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67화 (67/130)

24화

“아…….”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주 본 눈이 멍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제외한 모든 게 정지된 채로 서 있던 지구는 말없이 떨어진 꽃다발을 뒤로하고 발을 움직여 이쪽으로 걸어왔다. 단정한 얼굴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심장 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부수고 귓가를 점령했다.

“형.”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짝 올려다본 얼굴은 놀란 것 같기도, 울컥한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은 지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아도 돼요?”

한참의 기다림 끝에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 물음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일단 울렁이는 저 눈만 봐도.

“응.”

짧은 대답이 나가자마자 지구의 팔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살짝. 그러면서도 절대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볼이 살짝 스쳤다. 내가 4cm 정도 작았던 것 같은데, 그사이에 더 큰 건지 생각보다 키 차이가 꽤 났다. 지구는 그 자세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운동장 앞쪽에 서 있던 세 명도 더는 이 학교에 미련이 없는지 차를 타고 교문을 빠져나갔다.

지구가 팔을 푼 건 그 이후로도 한참 뒤였다. 힘이 실린 듯하면서도 아프지 않게, 살며시 끌어안고 있던 팔이 풀리자 순간적으로 느껴지지 않던 추위가 다시 밀려왔다.

“고마워요.”

팔만 놓은 그 상태 그대로 지구가 중얼거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고마워요, 이렇게 말해줘서. 용기 내줘서.”

귓가에 나직하게 울리는 말들에 순간 울컥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을 한 것도, 용기를 낸 것도 쭉 너였잖아. 진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아서 팔을 들어 단단한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몸이 빈틈 하나 없이 맞붙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등을 감싸는 손을 느끼면서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파랬다. 눈이 아플 정도로 맑은 2월의 하늘,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힘을 주지 않은 약한 포옹. 바로 옆에서 숨소리가 느껴졌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정말 잘할게요.”

마지막으로 떨어진 말에 귓가에 무언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맞닿아 있어서 심장 소리가 훤히 들릴까 봐 겁이 났다. 내 귀에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 저쪽에서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런 애를 어디서 또 만나. 이미 넌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고 있는데. 문득 목이 막혀서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만 수십 번을 곱씹었다. 내가 진짜 잘해줘야겠구나.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이 꽤 많이 흐른 상태였다. 정말 못해도 30분은 지났을 거라고 확신했다. 타인의 품에 이렇게 안겨본 게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오래 안고 있으면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떨어지는 순간이 아쉬워서 스스로도 놀랐다.

“추우니까 일단 가요.”

어깨를 살짝 어루만진 뒤에 뒤돌아 걸어간 지구가 아까 떨어뜨렸던 꽃다발을 주워들고 소중하게 꽃잎에 떨어진 모래들을 털어냈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문득 저 멀리 날아간 졸업장이 눈에 걸렸다. 교문 밖까지 날아갔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급하게 다가가 졸업장을 주워들고 한 번 털어냈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케이스를 열어보니 반듯한 글씨가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모두 수료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졸업장 잘 챙겨야지.”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지구에게 고개를 숙인 채로 손만 뻗어 졸업장을 건넸다. 바람이 더 불었으면 학교 밖까지 날아갔겠다. 뒤늦게 밀려오는 열에 눈도 못 마주치고 괜히 작게 타박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손을 망설임 없이 감싸 쥐는 손이었다.

운동장 맨 끝에 서 있는 차까지 가는 건 썩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작 말할 때는 툭툭 잘 터져 나오더니 끝나고 나니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쑥스러움을 전부 몰아내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아니, 형들 대체 뭐 했어요?”

차 문을 열자마자 제로 게임을 하고 있었던 듯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던 준이 옆을 돌아보며 벌컥 화를 냈다. 기어 왔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터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3! 아, 그게 아니라 형들 뭐 했냐니까요. 예준이 형이 그냥 기다리라던데.”

“마지막으로 운동장 좀 돌았어.”

자연스러운 지구의 거짓말에 준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넘어갔다. 아, 하현이 형 모교라서 같이 추억 되돌아보기 같은 거 한 거예요? 그제야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게임을 그만둔 준이 손가락을 내리더니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왜 내려?”

