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졸업식까지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활동이 끝나서 스케줄이 넉넉해진 덕분에 쉬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우리 숙소에 있는 고등학생 둘은 오랜만에 등교하기로 했다.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다녀오겠다며 책가방을 메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이는 어디 갔어?”
“잃어버렸어요!”
오랜만에 등교한다면서 저녁부터 붕붕 떠 있더니 대체 뭘 챙긴 건지 모를 꼴로 준이 황급히 돌아다녔다.
“넥타이도 없는 것 같은데?”
소파에 앉아서 휘영이 던진 말에 준이 목덜미를 더듬거리더니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 큰일 났다. 다 챙긴 줄 알았는데.”
체육복 상하의를 책가방 속에 구겨 넣은 준이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옷장을 열어젖혔다. 똑같은 트레이닝복이 다섯 개나 걸려있는 걸 보니 예준의 옷장이 틀림없었다. 준이 맨 위쪽 서랍을 열어서 넥타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예준이 형, 저 넥타이 좀 빌릴게요!”
“……그거 정장 넥타이인데?”
“비슷하게 생겼어요!”
무늬 하나 없이 새카만 넥타이를 들고 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예준이 알아서 하라며 허락까지 해줬는데, 이번에는 묶는 게 말썽이었다.
“이거 어떻게 묶어요?”
“그래, 교복 넥타이만 묶어본 네가 알리가.”
예준이 입을 꾹 다물고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는 준의 넥타이를 묶어주기 시작했는데 또 장난을 친 건지 꽉 묶지 말라고, 답답하다고 또 싸우고 난리다. 휘영은 이제 익숙해진 건지 자연스럽게 귀에 이어폰을 꽂으면서 침대에 엎드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 와중에 지구는 벌써 교복을 다 차려입고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방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에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지구는 신발장 옆 전신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조이고 있었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챙겨 입은 교복이 몸에 딱 맞았다. 그 옆모습을 잠깐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왜요?”
끝까지 올린 넥타이의 균형을 맞추며 지구가 물었다. 왜 쳐다보냐는 물음인 것 같았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식탁 옆에 놓여있는 책가방을 들어서 신발장 앞까지 가져다줬다.
“잘 갔다 와. 언제쯤 와?”
“단축이라 금방 올 거예요. 근데 회사 작업실 들렀다가 오려고요.”
“그, 전에 만들던 노래 때문에?”
음악 노트에 끄적이던 수많은 음표를 생각하며 물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때 그 가사가 생각났다. 지구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어 올리다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공중에서 손이 멈춰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가방 고리를 잡아 끌어올리며 지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그거 때문에요.”
굽혔던 무릎을 펴는 순간 시원한 향이 확 풍겼다. 섬유 탈취제를 교복 위에 뿌린 것 같았다. 다녀올게요. 바로 가방을 어깨에 멘 지구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구 형 갔어요? 진짜 소리 없이 가네.”
“너네가 시끄러워서 관심이 없었던 거지.”
“너네? 하현아 나는 형인데?”
“형이랑 하나로 묶이는 건 오히려 준이가 싫을 것 같은데요.”
딱 잘라서 말해줬더니 예준이 또 시끄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진짜 무서운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입만 열면 깨는 인간인 줄은.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결국, 엉망으로 묶인 준의 넥타이는 내가 다시 바로 매줬다. 예전에 몇 번 정장 입을 때 묶어본 기억을 떠올리며 얼추 모양을 잡고 손으로 잡아당겨서 똑바로 만들었다.
“진짜 교복 넥타이가 이렇게 생겼어?”
“비슷해요. 무늬 없고 검은색이고.”
“내가 보기에 선도부한테 무조건 걸릴 것 같은데.”
“에이, 이 시기에 선도부가 어디 서요.”
“우리 학교는 졸업식 전날까지 섰는데. 벌점 대신 청소하고.”
“어쩐지 지구 형이 열심히 입고 나가더라.”
한참 자신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떠들던 준은, 지구를 내려주고 돌아온 매니저의 호출에 가방을 메고 나갔다. 신나게 뛰어나가는 와중에 짧은 가방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사실 잔뜩 내려간 준의 가방보다 조용히 집을 나간 지구가 더 신경 쓰였다.
