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형.”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지구가 마이를 이쪽으로 건네줬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은 지구가, 다 풀려 힘없이 손에 들려있던 넥타이를 가져가 다시 바르게 묶어줬다. 그리고 등을 두 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촬영 다시 시작할게요.”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자마자 지구가 손을 뗐다. 항상 매주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묶인 넥타이가 옷을 스쳤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지구와 함께 앉은 팀원들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부터 다시 한 번만 춰보고 노래로 넘어갈게요.”
Mp3 파일을 찾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팀원들은 반주가 나오자마자 칼같이 동작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힘이 빡세게 들어간 상태로 발을 딱딱 맞추는 모습들을 보며 그래도 아까 그 한 번의 시범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지금 이 싸한 분위기도 한몫했을 테고.
“춤 연습은 계속해야 하는데, 일단 노래가 부족해서 도와줄 사람을 불렀어요.”
팀원들이 진심으로 대놓고 뭐라 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대본 자체가 불쾌했다. 그나마 팀원들이 자발적으로 한 소리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저게 스태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본이라는 게 더 어이가 없었다. 안 그래도 팀원들이 나를 언짢게 생각하고 있던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서 더더욱.
출연 제의는 본인들이 해놓고, 아이돌이라 좀 그렇다고? 내가 방금 거기서 화를 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형?”
“어. 어어.”
“일단 하이라이트만 다 같이 보면 될까요?”
“응, 너 편한 대로 봐줘.”
답답한 속을 달랠 수가 없는 상황이라 일단 생각을 다 떨쳐내기로 했다. 지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목소리 톤과 크기를 유지하며 팀원들을 가르쳤고, 팀원들은 아주 다행히도 한 마디 반발 없이 조용히 잘 따라왔다. 작은 지적 하나에도 고치겠다며 우렁차게 대답하는 게 몇 시간 전과 매우 달랐다.
“거기에서 숨 쉬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지구의 친절한 설명에도 암담한 노래 실력은 쉽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물을 마시며 악보 보랴, 일어서서 안무 정리하랴 다들 정신없이 움직이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정해진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조금 더 앉아있던 평소와 달리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멘토님 잠시만요.”
나가려던 내 발을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붙잡았다. 뒤돌아보니 평소 지적받을 때 빼고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재민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C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팀원이었다.
“그, 저희가 그동안 멘토님 못 믿고 계속 나가서 연습하고…….”
“…….”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진짜 이렇게 말로 할 줄은 몰랐다. 방금 그 몰카 대본은 아마 평소에 뒤에서 하던 소리와 별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도 그게 몰카라고는 조금도 예상을 못 했지.
“솔직히 아이돌…… 이셔서.”
“네.”
“저희가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요. 근데 아까 춤추시는 거 보니까……. 죄송합니다.”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푹 숙인 고개를 보면서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이렇게 나와서 굳이 사과를 해주는 걸 보니 정말 이해가 되긴 한 모양이었다. 뒤쪽에 엉거주춤 서 있던 팀원들도 살짝씩 고개를 숙였다.
딱히 고마울 일이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였다. 뭔가 인정받은 기분이라 그런가. 갑자기 방금 그 몰래카메라가 썩 나쁘진 않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덕분에 홧김에 증명은 했네.
“아니요, 이해해요. 앞으로 열심히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네.”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인사하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나란히 나와서 옆에 선 지구가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많이 힘드세요?”
“아니. 내가 힘들 게 뭐 있어.”
감정 소모를 평소보다 많이 하긴 했지만, 몸은 멀쩡했다. 근육통이 살짝 있긴 한데 이건 안무 연습 때문이지, 멘토 활동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힘든 건 너지. 괜히 불러서 미안.”
“아니에요.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닌데요.”
그냥 알아서 대충 가르쳤으면 됐을 텐데, 괜히 잘 연습하고 있던 애를 부른 게 미안했다. 그래서 이런 쪽팔린 몰카에 당하는 것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다시 생각하니까 또 황당해서 눈앞에 보이는 피디에게 걸어갔다.
“피디님.”
“네?”
“오늘 진행했던 멘토 몰카 말인데요. 그거 다른 멘토들한테도 하는 건가요?”
“아니요. 하현 씨한테만 단독으로 진행한 건데.”
그러니까 왜 나한테만 단독 진행을 하느냐고. 하기야 10년, 20년 차에게 이런 허접한 몰카를 시도하기에는 당연히 눈치가 보였을 게 뻔했다. 그에 비해 1년도 되지 않은 데다가 서바이벌 ID로 데뷔한 나는 딱 좋은 대상이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멘토에게 몰카를 하지 말라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송인지라 그냥 넘기기로 했다.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뒤돌아서 다시 지구에게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싼 지구가 매니저 형을 불렀다.
뭔가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어이없는 몰래카메라, 거기에 욱해서 시범을 보여주고, 팀원들에게 인정받고. 뭔가 이상한 순서라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한참 혼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동안 지구는 말을 거는 대신 조용히 창문에 기댄 내 머리를 감싸서 마음대로 자기 어깨 위에 올려놨다.
옷을 갈아입고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계속 연습만 했다. 뭔가 확실하게 보여주려면 지금까지 해온 것만 믿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몸이 멈춘 건 좀 쉬라며 지구가 뒤에서 끌어당겼을 때였다.