“사진 찍어야죠.”

긴 다리로 폴짝 뛰어내린 준을 시작으로 줄줄이 차에서 내린 멤버들이 건물 앞 동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상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이곳저곳 벗겨진, 썩 좋지 않은 상태를 자랑했지만 크기만은 거대했다.

“자자, 주인공 가운데 서고.”

동상 중앙에 지구의 팔을 끌어 세운 예준이 나를 힐끔 바라봤다. 냉큼 오라는 눈빛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동상을 어루만지던 손을 떼고 지구 옆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가 섰다.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이 이상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빨리 웃어. 특히 주인공 꼭 웃어라.”

지구의 머리를 꾹 누르며 웃음을 강요한 예준이 매니저 형에게 찍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 추운 날씨에 패딩도 반 밖에 못 걸친 채로 매니저 형이 휴대폰을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케이 신호가 날아왔다.

다시 탑승한 차 안은 따뜻했다. 지정석인 창가 자리에 앉은 지구를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탔다. 차는 텅 빈 운동장을 마지막으로 빠져나갔다. 출발하자마자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 지구를 보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농장에 접속했다.

[농작물이 다 썩어버렸어요!]

들어가자마자 뜨는 암울한 검은색 창에 씁쓸하게 농장 청소를 시작한 지 30초. 고작 밀 몇 개 버려놓고 눈이 자꾸 왼쪽으로 돌아갔다. 간간이 감은 채로 움직이는 걸 보면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생각하고 있는 건지 눈은 계속 감고 있었다.

처음에는 깨끗한 피부에 감탄하면서 시작한 감상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조금 어려 보이긴 하는데, 또 절대 작지 않은 키나 단단한 몸을 보면 확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반년 전에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해보면 뼈대나 골격도 확 자라서 남자다운 느낌도 완연했다.

“형, 저 뚫려요.”

무려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터치하지 않은 액정이 꺼진 줄도 모르고 쳐다보는 내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챈 지구가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툭 말했다.

그제야 머쓱하게 시선을 아래로 돌려 휴대폰을 봤지만 이제 농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결국, 그대로 휴대폰을 꺼버린 내 손을 지구가 다시 살짝 잡아 왔다. 이 정도는 고백하기 이전에도 심심찮게 했던 일이었는데 관계의 변화 때문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길고 큰 손으로 내 손을 가볍게 감싸 쥔 지구가 다시 고개를 창문 쪽으로 기울였다. 아까 그 어쩔 줄 몰라 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평온해 보이는 얼굴만 남았다. 아까는 세상에서 제일 놀란 사람 같더니 저렇게 빨리 적응이 될 수가 있나. 내 심장은 아까 그 순간부터 아직까지도 진정을 못 한 것 같은데.

“하현아.”

“네?”

멍하게 정면을 쳐다보는 지구 얼굴을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던 중에 매니저 형이 나를 불렀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던 중에 귀에 선명하게 목소리가 박혀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현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너 이번에 고정 예능 잡혔는데.”

“저만요?”

“응.”

왜 또 나만 따로 부르지. 예능이라면 솔직히 준을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도 촬영장에 가면 뭐라도 해서 즐거움을 주고 싶은데 타고나게 재미없는 사람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멤버들이 있으면 옆에서 도와라도 주지, 혈혈단신으로 출연하는 건 마치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줬다.

“춤이 메인이라 너만 나가는 거야. 서바이벌 ID 끝나고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래.”

“뭐 하는 건데요?”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는데 넌 참가자가 아니라 멘토래.”

“……멘, 멘토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까지 버벅댔다. 내가 데뷔한 지 얼마나 됐더라. 손가락으로 세어보려고 했지만 한 달밖에 안 돼서 엄지손가락을 하나 접자마자 그만둬야 했다. 10년, 20년 차 댄스 가수들을 내버려 두고 나를 부르는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저 왜요?”

