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내가 거절한 수학 문제지는 예준이 반강제로 지구 손에 안겨줬다.
“우리 중에 미적분 제일 최근에 배운 게 너잖아.”
결국, 얼떨결에 수학을 풀기 시작한 지구는 말과 달리 제법 잘 풀었다. 대학 갈 생각도 없다는 애가 나보다 잘하네. 분명 같은 교과서로 배웠을 텐데 지구가 대입하고 있는 공식이 나에게는 초면이었다.
집중하느라 꾹 다물린 입술을 계속 쳐다보다가 어깨를 살짝 누르는 손길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왜요?”
“너한테 선택할 기회를 줄게. 국어 있고 한국사 있어.”
이미 영어와 과학은 준과 휘영에게 매진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한국사 대신 망설임 없이 국어를 골랐다. 워낙 과목 성적 차이가 커서 수학이 바닥을 달리는 동안 국어는 그래도 평균 이상은 했었다.
“한국사 기억이 안 나는데…….”
본인이 선택권을 줬으면서 예준이 문제지를 펼치며 볼멘소리를 냈다. 두 문제 풀고 엎어져서 못하겠다고 하는 준이나, 풀지는 않고 영어 지문을 소리 내서 읽고 있는 휘영이나 양쪽에서 정신없었다. 평생 똑똑한 그룹 소리는 못 듣겠구나.
대충 기억나는 얕은 지식들을 싹싹 긁어모아 문제를 다 풀자마자 준이 옆에서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형, 도와주세요. 과학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단 말이나 해보라고 몇 번? 하고 물었더니 준이 손가락으로 문제를 눌렀다.
“19번이요.”
“무슨 문제야, 이게.”
“아니. 풀어달라는 게 아니라 번호 찍어달라고요. 저는 3번 같은데 형은 몇 번 같아요?”
준이 직사각형 모양의 지우개에 3을 적어 넣고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말하는 숫자를 뒷면에 적을 생각인 것 같았다.
“풀어볼 생각은 없어?”
“안 풀리는 건 이유가 있는 거예요.”
“어, 그래……. 참 논리적이다.”
대충 4번으로 하라고 숫자를 집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제지를 앞에 놓인 상자에 제출했다. 틀림없이 방금 넣었는데 사라져버린 문제지의 빈자리를 보며 멍청하게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손을 넣어봤다. 동시에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
갑작스럽게 느껴진 따뜻함에 가만히 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손을 빼냈다. 오래 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손은 쉽게 떨어졌다. 저쪽 벽이랑 이어져 있나 보네. 고개를 숙여 상자 안 깊숙이 들여다보는데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이 보였다.
“형 나와봐요. 저 넣게.”
심오하게 지우개 굴려 가며 다 찍은 건지, 준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거기 머리는 왜 넣고 있어요?”
상자에 걸려서 머리카락이 엉망이 됐는지 준이 머리 정리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거울이 없어서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어서 대충 손으로 머리를 토닥이는데 갑자기 준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악, 뭐야!”
마치 악어에게 물리기라도 한 듯 준이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털어냈다. 아무래도 안쪽에 계신 분과 악수를 한 것 같았다.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을 빙빙 돌던 준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격한 리액션에 문제를 풀던 한 명과 쳐다보던 두 명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쟤 왜 저래?”
“손잡아서 저러는 것 같은데.”
“무슨 손.”
미리 말해줄 걸 그랬나. 숨을 마구 몰아쉬는 준을 보니 왠지 안타까워져서 등을 툭툭 때려주고, 다 찍은 듯한 예준의 문제지를 대신 받아들었다. 준은 원래 저런 성격이니 이해해도 예준이 방방 거리며 뛰어다니는 게 카메라에 담기면 혼자 밤에 이불을 걷어찰 것 같아서.
이번에도 상자 속에 손을 넣자마자 따뜻한 손이 악수하자며 다가왔지만, 모르는 척 문제지를 쥐여줬다. 바로 다음으로 시험지를 넣던 휘영은 위에서 던져 넣어서 안쪽에서 손을 잡지 못하게 만들고 가버렸다.
“지구 형. 안 풀려요?”
“원래 수학은 오래 걸리잖아. 너는 다 찍어놓고.”