* * *
허술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졸업식도 순식간에 찾아왔다. 7시 반을 조금 넘겨서 일어났을 때쯤에는 옆 침대는 이미 비어 있었다. 먼저 등교한 듯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 위에 괜히 한 번 앉았다 일어나서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일어난 덕분에 느긋하게 씻고 나머지 멤버들을 깨웠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순으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세 명을 느긋하게 구경하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을 열었다. 화려한 걸 싫어하고 편한 걸 좋아하는 옷 취향은 옷장을 아주 특색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졸업식이라 신경 쓰겠다고 사서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새 코트를 집어 드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형!”
“왜?”
“졸업식에 우리 사진 찍히고 그래요? 기자분들 오시지 않아요?”
“우리 학교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 안 돼. 인터뷰도 안 돼.”
“와, 다행이다. 대충 입어야지.”
사진 찍힌다는 생각에 들뜬 줄 알았더니 편하게 입고 싶어서였던 모양이다. 바로 방으로 튀어가는 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 옆에 서려면 나도 단정해야지.
매니저 형의 차에 타서 한국예고까지 이동하는 동안 대화 주제는 예준의 옷이었다. 졸업식 가는데 무슨 주주총회 가는 사람처럼 정장을 입고 나온 탓이었다. 심지어 손목에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까지 찼다.
“형은 무슨 옷이…… 우리 지금 어디 가는지 알아요?”
“트레이닝복을 입고 올 수는 없잖아.”
“제발 중간도 좀 사요.”
정장 아니면 트레이닝복 밖에 없는 예준의 독보적인 스타일에 박수를 보내는 동안 차가 학교 앞 꽃집에 섰다. 9시 3분이니까 지금 막 오픈했을 터였다. 졸업식은 10시부터 시작이라 시간은 넉넉했다.
“같이 내려줘?”
차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는데 뒷자리에서 예준이 물었다. 내가 지구랑 같이 있지 않으면 혼자 어딜 잘 못 돌아다니는 걸 멤버들도 다 알고 있었다. 휘영이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길래 그냥 됐다고 거절하고 밖으로 나가 바로 꽃집 문을 열었다.
“어머……!”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이 마주친 주인이 입을 가리며 탄성을 질렀다. 그제야 마스크도 안 끼고 당당하게 꽃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꽃집 안에는 방금 막 오픈했음에도 벌써 부모님으로 보이는 분들이 네 분 계셨는데 그중에 세 분이 나를 알아보셨다.
“어어, 그 TV 나오는 연예인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이번에 졸업하는 딸이 내 팬이라는 말에 즉석에서 사인을 한 장 해드리기로 했다.
“따님 성함이.”
“김승아요.”
[To. 승아 씨. 졸업 축하하고 항상 힘내요.]
빠르게 사인을 마치고 돌려드렸더니 기쁜 표정으로 꽃다발을 들고 나가셨다. 수수하지만 빽빽한 꽃다발을 보는 표정만 봐도 딸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았다.
“아, 저 꽃다발 받으러 오셨어요?”
뒤늦게 주인이 이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미리 예약받은 꽃다발들이 쭉 놓여있는 진열대에서 서성거리다가 주인이 내미는 명단을 받아들고 휴대폰 번호 뒷자리를 찾았다.
“5762요.”
“5762요? 잠시만요.”
명단에서 내 번호를 찾아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지갑에서 카드를 찾아 꺼냈다. 계산을 기다리면서 뻐근한 목을 풀고 있는데, 진열대에서 꽃다발을 찾아오던 주인이 고개를 내밀더니 물었다.
“이거 맞으세요?”
주인의 손에 이끌려 진열대 밖으로 나온 꽃다발은 내가 주문한 게 맞았다. 실제로 보니까 색감이 시릴 정도로 예뻐서 잠깐 정신 놓고 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다 만들었다며 완성 사진을 보내줬던 것도 딱 저거였으니까.
“자녀분 꽃다발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내 얼굴과 꽃다발을 한 번씩 힐끔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자녀분이라는 말에 부정도 안 하고 그냥 말 돌렸었구나. 어색하게 웃으면서 뒤늦게 말을 고쳤다.
“같은 그룹 멤버 졸업식이에요.”
“아, 오늘 지구 졸업하는 거예요?”
“아시네요?”