“얘네가 서바이벌 ID 같은 형식으로 데뷔하는 애들인가 봐. 퍼포먼스형 아이돌이라고 하던데 잘 모르겠다. 네가 비슷한 프로그램에서 데뷔했으니까 데려가는 것 같던데 그냥 춤 알려주고 앉아서 평가만 하면 된대.”

나보고 거기서 평가를 하라니, 데뷔 1개월 차 아이돌에게는 너무 과분한 자리였다. 물론 내 실력에 초점을 두고 부른 건 아닐 테지만.

“화제성 때문이겠지 뭐. 일단 한다고 할게. 계속 붙어서 코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촬영하면 된대.”

“아, 네.”

얼떨결에 대꾸하고 빳빳하게 세웠던 몸을 다시 시트에 파묻었다. 끝나고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라는 건 MSM에서 한다는 건데. 몸으로 뛰는 예능만 열심히 만들더니 한 번 서바이벌 ID가 잘되고 나니 이쪽에 취미가 붙었나 보다. 삼촌에게 연락해서 물어볼까 하다가 지금쯤 열대 지방에 있을 거라는 게 뒤늦게 떠올라서 관뒀다.

얼마 가지 않아 차가 멈춰 섰다. 내리자마자 발렛파킹을 위해 직원이 다가오는 것만 봐도 어지간한 음식점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을 보며 예준이 예약했겠거니 했더니 나오는 이름은 너무 예상 밖의 사람이었다.

“안태민으로 예약했는데요.”

무려 사장님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나만 놀란 게 아닌지 이름 석 자가 매니저 형의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다들 자연스럽게 당황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사장님이 마음껏 먹으라고 하시더라. 이걸로 결제하라고.”

내가 아는 사장님은 소속 가수 졸업식이라고 이런 곳을 예약해줄 사람이 아닌데. 카드를 내미는 매니저 형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 신나서 팔을 걷어붙이는 준을 보며 안 봐도 엄청 나오겠구나 싶었다.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 그만큼 먹자면서, 언제 힘들었는지 모를 멤버들이 메뉴판 하나에 다닥다닥 붙어 닥치는 대로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서로 안 보인다며 머리 좀 치우라고 난리 치는 와중에 조용히 구석에 있는 남은 메뉴판 하나를 집어 든 지구가 스테이크를 하나 고른 뒤에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오늘따라 극성이네 저거?”

한참 고기를 썰던 예준이 급하게 사레가 걸린 나에게 물을 건네주는 지구에게 한 말이었다. 분명히 자신에게 한 말임을 알고 있을 텐데도 지구는 못 들은 척 내 등을 계속 쓸어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형?”

예준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이상한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아니, 아까 돈 달라고 했을 때부터 알았을 것 같은데.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하는 매니저 형의 표정을 보아하니 상상 이상으로 긁힌 것 같았다. 본인 카드가 아닌 사장님의 카드인데도 내미는 손이 벌벌 떨렸다. 대체 얼마가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기로 했다. 그 퀄리티 떨어지고 비싼 굿즈들 팔고 번 돈만 생각해도 이 정도는 금전적으로 큰 타격이 아닐 게 확실했다.

차에 타자마자 준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오, 완전 맛있어요. 지구 형 내일 또 졸업하면 좋겠다.”

“나도.”

실없이 꺼낸 소리를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지구에 휘영이 당황한 듯 잡아당기던 안전벨트를 놓쳤다. 탁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준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형 왜 그래요. 형도 좋았어요? 근데 형은 스테이크 한 접시밖에 안 먹었잖아요.”

내일 또 졸업하고 싶다는 이유를 추리하는 준에게 지구가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 던졌다.

“졸업선물이 좋았어.”

“저거 꽃다발이요? 안 그래도 형 졸업선물 뭐 할지 고르고 있었는데 꽃다발 해줘요?”

졸업식은 아까 끝났는데 선물로 꽃다발을 주겠다며 뒤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어 꽃 취향을 묻는 준을 지구가 가볍게 밀어냈다. 오늘 준거라고는 꽃다발하고 스테이크 한 접시가 전부인데 졸업선물이 좋았다고 하는 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괜히 귀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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