“대충 안 찍었거든요. 일일이 지우개 굴리면서 했는데?”
준은 대체 뭐가 다른지 모를 일로 예준과 다퉜다. 대체 저 둘에게 여섯 살 나이 차를 극복하게 해준 건 뭘까. 물론 두말할 것 없이 예준의 정신연령이겠지.
“좀 푸는데?”
“저는 루트도 가물가물한데.”
다들 지구의 옆에 붙어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 왠지 옆으로 갈 수가 없어서 나 혼자 상자 옆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볼펜을 쥐고 문제지 위에 빠르게 풀이를 적는 지구의 손만 멀리서 쳐다보면서 멍을 때렸다.
슬쩍 보이는 글씨가 막 계산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단정했다. 문제가 잘 안 풀리는지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이거 몇 번 같아?”
“0 아니면 1이지.”
“헐, 예준이 형 저랑 통했네요.”
“그럼 1 할게.”
마지막 문제는 찍는 거로 한 건지, 지구가 볼펜으로 정답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차마 문제지를 대신 받아 넣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구가 상자 앞에 설 때까지 그냥 손을 가만히 두고 지켜보기만 했다.
“아, 지구 형. 그, 그거 안에서 누가 손 잡아요.”
“손을 잡아?”
“네. 안에 누구 있어요……. 아까 놀라 죽을 뻔했는데.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하현이 형은 손 안 잡혔어요?”
“잡았는데.”
“헐. 뭐야. 근데 저한테 말 안 해준 거예요?”
준이 실망이라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사실 투덜거리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구가 갑자기 상자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워낙 눈매가 유순해서 한 번도 싸늘하게 보인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무표정이 싸해 보인다고 하던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좀 알겠다. 살짝 내리깐 채로 가늘게 뜨고 있으니까 눈빛이 확 다르다. 내가 키가 5cm만 컸어도 올려다보면 동글동글할 텐데.
“형.”
“어?”
굳이 손을 집어넣지 않고, 위에서 떨어뜨려 상자 속으로 문제지를 정확히 착지시킨 지구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머리 망가지셨어요.”
서서히 올라온 손은 허무하게도 머리에서 툭 떨어졌다. 아까 그렇게 한참 머리를 어루만졌는데 뻗친 곳이 뒤쪽이었는지 지구의 손이 뒤통수까지 수직으로 떨어졌다. 정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스스 일어나는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데 그 순간이 너무 길어서 머리를 비틀어 빠져나오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다.
“아까 정리한다고 한 건데.”
“이제 됐어요.”
조금 전에 그 눈빛은 어디로 증발하고 웃는 얼굴만 남았다. 이제 이게 제일 잘 어울리는 표정이긴 한데……, 쳐다보던 눈이 잊히질 않아서 괜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와중에 머리가 헝클어지면 또 정리해줄까 봐 혼자 급하게 정리하는 게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겼다.
“채점 끝났습니다.”
혼자 헛기침을 하고 있을 때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처는 천장에 붙어있던 작은 스피커였다. 아까 문제지를 넣었던 상자가 다시 다섯 개의 문제지를 토해냈다. 빨간 색연필로 정성껏 채점되어 문제지가 바닥에 마음대로 흩어졌다.
“헐. 예준이 형 뭐예요?”
“형이 이래 봬도 기본 지식은 쫙 깔고 있다.”
비보다 눈이 약간 더 많아 보이는 예준의 문제지를 보며 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와중에 준의 손에 들려있는 문제지에 빨간 비가 장마처럼 내리고 있었다.
“형은 수학 못한다면서요! 92점이 어디가 못하는 거예요. 처음에 엄청 빼더니.”
와중에 틀린 문제를 더 찾기 힘든 지구의 문제지를 보며 또 감탄을 뱉던 준이 이번에는 내 문제지를 가로채 갔다.
“와, 이 형도 잘 풀었어!”
마치 우리가 뒤통수라도 친 것처럼 배신감에 찬 목소리로 준이 소리쳤다.
“평균 58점…….”
“너네 뭐 했냐, 어?”
본인도 평균에서 썩 먼 점수가 아닌데도 예준은 험악하게 준과 휘영을 잡았다. 얘는 어떻게 찍었길래 12점이 나왔지……. 충격적인 준의 점수에 문제지를 집어 들어 한참 보는데 스피커를 통해 결과가 흘러나왔다.
