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59화 (59/130)

17화

“안녕하세요, 팬분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팬 사인회가 시작됐다. MC의 진행에 따라서 한 사람씩 마이크를 쥐고 멘트를 친 다음에 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한 명씩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서 심장이 막 뛰었다. 대답 정도는 잘할 수 있겠지. 멍청하게 말을 더듬거나 하지 않으면.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맨 앞에 있던 예준부터 시작해서 옆으로 쭉 넘어오는 팬들을 살피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슬쩍 눌러봤다. 2만 3천 명이 있는 쇼케이스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확 긴장됐다. 노블 팬 사인회장에 있었을 때랑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저기서 대기하고 있는 거랑 여기서 팬을 기다리는 건 천지 차이였다.

“안녕하세요, 오빠. 실물 진짜 잘생겼어요…….”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 앞으로 첫 팬이 넘어왔다. 처음부터 인사하자마자 얼굴 칭찬을 해주길래 어쩔 줄 몰라서 고개만 꾸벅 숙이며 한참을 쩔쩔맸다. 일단 앨범을 받아서 사인하고 건네주시는 쇼핑백을 받아 뒤쪽에 놓으면서 물어보는 말들에 최대한 열심히 답변했다.

“쇼케이스도 갔었거든요.”

“아, 진짜요? 저희 그날 괜찮았어요?”

“완전요. 진짜, 아 대박이었는데…….”

쇼케이스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는 팬을 보며 당황해서 휴지를 찾느라 한참을 우왕좌왕했다. 스태프가 건네준 휴지를 팬에게 내밀자 고맙다면서 우는데 이게 기분이 묘해서 뭔가 같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한참을 나도 고맙다고 다독이며 첫 번째 팬을 보냈다.

한 번 하니까 그다음부터는 조금씩 익숙해졌다. 원하는 페이지를 펼쳐서 건네주는 손들을 한 번씩 맞잡아주고 빠른 속도로 사인을 한 다음에는 포스트잇을 받았다. 최대한 내가 쓸 수 있는 한으로 짧지만 정성스럽게 작성하면 꼭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아프지 마세요. 저 오빠 아프면 진짜 눈물 나요.”

“아, 네. 이제 굴은 입에도 안 대요.”

“굴도 그런데……. 회사가 다이어트 시키는 건 아니죠?”

정말 딱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안부를 꼭 물었다. 한 번 아팠던 거로 이렇게 걱정을 받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답을 보냈다. 또 중요한 건, 다이어트랑 샐러드 얘기가 워낙 많아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진짜 이거 드셨어요?”

심지어 중간에 김경자 샐러드 제품 사진을 프린트해온 팬도 있었다. 보자마자 웃음이 확 터진 걸 꾹 참고 사진에도 사인을 했다. 네가 웃었으면 됐다며, 인쇄 해오길 잘했다고 웃는 팬을 보며 나도 한참을 웃었다. 데뷔하고 지금까지 해온 스케줄 중에 제일 즐거웠다. 우리 그룹을 사랑해주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시간이 싫을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 저 문 차일드 써주세요.”

“영어로요?”

중간에는 홈마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름 대신 홈 이름이나 트위터 계정명을 적어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얼마나 생소했는지 모르겠다. 내 사진을 찍고 움짤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걸 또 다른 팬들이 소비한다는 게, 그 관계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거 써주세요!”

홈 이름을 써달라고 했던 팬이 내민 것은 화관이었다. 빼곡하게 분홍색 꽃들이 박혀있는 화관. 노블 멤버들이 쓰고 찍힌 사진을 본 적은 있어도 직접 받게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화관 쓴 게 보고 싶어서 사러 갔는데 예쁜 게 너무 많은 거예요. 다 써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제일 예쁜 거 고르려고 계속 비교해보다가 이걸로 했어요.”

어떤 걸 사왔어도 다 고마웠을 텐데. 이 화관을 얼마나 정성껏 골라왔는지가 말에서 다 느껴져서 더 고마웠다.

머리 위에 가볍게 얹도록 만들어진 화관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살짝 썼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머쓱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팬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아, 오빠 진짜…… 진짜……, 아……. 저 이거 사진 찍어야 되는데.”

입을 틀어막은 팬이, 다른 팬이 다른 걸 건네주기 전까지 착용하고 있어 달라고 부탁하고는 옆에 있는 지구에게로 넘어갔다. 준의 앞에 서 있는 팬이 옆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앞자리가 잠깐 빈 사이에 양쪽의 대화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뭐라고 써드릴까요?”

“아, 저 홈 이름이요. 문 차일드요.”

“네. 하현이 형 홈마이신가 봐요.”

“네, 네. 근데 진짜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스무 살 맞아요? 운동해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해요. 음, 요즘은 피곤해서 잘 안 하는데.”

“누가 피곤하게 해요? 데려와요.”

“스케줄이요?”

“그건 때려주기 좀 그러네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습관은 어디 가지 않는지 팬들과 하는 대화도 조용했다. 아주 무난하고 다정하게 흘러가는 대화는 곧 준의 목소리에 묻혔다.

“그, 그……. J에요?”

“아니요. Z요.”

“으아아. 죄송해요.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다시 써드릴까요? 아, 이거 어떡해.”

“아니에요, 뭐가 미안해! 쉬엄쉬엄 써요. 아니면 그냥 홈 이름을 바꿀까요? 그냥 편한 대로 써요! 홈 이름을 바꿀게요!”

영어 단어를 몰라 쩔쩔매는 준을 달래는 팬의 모습은 뭔가 뒤바뀐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있었다. 준이 시간을 한참 잡아먹는 바람에 꽤 오래 비워져 있던 내 앞은 금방 다시 찼다.

