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60화 (60/130)

18화

급하게 다시 사인회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한창이었다. 준이 마이크를 쥐고 팬들에게 뭐라 뭐라 말하는 걸 보면서 쭉 한 번 훑었다. 흰 마스크, 뿔테 안경. 200명이 한 번에 눈에 담기는 위치였는데도 아까 봤던 그 착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현이 형 왔네요. 형 노래도 한 번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불러줘! 불러줘!”

아직 안 돌아왔나. 그대로 집에 갔으려나?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이곳저곳 눈으로 훑는데 준이 어깨를 툭 쳤다.

“하현이 형.”

“어?”

“해몽 첫 부분 한 소절 불러주세요.”

그제야 팬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마이크를 받아들고 미흡한 실력으로 한 소절을 조용히 불렀다. 썩 뛰어난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팬들은 무반주도 좋다며 열렬한 환호를 보내줬다. 아까 화장실에서 사생팬을 보지만 않았어도 기분 좋게 웃으면서 대답했을 텐데 지금은 불안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형 왜 그러세요.”

“어?”

“식은땀이…….”

어쩐지 귓가에서 쿵쿵 소리가 자꾸 울린다 했더니 상상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구가 옆에 있던 손수건을 들어 땀을 닦아주더니 다시 한번 되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냐, 잠깐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매니저를 찾았다. 구석에서 스태프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매니저를 부르자 뒤를 휙 돌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가서 앉아 있어야지. 왜?”

“매니저 형, 저 그게. 팬이 화장실에 따라 들어와서요.”

“팬이? 여기 있는 팬?”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인지 짜증스럽던 표정이 갑자기 확 변했다.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이야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길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문 뒤에 여자가 서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휴대폰을 들고 이쪽을 찍고 있었다. 여기까지 말을 끝냈더니 매니저가 놀라서 소리쳤다.

“너 볼일 보고 있는 걸 찍었다고?”

“그건 아니요. 저 손만 씻었어요.”

“이거 확실하네. 기다려봐, 정확히 팬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지?”

“네.”

“CCTV 돌려봐야겠네. 일단 조용히 가서 사인 계속해. 이거 일 커지면 내 책임인데.”

어차피 해고되는 마당에 책임까지 물고 가고 싶지는 않은지 매니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쪽 복도에 CCTV 있죠?”

건물 측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매니저가 뒤쪽 비상계단으로 자취를 감췄다. 다시 돌아가자마자 사인회가 시작됐지만, 어디에도 아까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봐요?”

“아, 죄송합니다.”

결국 허공을 쳐다보다가 다시 이어진 줄의 첫 번째 팬이 눈앞에 손을 흔드는 바람에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시 사인에 집중했다. 쉴 새 없이 넘어오는 팬들과 정신없이 대화하다 보니 의식하고 있던 게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스무 명쯤 상대했을 때쯤에는 심장도 잠잠해졌다.

“혹시 데뷔 서포트 잘 받았어요?”

“네? 아아. 네. 잘 받았어요.”

“그거 제가 준비한 거거든요. 다른 팬들이랑 같이 고른 건데 물건 마음에 들어요?”

고작 200명밖에 안 되는데 온갖 팬들은 다 모인 듯 데뷔 서포트 총대를 멨던 사람까지 등장했다. 당연히 고마운 일인데 마음에 드냐고 묻길래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다 좋았어요. 그거 준비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진짜 감사해요.”

“마음에 들었으면 됐어요. 하현이 마음에 안 들까 봐 옷 고를 때 노심초사했는데…… 다 풀어봤어요? 아, 바빠서 아직 다 못 봤으려나?”

“아니에요, 다 봤어요. 그 제 이니셜 박힌 인이어도 봤고.”

“헉. 바쁜데도 그걸 다 뜯어 봤어요? 누가 봐도 하현이 거인 거 티 팍팍 나게 하려고 달도 넣었는데 마음에 들어요?”

“엄청요.”

팬은 만족한다는 말에 뿌듯한 얼굴로 계속 웃으며 있다가 손을 흔들어줬다. 달랑 받기만 했을 뿐인데 받은 선물을 풀어보는 당연한 행동에도 팬은 미안할 정도로 고마워했다. 정성을 담아서 준비해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닌가. 옆으로 넘어가는 팬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고 다음 팬을 향해 웃었다.

