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62화 (62/130)

19화

활동기간이 끝났다고 갑자기 스케줄이 증발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1월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음악 방송에 나가지 않는 대신 CF 촬영이 갑자기 밀려들었고 중간에 해외도 나갔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건 아니었지만 출국하는 길에 많은 사람이 보러 오는 건 처음이었지만 지구가 잘 끌고 가줘서 어찌어찌 잘 타고왔다.

그리고 오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와…… 피곤하다. 하현아 너도 먹을래?”

“넌 아침부터 뭘 먹는 거야.”

뭘 먹으라는 건가 해서 봤더니 한국에서 가져온 브라우니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 있었다. 공연장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이 2인실이라 뽑기로 휘영과 룸메이트가 된 지 3일이 지났다. 휘영은 볼 때마다 그 시간대에 먹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음식들을 자꾸 먹었다. 새벽 3시에 치즈 그라탕도 먹더라.

“이거 맛있는데?”

“일어난 지 5분 됐거든. 너 많이 먹어.”

보기만 해도 치아가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쟤는 바싹 마른 입안에 저게 들어가나 싶어서 계속 쳐다보는데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길래 그냥 한 번 웃고 말았다. 본인이 행복하다는데 뭐 어때.

이번 매니저 형은 저렇게 열심히 군것질해도 음식을 뺏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배가 조금이라도 나올 기미가 보이면 바로 헬스를 끊어버리겠다고 했지만.

“오늘 입국하는 거지?”

“응. 11시 비행기.”

“많이 남았네.”

7시를 겨우 넘긴 시간을 확인하며 휘영이 눈을 한 번 비볐다. 대충 바닥에 널려있는 옷가지를 주워 가방에 담다가 문득 든 생각에 휴대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했다. 1월 31일이면.

“내일 준이 생일인데?”

“진짜?”

쿨럭쿨럭. 먹다 말고 입을 여는 바람에 목에 사레가 들렸는지 컥컥대는 휘영에게 우유를 따라 건네주고 한참 고민했다.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내일이었네. 자기 생일을 한 일주일 전부터 강조하고 다닐 줄 알았는데 어제까지도 아무 말 없었다.

“파티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근데 뭐 줘야 되지?”

생일이면 선물을 줘야 할 텐데. 준이 인터뷰할 때마다 단골 멘트처럼 늘어놨던 것들을 떠올려봤다. 만화 읽는 것도 좋아하고 게임도 좋아한다고 했는데 정작 하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냥 휴대폰을 하나 사줄까?”

“컥. 누가 생일선물로 휴대폰을 바꿔줘. 하현이 너 우리 몰래 혼자 정산받았어?”

“아니, 통장에 있으니까.”

“준이 열여덟이거든. 거기 맞춰서 생각해.”

아, 그런가. 잠시 고민해봤지만 역시 학생한테는 현금이 최고라는 결론이 나왔다. 학생 때 생일선물은 줄곧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었는데 그거만큼 실용적인 선물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 정성 없어 보이겠지 싶어 인터넷에 고등학생 생일선물을 검색해봤다.

[고등학생이요? 한창 공부할 때니까 문제집 세트로 사주세요. 똑똑해지는 더잘X 문제집 추천드립니다]

아마 생일선물로 문제집 세트를 사주면 일주일 정도는 냉전 상태가 될 게 확실했다. 몇 개 더 찾아봤지만 도움이 되는 글은 하나도 없어서 결국 휴대폰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 준이한테 좀 갔다 올게.”

“뭐 하려고?”

“좀 떠보려고. 근데 얘 눈치 백 단이라 물어보면 바로 눈치채겠지?”

“그럼 그냥 물어봐. 뭐 갖고 싶냐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휘영의 말에 귀 기울이며 발에 슬리퍼를 끼우고 문을 열었다.

실내인데도 날씨가 아직 쌀쌀했다. 반대쪽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준의 방까지 가려면 꽤 멀었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양옆과 뒤쪽을 계속 살폈다. 이 층에서 머무는 사람들은 다 함께 공연한 연예인들이고 든든한 경호원들이 계속 지키고 있겠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거의 질주하다시피 해서 준의 방 앞까지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숨을 채 몰아쉬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준 대신 지구가 나왔다. 완벽하게 마르지 않은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눈앞에서 흔들렸다.

“형 무슨 일이세요?”

“준이 방에 없어?”

“지금 씻고 있어요.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이따가 다시 오겠다고 돌아가기에는 두 번은 뛰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손목을 살짝 잡아 끌어당기는 지구의 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방을 쭉 둘러봤다. 우리 방과 다르게 막 들어온 것처럼 깨끗했다. 준의 옷이 차곡차곡 접혀서 침대 옆에 놓여있는 걸 보니 백 퍼센트 지구가 정리했구나 싶었다.

“뛰어오셨어요?”

“조금.”