“헉, 하현아. 그거 화관 뭐예요. 심장 학살용인가요?”

“팬 분이 주셔서요.”

“하현이 주려고 베레모 사 왔는데 그게 더 예쁘네요. 양심상 이건 그냥 넣어둘게요.”

“아, 아니에요. 주세요.”

화관을 살짝 벗고 따뜻해 보이는 베레모를 쓰자마자 왠지 모르게 머리가 따끈따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이거 쓰고 저거 쓰고 틈틈이 반복하는 와중에 눈앞에 포스트잇 하나가 내밀어졌다.

[지구랑 같이 부르고 싶은 듀엣곡은?]

“어……. 왜 지구에요?”

“룸메이트잖아요! 둘이 사이 진짜 좋은 거 유명해요.“

“진짜요?”

“네, 네. 리얼리티 보면 한 번도 안 싸우고 친하던데 실제로는 어때요? 가끔 다투고 그래요? 서바이벌 ID 막방 때 연습은 왜 같이 한 거예요?”

팬은 집요하게 지구와의 관계성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바로 옆자리에 본인이 앉아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서 최대한 침착하게 펜을 돌리며 대답을 시작했다.

“음, 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지금 분위기가 조금 그렇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싸운 건 아니었다.

“지구가 워낙 배려심이 깊어서 저한테 다 맞춰 주거든요. 가끔 제가 조금 미안할 정도로……? 서바이벌 ID 막방 때는 지구가 같이 연습하자고 먼저 말해줬어요. 서로 도와주면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아, 그래요? 또, 또 그 막방 다음 날에 둘이 놀러 간 거는요?”

“아. 약속했었어요. 같이 데뷔하게 되면 데이트……. 음, 데이트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놀러 가자고 했었거든요. 수험표 들고.”

“그건 누가 하자고 했어요?”

“이것도 지구가 먼저요.”

말이 이어질수록 팬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왔다. 살짝 감동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팬을 뒤로하고 포스트잇을 채우기 위해 펜을 집었다. 같이 부르고 싶은 노래는 딱히 생각이 안 나서 지구가 첫 무대 때 불렀던 노래라고 적어 넣었는데 포스트잇을 건네받은 팬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더니 둘의 영원한 우정을 응원한다고 엄지 두 개를 들었다.

“그, 있잖아요.”

“네?”

거의 50명 가까이 지났을 때, 꽤 오래 내 앞에서 머무는 팬이 나타났다. 자신을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소개한 팬이 한참 대화를 하고도 옆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서바이벌 ID 때 오빠가 메인 피디랑 관계 때문에 뒷얘기 나온 거 있었거든요?”

“네……?”

그런 얘기가 있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뉴스에도 안 실렸고 삼촌이 모를 정도면 크게 난리 난 일은 아니라는 소린데. 게다가 보조 피디가 삼촌이라는 얘기면 모를까 메인 피디님은 나도 잘 몰랐다. 저쪽에서 이제 그만 넘어가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팬은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건지 다시 입을 열었다.

“촬영 다 끝났으니까 진짜 악의는 없고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오빠 혹시 막 뒤에서…….”

“팬 분, 하현이 형이랑만 얘기하실 거예요?”

불안한 마음에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지구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구 앞에 있던 팬은 이미 내려간 지 오래인 듯 앞자리가 비어 있었다.

“네, 네?”

“저랑도 얘기해주세요.”

“아. 네!”

팬은 지구의 말 한 번에 하던 소리를 관두고 바로 옆으로 곧장 넘어갔다. 아마 지구의 팬인 듯 나랑 얘기할 때보다 표정이 훨씬 밝아진 채로 신나게 떠들다가 내려갈 생각을 안 해서 결국 스태프들에 의해서 강제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 팬의 다음, 다음 팬까지를 끝으로 줄이 잠시 끊겼다.

“20분 휴식하고 계속 갈게요.”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형, 어디 가요?”

준이 고개를 뒤로 쭉 빼며 묻길래 화장실이라고 짤막하게 대꾸해줬다. 뒤쪽 문으로 빠져나가 들어간 화장실에는 스태프 한 명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소변을 보던 스태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뻘쭘함에 고개를 숙이고 세면대 앞으로 걸어갔다.

“엄청 묻었네.”

입고 있던 셔츠 소매 부분까지 스며든 검은 잉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사인을 하면 다시 묻겠지만 자꾸 눈에 걸리적거렸다. 옷은 둘째치고 일단 중요한 건 찝찝한 손이었다.

세면대에 한창 손을 씻는데 순간 거울에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문 바로 옆에 하얀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올려 쓰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여자가 있었다. 문 뒤에 숨어서 반쪽만 내놓고 있어서 더 놀랐다.

귀신인 줄 알았네. 손에 묻은 비눗물을 마저 씻어내다가 귀신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남자 화장실이잖아.

“저기요.”

급하게 말을 걸자마자 문 안쪽으로 휴대폰을 들이대고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밖으로 뺐다. 물을 잠그고 밖으로 뛰어나갔을 때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복도를 쭉 둘러봤지만 얼마나 빠른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혹시 진짜 귀신이었나? 생각하기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각도로 이쪽을 향해있던 휴대폰이 너무 선명했다. 문 뒤에 서서 휴대폰 들이댈 일이 촬영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었다. 기억을 계속 더듬어봤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는 팬은 줄 어디에도 없었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만 몇 초 잠깐 본 걸 가지고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었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쪽 화장실은 관계자 전용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사생인 팬이거나 관계자인데.

“아, 무슨 화장실을…….”

가끔 뉴스에서 극성 사생팬들 때문에 고통받는 연예인들의 사연을 보기는 했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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