“편의점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음식이요?”

“준이는 고기류 다 좋아한다던데 하현이는 편식 많이 한다면서요. 못 먹는 건 굴이랑 채소 빼고 없어요? 인스턴트도 빼고.”

내가 채소 싫어한다고 어디서 말했더라? 식습관을 놀라울 정도로 꿰고 있는 팬이 신기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건 죄다 편의점 음식이었다.

“굳이 뽑으면 돈가스……?”

“돈가스.”

준비해온 수첩에 볼펜으로 돈가스를 적던 팬이 포스트잇을 하나 내밀었다. 흔하지 않은 꽃 모양 포스트잇에는 선택형 문제가 가득했다. 짜장면, 짬뽕…… 은 짜장면. 마지막 문제인 삼각김밥이랑 컵라면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약간 고민을 했다.

“하현이 형은 약간 자기가 어른인 줄 알아요.”

“너 내 뒷담화 하냐?”

“아니, 팬분이 물어보셔서.”

마지막 문제에서 결국 삼각김밥의 손을 들어주던 중에 옆에서 욕이 들렸다. 스물 넘었으면 어른 맞잖아. 다 고른 포스트잇을 팬의 손에 쥐여주면서 인사를 하는데 준의 앞에 서 있던 팬이 인사도 없이 바로 옆으로 넘어왔다.

“오빠.”

“네?”

“눈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돼요?”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초면에 인사도 없이 이런 말을 불쑥 꺼내는 팬은 처음이라 일단 웃으면서 장난식으로 대꾸했다.

“눈이 아파해서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살짝 손만 대는 건요?”

아래로 뚝 떨어지려는 입꼬리를 겨우 붙잡았다. 팬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점점 더 구체화됐다.

“살짝 닿기만 하고 바로 떼도 안 돼요? 속눈썹은요?”

이상한 소리만 줄줄 늘어놓는 탓에 눈앞에 있는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저 여기 빚져서 앨범 사고 온 건데 한 번만요.”

갑자기 뻗어오는 손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뒤로 빼는 순간, 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옆에서 팬과 대화하고 있던 지구가 다가오던 손을 잡은 상태로 조용히 입을 뗐다.

“……뭐 하시는 거예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시끌시끌한 주변을 가르고 나왔다. 앞에서 지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팬도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고 상황을 인지한 듯 바로 뒤에서 대기하던 스태프가 다가왔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다급하게 묻는 스태프에게 팬이 잡힌 손을 거칠게 빼내며 대꾸했다.

“그냥 장난이었는데.”

“동의도 안 구하고 무작정 손 뻗어서 눈을 만지려고 하는 게 장난이에요?”

냉랭한 목소리가 딱딱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스태프가 옆에 있던 다른 스태프를 데려와 팬을 끌어냈고, 마침 사인회장 안으로 들어오던 매니저가 갑자기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복도에 CCTV 쫙 깔려 있거든? 너 화장실에서 나온 거, 패딩 벗는 것도 다 찍혔어.”

급하게 뛰어왔는지 매니저가 팬의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쩐지 느낌이 묘하더니 동일인물이었나. 그 잠깐 사이에 뭘 얼마나 바꾼 건지 길게 허리까지 내려와 있던 머리는 질끈 높게 묶여 있었고 아까는 뒤로 넘겼던 건지 앞머리도 생긴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여자가 스태프들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가고도 진정이 되질 않아서 애꿎은 펜을 몇 번이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지만, 사인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도 거의 백 명 가까이 되는 팬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눴고 그 수많은 팬 중 단 한 명도 아까 있었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계속 진정이 안 돼서 한 명이 지날 때마다 한 모금씩 물을 마셨다.

“팬들이 응원하고 있으니까 항상 힘냈으면 좋겠어요.”

“감사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레브가 최고니까요.”

