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숙소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옆 침대가 비었다. 멍청하게 침대에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냥 잡을 걸 그랬나. 일단 잠은 여기서 자라고 할걸. 180cm가 넘는 남자 둘이 자기에 싱글 침대는 너무 좁을 것 같았고 애초에 예준이 지구를 자기 침대 위로 올려줄 리가 없었다.
뒤늦게 후회가 돼서 다시 불러오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방문이 열렸다. 살짝 올려다본 문 앞에 서 있는 건 지구가 아닌 예준이었다.
“자냐?”
“무슨 일이에요, 형?”
툭 물어보는 목소리는 예준의 것이었다. 그제야 뒤늦게 이불을 걷어내고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키는데 예준이 됐다며 손을 저었다.
“됐어, 누워 있어.”
그 손짓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것처럼 몸이 자연스럽게 다시 뒤로 넘어갔다.
“지구랑 싸웠냐?”
“다 그거 물어보네요.”
익숙한 질문이라는 듯 말하자 예준이 허공을 쳐다보던 눈을 내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내 침대 위에 걸터앉아 다시 시선을 치웠다.
“싸우지는 않았어요.”
“아, 그러면 일방적으로 네가 피하는 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고백받았냐?”
“네?”
지구가 직구는 무슨, 진짜는 여기 있다. 직구라는 말도 이 거침없는 말을 표현하기에는 모자랐다. 강속구라고 할까? 정신이 없어서 머릿속이 이상한 것들로 빙글빙글 돌았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혹시 들었어요?”
“듣기는 무슨. 존나 티 나니까 알지.”
당연히 예준이 들어서 아는 줄 알고 물었더니 인상까지 찡그리며 부정을 한다. 티가 많이 났나? 아니, 근데 보통 갑자기 한 명이 피한다고 해서 아, 얘가 쟤한테 고백을 받았는데 그게 부담스러워서 저러는구나 하지는 않잖아.
“온지구 얼굴만 봐도 알겠다. 그냥 형 좋아해요. 라고 얼굴에 매직으로 쓰고 다니라고 해.”
“그게 어떻게 보여요?”
“와……. 넌 그게 안 보여? 대놓고 너만 편애하잖아. 이거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준이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나를 쳐다봤다. 조금 흥분했는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컸다.
예준은 한참 나를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걔가 하루 종일 널 얼마나 쳐다보고 있는 줄 아냐, 옆에서 보는데 고개가 고정된 줄 알았다, 하고 남의 입으로 듣는 지구는 조금 생소했다.
“근데 형은 신경 안 쓰여요?”
“신경 쓰고 말고 할 건 뭔데.”
“그건 아닌데 저랑 지구랑 둘 다 남자잖아요.”
같은 그룹 동생 둘이 고백하고 피하고 난리를 치는데도 예준의 반응은 태평했다. 보통은 보는 시선이 안 좋으니까 슬쩍 눈치 보면서 물은 건데 예준은 별 이상한 걸 다 묻는다는 듯이 즉시 대꾸했다.
“이게 내 연애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한 마디로 순식간에 납득이 됐다. 남의 일에 편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듯한 예준이 목이 뻣뻣한지 고개를 꺾으며 역으로 질문을 해왔다.
“그러는 너는?”
“네?”
“내 주변 어떤 놈은, 남자한테 고백받고 기분 나쁘다고 두들겨 패고 아웃팅도 시키던데.”
예준이 별 쓰레기 같은 놈을 예시를 들고 와서는 물었다. 아웃팅이라니, 그건 진짜 인간 이하인 거고.
“형 눈에는 제가 그런 거 할 놈으로 보이세요?”
악의 없이 물은 말에 예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 남자 좋아해 본 적 있어?”
“있을 리가요.”
“봐봐, 너 평생 이성애자였잖아. 근데 기분 안 나쁘냐고.”
예준의 말에 생각해본 적 없는 부분들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고백받았을 때 어땠더라? 얘가 나를 왜 좋아한다는 거지, 하는 생각만 계속 들어서 당황스럽긴 했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같은 성별에게 고백받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구나.
“그냥 얘가 왜?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마인드가 활짝 열려있네.”
“누굴 좋아하든 자기 마음이잖아요.”
“쿨하네. 근데 같은 마음은 아니라 열심히 피해 다니는 거야?”
분명 정곡을 찌르는 질문인데도 맞다고 대답을 못 했다. 말없이 누워 있는데 예준은 두 번 묻지 않고 몸을 일으켜 옆 침대로 가서 누웠다.
“형이 왜 지구 침대에 누워요.”
“쟤가 내 침대 뺏었는데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
“아.”
“뺏은 건 아니고 소파에서 잔다는 거 말려서 그냥 침대 내줬지. 내가 좀 배려심이 깊잖아.”
쓸데없이 본인 자랑까지 덧붙인 예준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지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 침대에 누워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쳐다보든 말든 예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베개를 베고 누웠다.
“형 머리는 감은 거죠? 아까 너무 빨리 씻고 나오던데.”
“뭐 그런 걸 물어봐. 얘 베개 더러워질까 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조용히 자라. 내일 팬 사인회에서도 어색한 티 팍팍 내면 내 손에 죽는다.”
예준이 침대에 누운 상태로 주먹을 꽉 쥐고 살벌하게 흔들었다. 장난인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한 번 웃고 말았다.
“너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니다. 나한테는 너네 둘다 똑같아. 너한테 빨리 받아주든 말든 뭐라도 하라고 왈가왈부한 거 아니니까 괜히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형 눈에는 제가 이런 거 마음에 담아놓을 사람처럼 보여요?”