뭐 하러 호텔 복도에서 뛰어왔냐고 묻지 않고 지구가 조용히 컵에 물을 따랐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에 한참 입술을 담그고 가만히 있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헐, 형 언제 왔어요?”

“바지 좀 입고 나와.”

“잠깐만요.”

속옷만 입고 밖으로 걸어 나오던 준이 다시 얌전히 욕실로 들어가더니 편해 보이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다시 나왔다. 그때까지도 목구멍으로 물을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준아,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형, 생일선물은 물어보고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럼 문제집 세트로 사고.”

“와, 그건 안 받을래요.”

준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 요즘 문제집 가격이 얼마나 비싼데. 물론 당사자가 싫어하는 선물을 굳이 줄 생각은 없었다.

“근데 내 생일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생일도 모르겠냐. 그래서 뭐 갖고 싶은데?”

준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손을 잠깐 멈췄다.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고 있는데 지구가 내 옆 의자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생각이 난 듯 준이 말했다.

“케이크요. 엄청 큰 거.”

“그거면 돼?”

“네. 근데 진짜 큰 거였으면 좋겠어요. 초코맛으로, 막 이만한.”

구체적인 크기를 설정해주려는지 준이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말만 들어서는 뭐 거의 5단 케이크쯤 되는 줄 알았는데 정작 준이 그린 동그라미는 썩 크지 않았다. 그냥 브랜드 빵집에서 3만 원짜리 두 개 정도 사면 얼추 맞을 것 같은 크기다.

보통 케이크는 기본으로 깔고 가고 생일선물은 따로 사달라고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걸 물어보기에는 눈치라는 게 존재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일선물도 뭐 하나 새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물컵을 다시 집어 들었다. 물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지구에게 몸을 기댔다가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몸을 수직으로 원상복구 시켰다. 몇 주 붙어 다녔다고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기댔나.

혼자 얼굴을 조용히 쓸어내리면서 남아있는 물을 전부 원샷 했다. 계속 이렇게 두루뭉술한 상태에서 붙어 다니는 건 정말 누가 봐도 민폐가 아닌가. 확실히 해주지 않는 게 미안하면서도 지금 지구랑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불안해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누가 봐도 이기적인 마음이 맞는데 이걸 놓을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한 대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일 생일파티 하자.”

그래서 일단 모르는 척 준의 생일에만 생각을 집중하기로 했다.

* * *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머지 멤버들과 모여 케이크를 주문 제작하러 갔다. 누가 봐도 내 몸값 비싸요, 하고 자랑하고 있는 케이크들을 보며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파티시에님과 긴 대화를 나눴다. 최대한 사소한 디테일까지 말해주는 게 만들기 더 쉽다고 하시길래 그림까지 그려가며 한참을 고전했다.

“딸기를 이만큼 올려서…… 너무 많나요?”

“개수는 상관없어요. 이렇게 위쪽에 올리고 사이사이 크림 넣으면 될 것 같은데.”

“마카롱도 몇 개 꽂아주세요.”

“생일이신 분이 마카롱도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요. 제가 좋아하는데요.”

당당하게 본인의 취향임을 강조하는 예준에 파티시에님이 ”아… 네.” 하고 말을 아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어쩌다가 5단 케이크가 돼버렸다.

“이 정도면 행사용이네요. 보통 웨딩 케이크도 3단으로 하시는데.”

내일 5시쯤에 찾으러 오라는 말에 계산하려는데 예준이 당당하게 본인 카드를 꺼내 들길래 손을 눌러 다시 지갑에 꽂아줬다.

“나눠서 내요.”

“이거 뭐 얼마나 한다고.”

“형 돈 많은 거 다 알거든요?”

게임에만 3천만 원 지른 사람이 몇십만 원이 비싸 보일 리 없겠지만 다 같이 뜯어말려서 결국 나눠서 내기로 했다.

주문을 끝내고 나와서 매니저 형과 함께 가게에 들러서 게임기까지 하나 장만했다. 닌텐도 하던 시절에는 게임기가 별로 안 비쌌던 것 같은데 가격이 어마어마하더라.

숙소에 도착했을 때 준은 이미 침대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자정 5분 전에 알림을 맞춰두고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앉았다. 게임기가 담긴 박스는 우리 방문 뒤에 놔뒀으니 굳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그냥 컴퓨터를 살 걸 그랬나?”

“얘들아 형 생일도 한 달 남았어.”

“형 생일보다는 지구 졸업식이 앞인 것 같은데.”

옆에서 본인 생일을 슬쩍 홍보하는 예준에게 툭 던지는 휘영의 말에 퍼뜩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지구가 올해 스물이었지. 순간적으로 준의 생일이 머릿속에서 확 밀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재빨리 생각을 털어냈다. 아니다, 이거 아니다.

각자 할 일을 하다 보니 자정은 금방 찾아왔다. 울리기 시작한 알림을 끄고 정확히 11시 58분에 준을 흔들어 깨웠다. 형들 네 명이 같이 깨우는데도 눈만 비비고 누워 있는 동안 12시가 돼버려서 결국 그냥 누워 있는 그 상태로 네 명이 동시에 생일 축하를 했다.