“일단 밥은 먹고 하세요.”
잔뜩 차오른 숨을 천천히 고르며 도시락을 받아드는데, 예준이 갑자기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셀카봉을 꺼내 들었다. 저런 걸 연습실에는 왜 들고 온 건지, 밥 먹는다니까 왜 갑자기 셀카를 찍으려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동안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연결했다.
“형 뭐 해요?”
“준이한테 전화하려고.”
그제야 셀카봉의 진짜 활용처를 알아챘다. 국제전화 비용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망설임 없이 예준이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형!
신호음이 들린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준이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높게 들어 올린 듯 화면에 담기는 풍경이 넓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처음 보는 외국인이 함께 있었다.
“마카롱은 샀어?”
-형 프랑스는 내일 간다니까요. 아, 맞다. 이쪽은 게스트하우스 주인 마르키오 씨.
“어……. 헬로?”
-저 평생 거기 안 가고 싶어요. 여기 너무 좋아요.
출국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준은 벌써 그룹을 떠난 사람 같았다. 게다가 띠동갑하고도 20년 정도 차이 나는 것 같은 게스트하우스 주인과는 또 언제 친해진 건지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하여간 친화력 하나는 최고라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걱정 없을 것 같았다.
-연습 중이었어요? 얼굴 엄청 빨가네.
“지금 밥 먹으려고.”
-여기 파스타 맛있는데. 부럽죠?
준은 이후로도 한참을 떠들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찍더니, 종내에는 휴대폰을 얼굴 바로 앞까지 끌어와서 신나게 얘기했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게 귀여워서 끊지도 못하고 있다 보니 밥을 다 먹고도 30분이나 휴대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열심히 연습하고 다음 주에 봐요.
드디어 손을 흔들면서 전화를 끊은 준에 예준이 팔을 두드리며 셀카봉을 내렸다. 대충 봐도 무겁게 생겼는데 30분이나 들고 있었으니 저릴 만도 했다.
“형들 다 보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특별히 개고생했다.”
그냥 어디 세워놓고 했으면 됐을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않아도 되는 걸 사서 고생한 예준이 셀프 칭찬을 하며 휴대폰을 셀카봉에서 빼냈다.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내일의 스케줄을 들었다. 준이가 없는 관계로 네 명이서 출연하게 된 예능이었다. 이미 많이 나간 것 같은데도 끊임없이 불러주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신기해하기도 전에 숙소에 도착했다.
웬일로 지구를 이기고 가위바위보에서 1등을 한 덕분에 제일 먼저 씻고 나와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것도 없는 흰 천장을 보니 다시 몰래카메라가 생각났다. 방송이 나가면 멘토 캐스팅 이해 안 된다는 말들도 많이 나올 텐데, 왜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그런 걸 주제로 실험 카메라를 했지. 두 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형.”
생각을 깨고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자마자 지구가 살짝 침대 위로 올라왔다. 막 씻고 나왔는지 옆으로 오자마자 왠지 모르게 시원한 느낌이 확 퍼졌다.
“아마 프로그램 화제성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자극적인 게 많이 나와야 시청률이 오르니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귀신같이 알아차린 지구가 몸을 더 움직여 가까이 다가왔다. 침대가 그리 넓지 않아서 금방 팔과 다리가 맞닿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안 쓰려고. 솔직히 경력이 너무 모자라는 건 맞으니까 예상도 하고 있었고…….”
“결국은 다들 인정하게 됐잖아요.”
불쑥 다가온 얼굴이 새삼 다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지구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세상 그 어떤 일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저 얼굴과 표정은 완벽하게 내 편이었다.
“적어도 저한테는 항상 최고예요.”
“…….”
“오늘 진짜 멋졌어요.”
침대 헤드에 기대서 앉아있는 그 상태로 팔을 뻗은 지구가 조용히 몸을 끌어안았다. 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빈틈없이 맞닿았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좋은 냄새도 훅 다가왔다. 살짝 젖은 머리에서 달달한 샴푸 냄새가 나고 몸에서는 시원한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아까부터 쭉 안고 싶었어요. 형이 춤출 때부터, 다리에 힘 풀릴 정도로 연습할 때도. 지금까지.”
지구는 말을 할 때 항상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 하는 말도 오래 고른 말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대꾸할 말을 찾기 위해 살짝 벌어졌던 입술을 다물었다.
“감정 소모하느라 수고했어요.”
고민하는 틈에 입술에 뭐가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부드러운 감촉에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놨다. 코앞에 있는 얼굴은 변함없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지 정말 며칠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깊게 좋아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지구는 파고드는 속도가 빨랐다. 뒷걸음질 칠 틈을 안 주니까 앞으로 계속 걸어가기만 해서 그런가.
“응, 고마워.”
그 순간이 예뻐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고맙다는 말 이외에 또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그대로 볼을 붙잡고 입술을 가져다 댄 건 정말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냥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을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심장이 백 번은 더 뛴 것 같았다. 부끄러워서 제대로 눈을 마주치질 못하고 이불을 향해 시선을 내리는데, 지구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지구는 잠깐 당황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붉어진 귀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간질간질한 기분에 오늘 하루 느꼈던 그 어떤 불쾌감도 남지 않고 싹 증발해버렸다. 그대로 함께 누워서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혼자 자는 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