“서바이벌 ID 안 본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제 친구가 지구 투표해달라고 엄청 졸랐거든요. 근데 그 졸업 꽃다발을 제가 만들었다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서비스로 몇 송이 더 넣었어요.”
조용히 미소 지은 주인이 꽃다발을 넘겼다. 품 안에 가득 안기는 꽃다발을 쥐고 한참 쳐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가 긁히는 동안 순간 꽃다발에서 지구 얼굴이 보였다. 피부가 하얀 편이니까 이거 들고 서 있으면 잘 어울리겠다.
계산이 끝났는지 주인이 카드를 건네며 조용히 한마디 했다.
“전화번호는 걱정하지 마세요. 고객 정보는 주문 끝나면 다 삭제해요.”
그건 생각 못했는데. 배려해준 게 고마워서 고개를 한 번 크게 숙여 보인 다음에 꽃다발을 안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차에 다시 타자마자 바로 학교 운동장에 도착해서 내려야 했다.
학생들은 전부 학교 안이나 강당에 있어서 운동장은 비교적 한산했다. 우리처럼 조금 일찍 온 학부모들이 차를 세워놓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우리도 조용히 발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오는데도 구조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4층 전체가 강당이었고, 각 층에 있는 교실들은 하나같이 소란스러웠다. 처음 와보는 학교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준이 나를 툭툭 쳤다.
“형 여기 다녔죠?”
“응.”
“그럼 화장실 어디인지 알아요?”
준이 멋쩍게 웃으며 화장실을 찾았다. H자 구조로 되어 있는 복도를 설명하면서 그 사이에 있을 거라고 설명해주니 준이 다리에 모터 달린 사람처럼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졸업식 시작되기 전에 한 번 갔다 와야겠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뛰어가는 준을 따라가는 예준에 이어서 목이 마르다는 휘영에게 급수실까지 알려줬다. 반대쪽 복도 정수기 옆에 있어.
세 사람을 다 따로 보내놓으니 코앞에 있는 실용무용과 3학년 1반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선생님들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교실 안에서 뭘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졸업식 날이면 저럴 만도 하지.
“너 하현이니?”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대체 뭘 하는지 궁금해질 때쯤에 뒤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이 이 학교에 남아 있었나 싶어 뒤를 돌았을 때 보인 건 담임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 졸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했지만 정말 변한 곳이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졸업식 보러 왔니?”
손에 들린 출석부를 보니 여기 3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을 맡은 것 같았다. 저 교실 안에도 입시 실패한 학생이 있겠지. 갑자기 떠오르는 옛날 생각에 또 머리가 뜨끈뜨끈해졌다.
“데뷔한 건 봤어. 애들 사이에서도 소식이 없어서 아예 춤 그만둔 줄 알고 놀랐지 뭐냐.”
수능 최저 등급 맞춰서 아무 과라도 가라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났다. 한 번 품을 떠난 학생은 선생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제자가 성공할 먼 미래는 자신과 관계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네가 잘 일어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상담할 때마다 말없이 앉아만 있더니.”
“저한테 이제 와서 이러면 교장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하셔서요.”
“어…… 그때는 그랬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다 흘린 줄 알았는데 한 번 입을 여니까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한국예고라는 이 공간에 발을 들여서인지 아니면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 봐서인지.
“그때는 네가 딱히 목표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성공할 줄은 알았다.”
자율 연습 시간이 끝나고 나서 꽤 늦은 시간에,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면서 피곤한 낯으로 나를 불러놓고 미간을 찡그린 채로 한숨을 쉬던 것만 기억났다.
정말 성공할 줄 알았을까? 만약 삼촌 부탁으로 서바이벌 ID에 나가지 않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집에 박혀 있었을 텐데.
이제 더 이상 학생도 아니고, 원하던 대로 무대에도 서고 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대학 합격으로 가질 수 없는 더 값진 인생을 살고 있으니 이제 과거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네. 학생들 기다리니까 들어가 보세요.”
“잠깐만. 이렇게 온 김에 사인 한 장 받자.”
출석부에 끼어있던 종이와 펜을 건네는 담임 선생님을 보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여유롭게 사인을 하면서 괜히 이름 옆에 별도 두 개 그렸다. 예쁘게 잘 그려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온종일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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