고 나오자 싶어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갔다. 꼼꼼하게 이곳저곳 씻은 다음 조용히 침대 위에 앉아 지구가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러다가 자정이 넘어갈 기세인데, 지구가 젖은 머리를 털며 책상 앞에 앉는 그 순간부터 한마디도 못 했다. 침대 밑에 내려놓은 상자만 규칙적으로 만지작거리며 타이밍을 재다가 시곗바늘이 11시로 넘어가는 순간 겨우 말을 걸었다.

“지구야. 이리 와봐.”

“네?”

왼쪽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내며 지구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흠뻑 젖어있던 머리가 다 마른 것만 봐도 얼마나 시간을 끌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번 부르니 용기가 생겨서 포장해둔 상자를 집어 건넸다.

“이게 뭐예요?”

“오늘 성년의 날이잖아. 선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든 지구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직원의 추천으로 겨우 골라서 데려온 향수는 아까 맡아보니 시원하고 괜찮았다. 지구가 허공에 향수를 한 번 뿌리자 좋은 향이 공기 중에 퍼졌다.

“향 좋네요.”

고맙다는 의미인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여 보인 지구가 잔잔히 웃으며 다시 상자를 닫았다. 그래서 이제 다음 선물 얘기는 어떻게 꺼내야 하지. 지구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갈까 봐 적당히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먼저 물음이 툭 떨어졌다.

“형. 이게 끝이에요?”

지구가 살짝 물었다. 물질적으로 더 달라는 소리는 절대 아닌 게 분명했다. 얘도 생각이 있긴 했구나. 단정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떠보는 걸 보고 살짝 놀려주고 싶어서 괜히 다른 소리를 꺼냈다.

“아, 꽃다발?”

“네?”

“시간이 없어서……. 졸업식 때도 줘서 넘겼는데. 내일 사다 줄게.”

“아, 아니에요.”

진지한 반응에 당황한 듯 지구가 말까지 더듬으며 손을 내저었다. 입술 사이로 작고 낮은 숨이 내뱉어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아니요. 진짜. 그냥 해본.”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양손으로 볼을 붙잡았다. 볼 때마다 만지면 말랑말랑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딱딱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놀란 듯 크게 뜬 눈에 당황스러움이 잔뜩 비쳤다. 걸리적거릴 것 같아서 알도 없는 안경을 벗겨내 침대 옆 탁상 위에 올려놨다.

“그냥 해본 말이 어디 있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댔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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