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75화 (75/130)

31화

연예계 생활이 이렇게 다사다난할 수가 있을까. 데뷔 4개월 차라기에는 겪은 사건들이 너무 많았다. 알레르기로 쓰러지고, 사생에게 눈 찔릴 뻔하고, 의도가 뻔히 보이는 몰카에 당하더니 이제는 과거까지 털렸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데뷔했다는 특이한 케이스 때문인지, 그냥 올해 내가 삼재인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 정도면 굿 한 번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미신 같은 건 믿지 않는 편인데 사주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차라리 궁예가 나타나서 마구니가 끼였다고 못 박아줬으면 좋겠다.

“크게 나쁜 기사는 아니야. 일반인들 반응은 대충 넘기면 금방 가라앉고, 팬들은 좋게 보면 봤지 부정적으로는 안 봐.”

“엄청 나쁜데요.”

“그냥 너 좀 부끄럽고 마는 거지.”

시선을 쭉 내려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사진 찍힌 각도나 위치를 봐서는 앨범 인증샷을 찍다가 얼결에 내가 얻어걸려 찍힌 것 같았다. 그래도 일반인 시절인데 이렇게 막 올려도 되는 거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졸업사진으로도 받지 못한 타격을 여기서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기사가 뜬 거니까 한동안 언급은 많을 거야. 인터뷰 고정 질문되겠다.”

매니저 형이 눈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양쪽으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제 인터뷰마다 노블 남팬 소리를 들어야 하나. 노블을 좋아했던 시절은 무덤까지 조용히 끌어안고 갈 자신 있었는데 이렇게 나서서 밝혀주니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식은 지 꽤 됐는데.”

“무조건 예전에 잠깐 좋아했었다고 담담하게 나가야 해. 오버해도 욕먹고 아닌 척해도 욕먹어.”

연예계란 참 알다가도 모를 척박한 곳이었다. 끝까지 모두가 모르는 척해줬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텐데 정말 안타까웠다.

[Dies**** : 남자아님?ㅋㅋㅋㅋㅋ 게이인가]

벌써 게이 얘기가 나오네. 쭉 내리면서 댓글을 보는데 읽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나를 모르면서 흥미로운 제목을 보고 들어온 일반인들 댓글이었고 유독 남자 성비가 높았다.

“이런 거 보지 마세요.”

천천히 정독하던 와중에 휴대폰을 뺏겼다. 지구가 매니저 형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내 옆자리에 앉아 손을 살짝 잡았다. 맞다, 이럴 때 위로해주는 애인이 있었지. 비추천이 잔뜩 박혀 있는 게이냐는 댓글을 열두 개 정도 봤는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가 했더니 맞는 말이라 그랬나 보다.

“과거 사진 소비는 지양할 필요가 있는데.”

매니저 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공출목디과졸(공항, 출근길, 목격담, 디스패치, 과사, 졸사의 줄임말) 소비 지양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이야, 원래 홈마들도 초상권에 걸리거든. 근데 홍보 효과가 워낙 크니까 소속사들도 제지 안 하는 거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항이라 썩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매니저 형은 한참 더 그 얘기를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매니저 형이 손바닥을 쳤다.

“근데 하현이 너 홈마 중에 계속 비공개 스케줄 따라오는 애 있더라.”

“네?”

안 그래도 노블 얘기 때문에 심란한 마음에 못이 하나 더 박혔다. 출국 심사장 줄에도 있었고, 비행기까지 따라 탄 것뿐만 아니라 틈틈이 비공개 출퇴근길에 나타나는 그 홈마가 내 홈마였나 보다.

아이돌에게 사생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꾸준히 세뇌한 덕에 화장실 트라우마는 많이 나아졌는데 아무래도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움찔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걔가 네 홈 중에 크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걸. 일단 제지하지 말라는데 한 번만 더 비공개 스케줄 따라오면 뭐.”

“그러면요?”

“블랙 올려야지.”

매니저 형이 쿨하게 대답했다.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면 모든 행사에 출입이 금지되니 더 이상 홈을 운영하기는 힘들 게 분명했다.

“큰 홈이라서 제지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괜찮아. 걔 없어져도 그 자리 채울 홈마 많아. 그리고 요즘 사생 사진 많이 올려서 욕도 많이 먹던데.”