“아까부터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말이 그렇다고. 좀. 대충 알아듣지 못하겠냐?”
“알겠어요.”
지구 침대 쪽으로 돌렸던 몸을 다시 똑바로 돌려서 천장을 눈에 담았다. 방 안에 누가 같이 있는지에 따라서 공기가 바뀌기도 하는지 오늘은 좀 칙칙했다. 그렇다고 예준이 칙칙하다는 건 아니고.
“조금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알아서 해. 나 잔다.”
이불 뒤척이는 소리가 잠깐 나더니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귀를 틀어막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예준의 침대가 방에서 거실로 나왔던 이유를.
쉴 새 없이 게임 스킬 이름으로 보이는 프랑스어 따위를 중얼거리는 예준을 피해 휴대폰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저 형은 꿈꿀 때마다 게임을 하나, 시끄러워서 못 자겠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예준의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자고 있는 지구가 보였다. 지구는 잠버릇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괜히 소파에 앉아서 베란다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중간중간에 자고 있는 얼굴을 곁눈질했다. 내가 계속 불편하면 관두겠다고? 진짜 그렇게 쉽게? 새벽이라 그런지 없던 감정도 생겨서 속이 울렁거렸다.
띠리링, 띠리링. 그때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에 화들짝 놀라서 스피커 부분을 틀어막고 지구를 먼저 살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긴 했는데 깨지는 않은 것 같아서 침착하게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010-XXXX-XXXX]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주소록에 있던 전화번호는 가족들 빼고 졸업하면서 다 지웠고 새로 추가한 건 멤버들과 매니저가 전부니까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학생 때 알던 친구라고 생각하기에는 번호를 바꿨으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혹시 회사 직원분인가?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타입이라 한참 고민하는 동안 전화가 끊겼다. 다 같이 벨 소리로 맞춘 우리 타이틀곡이 한껏 억눌린 채로 흘러나오다가 뚝 끊어졌다.
잘못 걸은 거 맞겠지, 하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기 위해 진동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왔던 것과 같은 번호였다. 두 번 연속으로 걸려온 전화를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아요.”
지구가 깰까 봐 최대한 속삭이면서 말하긴 했는데 안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계속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한 번 다시 전화 너머 상대방을 불렀다가 결국 꺼림칙한 느낌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소파 위에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자마자 다시 화면이 반짝이며 진동이 울렸다. 또 같은 번호다.
장난 전화인가 싶어 차단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길어져서 끊어지면 곧바로 다시 걸려오는 바람에 차단을 할 시간도 없었다. 진동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무음으로 바꿀 그 잠깐의 시간도 없어서 휴대폰은 계속 부르르 떨었다. 거의 불이 나는 수준으로 연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보며 일단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장난전화거나 전화번호가 털렸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혼자서 진짜 미친 것처럼 울려대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껐다. 순식간에 잠잠해진 휴대폰이 왠지 귀신 들린 것마냥 섬뜩해져서 소파 위에 내려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매니저한테 말해서 번호를 바꿔야겠다 했는데, 번호를 바꾸기는 무슨. 방으로 돌아와서 예준의 잠꼬대에 괴로워하다 겨우 잠들었는데, 잠을 깨우는 매니저 때문에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야 했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스케줄에 끌려다니는 동안 매니저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예민했다. 해고 날짜가 당장 5일 뒤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잘해. 너네 사진 다 찍혀서 올라가는 거 알지? 표정 관리 잘하란 말이야.”
어차피 해고되는 마당에 신경이나 꺼주면 좋을 텐데, 매니저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끌어모아 우리를 갈궜다. 휴대폰을 꺼진 상태 그대로 숙소에 두고 나온 덕분에 다른 멤버들처럼 휴대폰을 하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도 못하고 매니저의 잔소리를 그대로 귀에 담아야 했다. 전화번호 털린 것 같다는 말은 덕분에 꺼내지도 못했다.
도착한 건물은 한 층 전체가 회의실이었다. 팬 사인회는 5층에서 이루어졌는데 야외 뺨치게 공간이 넓었다. 대기하다가 팬들이 전부 착석하면 그때 나가면 된다고 하길래 대기실이라고 마련해준 공간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라고 했죠?”
“200명.”
“헉, 많다. 한 100분 정도 오실 줄 알았어요.”
생전 첫 팬 사인회에서 200분이나 되는 팬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준이 계속 끙끙거리더니 종내에는 펜을 들고 사인 연습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자기 이름을 쓰던 준이 종이를 건넸다.
“어느 쪽이 더 나아요?”
“난 왼쪽.”
“아. 안 되는데. 휘영이 형도 왼쪽이라고 하던데. 지구 형, 이리 와봐요. 형은 어디가 나아요?”
“나도 왼쪽.”
“아. 난 오른쪽이 좋은데.”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준은 항상 답을 정해놓고 형들에게 물었다. 그게 귀여워서 멤버들은 거의 준이 원하는 쪽으로 말을 맞춰주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지구가 완강하게 왼쪽을 밀었다. 결국 준의 팔랑귀는 왼쪽 사인에 동그라미를 치게 만들었다.
“휘영이 형. 저기 있는 끈 좀.”
“내가 줄게.”
팬 사인회에서까지 어색한 티 내면 가만 안 둔다고 했으니 일단 조금이라도 해소를 해놔야 했다. 하필 앉는 자리도 지구랑 내가 붙어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지금 사이가 뻘쭘하다는 걸 팬들에게 들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끈을 건네받은 지구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뭔가 대화로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