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대기실은 첫 1위니까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한다며 한참 분주했다. 평소보다 메이크업 수정하는 시간이 길었고 머리도 한참을 매만졌다. 이미 다 정해진 의상까지 마음에 안 들어서 바꿀 예정인지 준의 목에 걸리는 넥타이 색이 볼 때마다 달라졌다. 매일같이 보는 스타일리스트가 셔츠 깃을 살짝 정리해주며 말했다.
“걔네는 대형이라 신경 엄청 쓰고 나올 거란 말이야. 무대 의상 보니까 확실히 돈 많이 들인 티가 나더라.”
그야 당연했다. 사장님 서울역 거주설이 나올 정도로 자본이 없는 ATM과 수많은 히트 스타들을 배출해낸 TN의 기획력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됐다. 스타일리스트는 당연한 소리를 씁쓸한 표정으로 하다가 웃으며 등을 툭툭 쳤다.
“근데 우리는 얼굴이 되잖아. 거적때기를 걸쳐도 걔네보다 잘생겼다는 걸 보여주자.”
“……거적때기요?”
“하현이 너는 진짜 거적때기 입혀놔도 다 네 밑으로 차렷시킬 수 있어. 물론 이 셔츠는 좀 비싼 거야.”
뿌듯한 표정으로 구겨진 부분을 툭툭 터는 손길을 가만히 받으며 웃었다. ATM 엔터테인먼트가 일을 못 하는 것과 별개로 사람들은 참 좋았다. 매니저랑 사장님만 제외하면.
스타일리스트고 매니저고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이미 우리는 1위 트로피를 거머쥔 상태였다. 이러고 못 받으면 어쩌려고, 하고 걱정하기에 솔직히 모든 면에서 우리 성적이 앞서긴 했다. TN 소속 다른 가수들의 팬까지 문자 투표에 몰려든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걸 제외해도 음반 판매량이나 음원 점수가 압도적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자니까 쑥스럽긴 했지만, 수치로 검증된 사실인데 뭐 어떠냐 싶었다.
“이번 주 1위는요. 네, 레브 축하드립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받았고.
무대 위로 쏟아져 내리는 꽃가루가 서바이벌 ID 막방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기분이 잔뜩 벅차올랐다.
일반인이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모두 연예인 신분이었다. 방송부터 데뷔까지 너무 이른 시간 안에 이루어져서 지금도 여기에 서 있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가수들이 박수를 치며 축하를 했고 그중에는 스페이스도 있었다. 어제 봤던 검은 재킷보다 더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는 박수를 치는 표정은 평안해 보였다. 그래도 그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적대감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1위 축하해요.”
정수혁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던 멤버가 하는, 절대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닐 축하를 받고 MC에게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멤버들 손에는 꽃다발이 들어갔다.
“첫 번째 타이틀곡인 만큼 열심히 준비하고 걱정도 많이 했는데, 이런 값진 트로피 받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정면만 바라보며 눈을 깜빡대는 동안 예준은 침착하게 수상소감을 읊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소감을 보며 수상 소감을 항상 챙겨 다닌다는 팬들의 우스갯소리가 진심으로 의심되기 시작했다. 진짜 어젯밤에 생각해온 게 아닐까.
“음, 어. 팬분들이 너무 많은 응원을 해주셔서…….”
마이크는 예준부터 시작해서 주르륵 옆으로 넘어왔다. 그제야 황급히 머릿속으로 소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다들 짧게 말하고 있는데 혼자 시상식 소감처럼 이것저것 말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정말 1위를 하게될 줄 몰랐는데 전부 팬분들 덕분이에요. 응원해주시고 노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무대 많이 보여드릴게요.”
맨 끝에 서 있던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 타이틀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파트가 나오자마자 준이 무대 앞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서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얌전히 부르다가 어느새 팬들 쪽으로 마이크를 가져다 대며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준을 보고, 나머지 멤버들도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갔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뒤에 서 있던 다른 가수들도 박자를 탔다.
평생 남을 첫 1위는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는 말과 함께 끝났다. 그리고 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길에 또 휘청댔다. 이게 다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벽을 짚었다.
사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집구석에서 반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건강이 많이 나빠지긴 한 모양이었다. 밖에 잘 나가지 않았으니 침대에서 냉장고까지가 주 행동반경이었고, 귀찮으면 몇 끼씩 건너뛰는 건 예삿일이었다. 이번 활동 끝나면 진짜 운동을 해야지 싶었다. 편식도 고치고.
“형 뭐 하세요?”
“잠깐 멍때렸어.”
고개를 살짝 털어내고 정신을 똑바로 잡은 뒤 바로 지구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아무 생각 없이 왼쪽 손을 잡았다.
“형?”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움찔하는 손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그 어떤 불순한 의도도 없었으므로 찔리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살살 쓸었다. 거칠거칠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까 까졌지. 안 아파?”
“그냥 손톱에 살짝 쓸린 거예요. 아프진 않아요.”
피만 안 났다 뿐이지 싹 까졌는데. 계속 상처에 시선이 가긴 하는데 밴드를 받아와서 붙여주는 건 좀 웃길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손을 놔주고 그대로 대기실로 들어왔다.
첫 1위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어서 공식 카페에 올리고 각자 글도 올렸다. 5개의 게시글이 거의 동시에 올라가자마자 조회 수가 쭉쭉 올라갔다. 댓글을 다 읽어보려고 했는데 한 번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늘어있어서 전부 읽을 수는 없었다. 하트가 잔뜩 붙은 댓글들은 다 읽어보지 않아도 애정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이 읽고 싶은 욕심에 속도를 내서 스크롤을 내렸다.
“온지구, 기분 좋아 보인다?”
“첫 1위잖아.“
“스페이스 이겨서가 아니고?”