내 눈치를 보면서 끝까지 응원의 말을 건넨 마지막 팬을 물끄러미 보다가 웃었다. 감사하다는 말만 세 번씩 반복하고 마지막에 손을 맞잡았다. 지구까지 지난 마지막 팬이 밑으로 내려가고,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고, 나가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줄 때까지 정신이 반쯤 빠져나가 있었다.

“형. 간대요…….”

팬들이 다 빠져나가자 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텅 빈 팬 사인회장에서 멤버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만, 나 화장실 좀.”

물을 너무 마셨더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덜컹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 빠르게 아까 갔던 화장실 쪽으로 뛰었다. 그리고 닫힌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매니저가 데려갔으니 당연히 없을 텐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참 문을 쳐다보고 서 있는데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문을 열었다.

“들어가세요. 여기 서 있을 테니까.”

놀라기도 전에 지구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평소처럼 조곤조곤하긴 했지만 절대 부드럽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일단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눈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돼요?’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면서도 머릿속에서 상황이 떠나질 않았다. 악의 없이 물어보는 것 같은 목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오늘이 이렇게 지나간다고 해서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덮고 그 위에 계속 덧칠을 해나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같이 차로 돌아갔을 때 매니저는 운전하면서 구구절절 설명했다.

“얘기하다 보니까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더라.”

손 씻는 사진을 휴대폰에서 발견해서 경찰에 넘겼다고 했다. 매니저가 얼마나 일처리를 제대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별 기대는 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잘리는데 저 형이 뭐 하러.

숙소 앞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른 자고 싶다는 생각에 서둘러서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멤버들은 눈치만 볼 뿐 뭘 직접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목욕이고 뭐고 침대에 엎드려서 멍을 때리는데 지구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제만 해도 밖에서 자겠다고 나가더니 오늘은 여기서 잘 모양이었다.

“형이 저 불편해하시는 건 아는데 당분간은 꼭 붙어 다니세요. 어디 갈 때 꼭 부르시고, 혼자 다니지도 마시고.”

아까 화장실 앞까지 따라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 짧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모든 걸 다 읽어낸 듯 지구의 대처는 빨랐다. 확실히 당분간은 절대 혼자는 못 다닐 것 같았다. 사생에 대해 남에게 듣는 것하고 직접 경험해보는 건 전혀 다르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하면 모두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겠다. 몸의 피로와는 별개로 다가오는 스트레스들도 장난이 아니었다. 알레르기로 쓰러진 지 얼마 안 돼서 이러는 걸 보니 올해가 삼재인 것 같았다. 연예계랑 기가 안 맞는 건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 이후로 쭉 형이 불편하면 자기가 피해 주겠다는 애한테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않고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다른 멤버들보다 유독 지구랑 있을 때는 안심이 됐다. 지구는 내가 어딜 갈 때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옆에 따라붙고는 했고, 그게 며칠 계속되자 점점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불안한 내면을 지구에게 기대 달래면서 정신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던 중에 매니저가 드디어 해고됐다. 달랑 2주밖에 되지 않는 활동기간 동안 허술한 일처리로 우리를 괴롭게 하던 매니저가 사라지고 새 매니저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새로 들어온 매니저 강경호입니다.”

듬직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매니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번 매니저와 비교했을 때 첫인사는 훨씬 호감이었다. 일단 존댓말을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또 사장님이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걸 들어보니 또 유명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려온 것 같았다.

일을 잘한다고는 하는데 분명 저번 매니저 때도 저 소리를 했었기 때문에 신뢰가 가진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지구 손을 일방적으로 살짝 잡았다.

“저번 매니저분이 썩 잘 해두고 가신 것 같지는 않던데…….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말을 끝으로 매니저 형은 정말 신들린 일처리를 보여줬다.

일전에 있던 사생 얘기를 듣고는 명단을 작성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렸으며, 내 휴대폰을 바꿔줬고, 화장실에 들어왔던 그 사생도 팬들 사이에서 뒷얘기가 나오지 않게 뒤탈 없이 처벌하겠다고 본인이 먼저 나서서 못을 박아줬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경호 업체를 바꾸고 배치까지 다시 하는 기적과 같은 행동을 실천한 매니저 형에게 우리가 박수갈채를 보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활동 기간이 다 끝난 후에야 우리를 찾아와준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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