가끔 보면 매니저 형은 사장님보다 위에 있는 사람 같았다. 며칠 전에도 이동 관련 문제로 의견이 갈려서 공방을 벌이는 걸 봤는데 사장님 말발이 확실히 딸렸다. 회사 규모가 작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장님이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건지. 둘 다 맞는 것 같은데 굳이 순위를 정하자면 후자가 더 큰 것 같았다.

“형 진짜 존경스러워요.”

저번 매니저랑 비교돼서 더 그런 것도 있지만 제외하더라도 일 처리 능력이 정말 수준급이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맞아요. 혹시 경호 형 월급 나중에 우리가 정해주고 그런 거예요?”

준이 던진 우스갯소리를 매니저 형이 쿨하게 받았다.

“그랬으면 난 이미 너희 발닦개였을 거다.”

* * *

“어…… 알고는 있어요. 지구랑 같은 그룹이셔서 서바이벌 ID 마지막 방송 때도 뵀었고, 예능 촬영도 한 번 같이 했었고.”

그리고 워낙 잊기 힘든 분이라. 태양이 형이 인터뷰 때마다 보여주는 비즈니스용 눈웃음을 마음껏 방출했다. 이런 비슷한 인터뷰 자료가 네 개나 더 있었지만 하나만 봐도 충분했다. 질문하는 기자만 다를 뿐, 질문도 대답도 모두 똑같았으니까.

“하…….”

입 밖으로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꾸준히 각자 인터뷰를 통해 서로를 언급하며 강제로 내적 친밀감을 쌓아왔는데 오늘은 드디어 얼굴을 맞대는 날이었다.

남팬이었던 건 진작 들켰고 이미 한 번 같이 촬영한 적도 있지만, 오늘은 분명 진행자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우리끼리만 알고 소소하게 웃고 지나가는 거랑 방송에서 언급이 되는 건 천지 차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얼굴에 걱정 중이라고 적혀있기라도 한지 지구가 툭 위로를 던졌다. 그나마 개인 출연이 아닌 단체 출연인 게 불행 중 다행이긴 했다.

“다 착한 형들이라 대놓고 몰아가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 정훈이 형은 빼고요.”

정훈이 형의 장난기는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준이랑 붙여 놓으면 톰과 제리처럼 투닥투닥 잘 놀 것 같았다. 아, 우리 그룹에 이미 스물넷 먹은 제리 하나 있구나.

“태양이 형 말고 다른 멤버들도 알아?”

“태양이 형…… 언제 말 놨어요?”

지구가 대답은 안 하고 항상 쓰던 높임말까지 실종된 질문을 역으로 해왔다.

“말 안 놨어. 그냥 팬이었을 때 그렇게 불렀으니까.”

“아.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닌데 소속사 나오고 숙소도 몇 번 놀러 갔어요. 제가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니까 형들이 잘 해줬어요.”

그렇게 지구가 노블 숙소에 놀러 갔던 일을 듣다 보니 금방 촬영장에 도착했다. 촬영장 안은 벌써 분주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제도 새벽까지 풀로 차 있던 스케줄 때문에 잠을 못 잤더니 눈이 뻐근했다. 꾹 감았다 떴다 반복하며 정신없이 인사하고 다니다가 겨우 의자를 찾아 앉았다.

“안녕하세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중에 촬영장으로 노블이 들어왔다. 인터뷰 영상과 무수히 떴던 기사들을 생각하니 얼굴 보기가 꺼려져서 인사하며 숙인 고개를 다시 들지 않고 최대한 멤버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와, 온지구 얼마 만이야.”

“얘 왜 이렇게 컸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 10cm는 더 작지 않았냐?”

노블 멤버들은 바로 지구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10cm. 머릿속으로 지금보다 10cm 작은 지구를 상상해봤는데 귀여웠다.

“완전 남자 다 됐네. 어깨 봐라.”

넓은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주며 몇몇 멤버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얘 나보다 작았는데 이제 3cm는 더 큰 듯?”

정훈이 형이 신나게 웃으며 까치발까지 드는데 태양이 형이 불쑥 말을 걸었다.

“하현 씨 잘 지내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은 저 때문에 잘 못 지내셨죠.”