어쩐지 평소보다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웃어 보인 지구가 대기실 구석에 있는 사탕 하나를 까서 입안에 넣었다. 처음으로 스페이스를 이긴 자축 세레머니쯤으로 보여서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 얼굴에서 한참 시선을 못 떼고 쳐다보다가 뒤늦게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체할 수 없이 흐뭇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급하게 쭉 끌어내리다가, 1위를 해서 기분이 좋은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 다시 편하게 웃었다. 그 와중에 머리가 아파서 웃는 데 방해가 됐다. 부디 깊게 눈 붙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입안에서 사탕을 데굴데굴 굴리는 지구만 질리게 쳐다봤다.
살인적인 스케줄 덕에 하루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새벽까지 내내 일정이 있어서 잠깐씩 눈 붙이는 게 아니면 푹 쉴 수가 없었다. 덜컹거리는 차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해서 피로도가 최고를 찍은 상태로 심야 라디오 녹화에 들어갔다.
“오늘은 요즘 제일 핫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 진짜 좋네요. 팬분들 들으면서 푹 주무시겠어요.”
유명한 라디오 DJ가 사람 좋은 얼굴로 멘트를 쳤다. 정말 저절로 잠에 들게 만드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괜히 피곤에 잠긴 목이 신경 쓰여서 틈틈이 물을 마셨다.
“인천에 사시는 김희경 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심야 라디오는 편지 읽기와 시 읊기로 진행됐다. 좋아하는 사람, 혹은 그리운 사람에게 익명으로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고 신청받은 시를 읊어주는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잔잔하고 정적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편성된 라디오니 당연했지만 그게 상당히 졸렸다.
“신청해주신 시는 고래를 위하여…….”
그래서 결국 나도 모르게 앞에 있는 마이크에 머리를 박는 부끄러운 사고까지 일으켰다. 고개가 떨어지는 줄도 몰랐으니 거의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막 시를 읊기 위해 입을 열던 지구가 놀랐는지 이쪽을 쳐다봤다.
당황해서 정신이 확 깼다. 신경 쓰지 말라고 고개를 급히 저은 뒤 이곳저곳에 고개를 숙였다.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라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녹화하다 깜빡 졸은 게 영상으로 남을 뻔했다.
그다음부터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해서 무사히 라디오를 끝낼 수 있었다. 몇 번 꼬집어서 허벅지가 얼얼했다. 특집 방송이라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길게 해서 더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고개를 숙였다. 진지하게 진행하는데 갑자기 분위기 깨 먹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소리 그렇게 안 크던데요.”
너그러운 피디님의 용서에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저쪽에서 작가님과 음향을 담당하시는 분들까지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민폐를 끼친 것 같아서 두 번 더 고개를 숙이고 급히 방송국을 빠져나와 다시 차에 올라탔을 때는 5시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간이었다.
“진짜 많이 피곤하신 거 아니에요?”
“잠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래.”
“좀 주무세요.”
지구가 저 멀리 밀어뒀던 담요를 다시 끌어와 몸 위에 덮어줬다. 캄캄하지 않아도 잘 수 있는데 안대까지 찾아서 손에 쥐여주고 이제 정말 꼭 자라며 의자의 머리 부분도 뒤로 살짝 당겨줬다. 차에 타자마자 매니저가 히터를 세게 올렸고 순식간에 공기가 따뜻해졌다. 노곤해지는 게 정말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눈을 감았는데 두통을 무시하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아 있었다. 꽤 잤는지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매니저는 운전 중이었다. 다음 스케줄 장소인 스튜디오가 차를 타고 몇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멀지는 않으니 아마 어디 주차장 같은 곳에 잠깐 세워뒀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도 숙소를 못 갔다. 그나마 갈아입은 옷이 편해서 편하게 잤다.
“아오…….”
뒷자리에 준이 뒤척이면서 부스럭대길래 안전벨트를 잠깐 풀고 뒤로 돌았다. 긴 다리가 담요 밖으로 다 나와 있길래 대충 다시 덮어주고 앞을 봤다. 넓은 차창으로 밝은 햇빛이 잔뜩 들어와서 눈을 간지럽혔다. 눈앞에 언뜻 무지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다 자냐?”
“저 일어났어요.”
“넌 왜 맨날 안 자냐, 더 자도 돼.”
“불편해서요.”
“불편하다고 안 자면 어떡해. 그러니까 아까도 라디오 하다 졸지. 애들은 잘 자는데 왜?”
매니저는 핸들을 잡은 채로 정면을 보며 물었다. 물론 그 질문이 정말 왜 못 자는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건 아닐 테다. 그냥 자라는 소리겠지. 그래서 그냥 대꾸 없이 등을 뒤로 편하게 기댔다.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부터 두통이 오는 건 확실한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나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멤버들도 다 피곤하고 힘들 텐데. 다 같이 힘든 걸 아니까 다들 굳이 투정하지 않는데 내가 나서서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어차피 이건 푹 쉬는 거 빼고는 딱히 치료법도 없다.
의자 뒤에 달린 포켓을 뒤져 비타민을 찾았다. 팬들이 보내준 서포트에 들어있던 비타민 보충제인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코피 나는 걸 방지해준다는 말도 있었다. 물과 함께 비타민을 넘기고 뻐근한 몸을 살짝 풀어주다 보니 또다시 촬영장에 도착했다.
“준아, 일어나. 정 준.”
“예?”
그냥 담요만 살짝 걷어내고 몸을 흔든 것뿐인데 준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눈은 반 밖에 못 뜬 상태로 손을 휘적거리는 게 짠해서 더 자라고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다. 잘 어르고 달래서 마스크까지 씌워서 데리고 나와 스튜디오 안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