“생일 축하하고, 쑥쑥 크고.”

“얘 더 크면 형보다 커져요.”

“그건 안 되겠다. 최장신은 내 자리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와. 우리 그룹 서열은 어떻게 돼먹은 거야.”

“뭐 물어요, 형이 맨 밑인데.”

예준이 다들 알고 본인만 모르는 그룹 내 서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동안 준은 잠이 다 깼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상태였다.

“뭘 딱 자정에 해주고 그래요…….”

“원래 생일 축하는 자정이야.”

“고마워요. 형들 다.”

그냥 작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한 준이 그제야 비척비척 침대에서 나왔다. 긴 다리를 휘적이며 거실로 나간 준은 바로 과자 한 봉지를 뜯어 먹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공식 카페에는 벌써 회사에서 올린 생일 축하 글이 올라간 상태였다.

“저 지금 사진 찍어서 올려도 돼요?”

“뭐한 게 있다고. 이따 생일 파티해줄 테니까 그때 찍어.”

오늘은 일 년에 하루뿐인 날이니까 잠을 자지 않겠다며 준은 그렇게 뜬 눈으로 새벽을 보냈다. 생일이라고 스케줄을 빼준 매니저 형 덕분에 온종일 시간이 넉넉했는데도 준은 밖으로 나가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마스크로 다 가리고 나가면 괜찮으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는데도 준은 됐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대망의 다섯 시 반, 케이크를 찾아오겠다며 나갔던 예준과 휘영이 초인종을 눌렀다. 왜 안 들어오고 초인종을 누르냐며 준이 투덜거리며 일어나는 걸 잡아 누르고 눈을 가렸다.

“형 왜 이래요. 선물이라도 들어와요?”

“응.”

준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천천히 하세요.”하고 배려까지 해줬다. 이거 감동 하나 안 받는 거 아닌가.

케이크 사이즈가 엄청나서 매니저 형까지 합세해서 거의 끌고 들어와 거실 중앙에 내려놨다. 완성품은 그림보다 훨씬 근사했다.

케이크 세팅이 끝나자마자 준의 눈을 가렸던 손을 떼줬다. 그리고 감동 하나 안 받을 거라는 예상은 와장창 깨졌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애가 케이크를 보자마자 갑자기 울기 시작해서였다.

“야, 야. 야. 갑자기 왜 울어.”

“디자인 다시 해올까?”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예준이 장난스럽게 물은 말에 준은 고개를 앙쪽으로 저으며 격하게 부정을 표시했다.

“진짜 이만한 거 달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훌쩍거리며 하는 말에 휘영이 조용히 등을 토닥였다. 시간이 지나도 진정될 기미가 안 보이길래 일단 인증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겠냐며 지구가 준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 말에 혹한 듯 준이 겨우 눈물을 그치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발갛게 부은 눈으로 혼자 사진을 찍을 줄 알았던 준은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왜.”

“그럼 주인공 혼자 쓸쓸하게 찍어서 올리라는 거예요?”

괜히 머쓱해서 버럭 소리치는 준의 옆에 다들 웃으면서 자리를 잡았다. 하나, 둘, 셋도 하지 않고 무작정 촬영 버튼을 눌러버린 준을 예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구박했다.

“넌 셋도 안 세냐?”

“생일인 사람한테 화내는 거 아니에요.”

“알았어.”

지구가 방 안에서 게임기를 끌어오는 동안 휘영은 능숙하게 케이크를 잘랐다. 커서 다 먹을 수는 있을지 의심스러운 크기의 케이크를 보는 준의 눈이 울렁거렸다. 얘 또 우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공식 카페에 글을 쓰려는 애 옆에 붙어서 쉴 새 없이 말을 시켰다.

“저거 게임기 보여? 저거 네 선물인데.”

“아, 저건 또 뭐예요…….”

웃으면서 타박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건 확실했다. 휘영이 그냥 맨 위층 케이크를 들더니 커다란 그릇에 바로 담아서 준에게 건넸다.

“저 이만한 거 처음 먹어봐요.”

“너 다 줄 테니까 다 먹어.”

“다 못 먹어요. 남은 건 그냥 형들 먹어요.”

작게 잘린 케이크 한 조각을 받아 입안에 넣으니까 살살 녹았다. 케이크 싫어하는데 확실히 비싼 이유가 있긴 하구나. 몇 입 먹다 보니 좀 달아서 우유를 가지러 가려는데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눈앞에 불쑥 컵이 들이밀어 졌다.

“입 안 댔으니까 드세요.”

회사에서 다음 굿즈로 내면 어떻겠냐고 했던 촌스러운 노란색 머그컵에서 우유가 찰랑이고 있었다. 상품 가치가 조금도 없는 디자인에 새삼 한숨이 나왔다. 이건 진짜 결사반대해야겠다.

2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