“레브 팀은 2위를 했습니다.”
“네? 저희보다 못 본 팀이 있다고요?”
준이 진심으로 놀란 듯 통보용으로 만들어진 스피커에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다음 지령이 떨어졌다.
“3위 팀과 대결을 하셔서 승리한 팀이 먼저 나올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나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저녁을 못 먹습니다.”
이번에는 대답이 나왔다. 세상 누구보다 밥을 사랑하는 준의 표정이 확 굳었다.
“형들. 우리 밥은 먹어야죠.”
확실히 이 촬영은 앞으로도 3시간은 더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그 시간 동안 아주 허기질 게 뻔했다. 밥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악랄한 프로그램이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던 목소리가 끊기자마자 벽에 붙어있던 문이 열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울이 열렸다. 아마도 어딘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여기 들어가는 거 맞죠?”
“일단 가.”
예준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얼떨결에 선두에 섰다. 비좁은 틈새를 걷는 건 30초면 족했다. 순식간에 옆방으로 나왔는데 중요한 건 별로 안 보고 싶은 얼굴이 있다.
우리보다 더 점수가 낮은 그룹이 어디 있나 했더니 스페이스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해오는데 후배가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비좁은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게 불만이었는지 예준이 어서 나오라며 등을 툭툭 쳤다. 비키면 안 좋은 거 봐야 하는데. 재촉하는 손길에 어쩔 수 없이 완전히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예능에서 만나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저도요.”
내가 이름을 틀렸던 사람이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음악 방송도 아니고 이렇게 예능에서 만난 건 처음이라 허둥지둥 반응하면서 또 지구 얼굴을 열심히 살폈다. 걱정과 다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대신 웃고 있었다. 근데 그게 다 표정 관리인 게 왜 이렇게 훅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 흰 방에 놓여 있는 건 의자 열 개, 그리고 스태프들 앞에 있는 의자 다섯 개가 전부였다. 스페이스 멤버들은 이미 차례로 파란색 의자에 앉아있었다. 앉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 같지는 않길래 그냥 내가 스페이스랑 제일 가까운 의자에 선수 쳐서 앉았다.
“다 앉으셨죠?”
앞쪽에 앉아있는 여러 스태프 중에 피디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세 가지 대결을 할 건데 아이돌인 만큼 무대 관련된 거로 진행된다고.
“심사위원은 우리 스태프들입니다.”
피디의 손짓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스태프 중 다섯 명이 걸어 나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미리 준비해둔 건지 빨간색과 파란색 종이를 양손에 든 상태였다.
“평가 기준은 완전히 주관적인 거니까요.”
예능이니까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밥이 걸려있는 건 둘째치고 상대가 스페이스인데 어떻게 연연하지 않을 수가 있지. 다리 위에 올려둔 손으로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앉아있는데, 바로 옆에 있던 스페이스 멤버 하나가 웃었다.
뭐야, 왜 웃지. 집에 남겨두고 온 빵 생각이라도 났나. 웃음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뭐했다. 그래도 촬영 중임을 감안해서 눈을 흘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일단 처음이니까 무난하게 춤부터 갈게요. 프리스타일로.”
팀별로 한 명만 나오세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페이스 멤버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나랑 악수했던, 다른 멤버의 이름표를 붙이고 있던 사람이었다.
“제가 나갈게요.”
“저희 메인 댄서가 서진이거든요.”
밝은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넘기며 서진이라는 멤버가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 나오는 동안 준이 다급하게 오른쪽에 앉아있는 지구를 툭툭 쳤다.
“하현이 형 아직 다 안 나았으니까 형이 나가요. 형도 춤 잘 추잖아요.”
그 말에 진짜로 지구가 일어나려는지 허리를 폈다. 앞쪽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노란 머리와 지구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그냥 일어섰다. 어디 나서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제가 할게요.”
아무도 앉으라고 안 하길래 그냥 앞으로 나갔다. 중앙에 섰을 때 의아하다는 목소리가 울렸다.
“저 형 왜 저래요?”
준이 지구에게 속닥거렸다. 너 지금 마이크 차고 있어서 다 들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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