인터뷰마다 꼬박꼬박 잘 알지도 못하는 남팬을 언급해대는데 짜증이 안 났을 리가. 고개를 숙이며 형식적인 사과를 하는데 태양이 형은 호쾌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그걸 시작으로 나머지 멤버들의 관심이 우르르 나에게 몰렸다. 지구 성장이나 더 칭찬하라고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이미 노블 멤버들은 내 앞으로 와서 떠들고 있었다.

“팬분들이 좋아하시던데요. 우리 잘생긴 남팬 있었다고.”

“하하.”

예전에 팬 사인회 갈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어색하고 괴롭기 짝이 없었다. 빨리 타오르고 순식간에 식는 편은 아닌데 왜 노블만 이렇게 미련 하나 안 남고 싹 사라진 거지.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들어간 촬영에서 예상한 대로 질문 폭탄을 맞았고 신이 나서 몰아가려고 시동 거는 진행자들의 그물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블 춤이 멋있잖아요. 제가 또 춤 전공이었으니까.”

“맞아요. 저희가 워낙 칼군무라.”

다행히 노블 멤버들은 일화를 열심히 풀어주거나 같이 놀리는 대신 적당히 받아쳐 주는 쪽을 택했다. 덕분에 매니저 형이 준 예상 질답 리스트를 이용해 무난히 넘어갔다. 그래도 춤 좋아한다는 말에 한번 보자는 소리는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노블 히트곡 안무 영상을 한바탕 찍고 겨우 촬영을 끝냈다.

“온지구. 너 연락 좀 받아라.”

“연락?”

“카톡 받으라고.”

“아. 알림 꺼놔서 몰랐어.”

동생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겨우 확보한 태양이 형은 멤버들과 함께 쿨하게 촬영장을 떠났고 정말 별일 없이 촬영은 마무리됐다. 만약 숨겨진 자료 사진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콘서트장에서 줄을 서 있는 사진이라든가, 팬 사인회 응모하는 사진이라든가.

촬영이 끝나고 오랜만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목욕 순서에 전쟁이 붙었다. 내일 새벽부터 바로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씻고 자는 사람이 유리했다. 웬일로 지구가 나에게 가위바위보를 져서 제일 먼저 씻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왔다.

내일 나갈 때 입을 옷을 꺼내 대충 침대 옆에 늘어놓고 누웠는데 금방 씻은 지구가 곧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책상 서랍에서 동그란 안경을 꺼내는 걸 보니 아마 바로 자지 않고 또 작곡 공부를 하다가 자려는 것 같았다. 그냥 바로 누워서 자면 될 걸 대화하고 싶어져서 괜히 말을 걸었다.

“그 안경 잘 어울려.”

“이거요?”

지구가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툭 건들며 되물었다. 안경을 쓸 필요가 없는데 지구는 가끔 집중할 때 알 없는 안경을 꺼내썼다. 굳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괜히 집중이 잘 되는 느낌이라고 했었다.

“형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나는 안경 안 어울려.”

고등학생 때 한 번 썼다가 친구들이 안 어울리니까 제발 벗으라고 뭐라고 한 경험이 있어서 안경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잠깐 작곡 공부 대신 나랑 대화를 해주려는지 지구가 의자에 앉는 대신 이쪽으로 걸어와 내 옆에 자연스럽게 누웠다. 이제 나란히 눕는 게 제법 익숙해졌다.

“요즘 많이 힘드신 것 같아요.”

“다들 그렇잖아.”

“형이 유독요.”

유독 나에게 시련이 연속으로 닥쳤던 건 사실이긴 했다. 절로 입 밖으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온몸이 눅진한 피곤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다 괜찮아질 거예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놨던 손이 살짝 잡혔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가락을 조금 더 움직여 깍지를 꼈다.

“형.”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지구가 몸을 옆으로 튼 건 순식간이었다.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 정도 거리에서 마주 본 게 처음은 아닌데 분위기가 좀 그랬다. 갑자기 공기가 확 어색해지는데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느 순간 뚝 끊긴 호흡에 잔뜩 긴장해서 굳어버린 몸을 살짝 움직이는 순간 얼굴이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어…….”

벌떡 일어나서는 천천히 웃는 얼굴이 심하게 어색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조용히 자기 침대로 돌아가는 걸 눈으로 따라가면서 한쪽 눈을 미세하게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좀 키스할 타이밍 아니었나?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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