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고깃집에서 사장님의 카드를 아낌없이 긁은 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 같이 짜기라도 한 듯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예준은 들어갈 방이 없어서 겉옷을 거실 바닥에 내팽개치고 드러누웠다.
“와, 진짜. 대박. 너무 자고 싶다.”
“씻고 자.”
“지금은 못 씻어요. 내일 아침에 씻을래요.”
고기는 잘만 먹더니 정말 씻을 힘도 없는지 준의 목소리가 작았다. 항상 또랑또랑하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저렇게까지 쳐져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피곤한가보다 싶어 그냥 조용히 방문을 닫아줬다. 그 잠깐 사이에 바닥에 누워있던 예준은 침대로 기어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형 그냥 일어서서 가요.”
“못 일어난다…….”
키는 나보다 거의 10센티가량 더 큰 사람이, 저 압도적인 길이의 팔다리를 휘적이는 게 웃기기보다는 안쓰러웠다. 다들 팔팔해 보여서 나만 이렇게 쓰러질 것처럼 힘든가 싶었는데, 역시 그 넓은 무대에서 데뷔 쇼케이스를 하고 왔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제가 혼자 형을 들 수 있을까요?”
“제가 들게요.”
예준의 다리 두 쪽을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더니, 대답이 뒤쪽에서 들렸다. 껴입고 있던 니트와 셔츠는 언제 벗은 건지 흰색 반팔 티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는 지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예준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 침대에 던졌다. 내려놨다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떨어지는 소리가 조금 컸다.
사실 나도 다 뒤로 밀어놓고 저렇게 누워서 죽은 듯이 자고 싶었지만, 아까 땀 흘린 게 영 찝찝했다. 결국, 짧게 샤워하고 자는 거로 스스로와 타협을 보고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나오다가 지구랑 눈이 딱 마주쳤다.
“형 씻으실 거예요?”
“어. 너 먼저 씻을래?”
묻는 말이 괜히 조심스럽게 나갔다. 살면서 고백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신경 쓰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같은 성별인 건 둘째치고 앞으로도 쭉 같이 활동해야 할 같은 그룹 멤버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 학창시절에는 고백을 받으면 사과하고 피해 다니면 됐는데 얘랑은 룸메이트라 꼼짝없이 계속 얼굴을 맞대야 했다.
“전 조금 있다가요. 형 먼저 씻고 나오세요.”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린 건 틀림없이 기분 탓이 아니다. 돌아간 고개 옆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가 선명히 보였다. 어쨌거나 거기서 더 멍청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씨.”
머릿속에 계속 아까 그 상황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정신 좀 차리려고 수도꼭지를 찬물로 돌렸다가 짜릿한 차가움을 맛보고 황급히 물을 껐다. 계속 이러면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 물을 다시 따뜻하게 바꾸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마인드 컨트롤하자고 다짐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방으로 들어갔을 때 지구는 침대 위에 죽은 사람처럼 뻗어있었다. 제일 안 피곤한척하더니 얘도 졸렸구나. 느리게 깜빡거리며 점점 수마에 빠져들어 가는 얼굴을 멀리서 쳐다보다가 바로 앞까지 걸어가 눈을 맞췄다.
“아.”
갑자기 천장 대신 내 얼굴이 보이니까 놀란 건지 동그란 눈이 확 커지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나른하게 누워있던 몸을 순식간에 벌떡 일으킨 지구가 크게 숨을 들이켜는 게 여기까지 들려서 순간 웃을 뻔했다.
“안 씻을 거야?”
“아니요. 씻어요.”
항상 나긋하던 목소리가 묘하게 어긋난 게 또렷하게 들렸다. 침대 위에 올려놨던 옷을 거칠게 집어 방을 빼져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씻을 때는 이 졸음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빠르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감기기 직전에 가게 화장실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 엄청 침착한 척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게 지구를 기다리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아침이 되어 화장실에서 양치하고 나오는데 뜬금없이 숙소 문이 열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너네 데뷔 서포트. 박스에 이름 적혀있지?”
노란 박스테이프가 붙어있는 커다란 박스가 끝없이 숙소로 들어왔다. 어제 밤늦게 잠들었던 멤버들은 단체로 봉변당한 사람들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거실로 나왔고, 매니저 형의 설명 한마디에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헐. 이 박스 전부요?”
“어. 너무 많아서 들고 오느라 조금 구겨졌을 수도 있어.”
“지금 열어봐도 돼요?”
준이 제일 신난 듯 박스를 뜯을 칼을 찾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잠깐 생각에 빠졌다. 리얼리티 촬영 때문에 음식 만들어 먹었을 때 빼고 들어간 적이 없는데 부엌에 커터 칼 같은 게 있나?
“야, 야, 야! 그걸 들고 오면 어떡해.”
“이걸로 못 뜯을까요?”
“저건 상자지 음식이 아니잖아.”
역시나 커터 칼은 무슨, 김밥 자를 때 썼던 식칼을 들고나온 준에 기겁하며 휘영이 뺏어 들었다. 침착하게 저 물건은 박스임을 설명한 휘영이 다시 식칼을 원래 위치에 원상복구 시켜놓고 나왔을 때, 예준은 서랍에서 커터 칼을 꺼내고 있었다.
“형 있었으면 진작 꺼냈어야죠!”
“네가 식칼을 들고 올 줄은 몰랐지.”
칼날을 밖으로 빼낸 예준은 제일 들뜬 준의 박스를 가장 먼저 뜯어줬다. 커다란 박스가 열리자마자 팬들이 정성 들여 포장했을 아기자기한 상자들이 가득 보였다. 연한 노란색과 빨간색이 사선 패턴이 반복된 상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다른 포장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다 팬분들이 보내신 거예요?”
“개인적으로 보낸 사람들도 있는데, 거의 너네 개인 페이지에서 연합해서 보낸 거야.”
“우와…….”
가끔 홈페이지에서 노블 생일 서포트 내역을 보면서 입을 벌려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내가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이렇게 커다란 박스가 한 개도 아닌 세 개씩이나. 얼마 전까지 일반인 신분이었던 내가 누릴 호사라기에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대박. 형. 이거 저 닮았어요? 편지 보니까 저 닮아서 넣었대요.”
“그 캐릭터가 말이 좀 많고 시끄러운가 보다.”
“와…….”
대체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캐릭터 인형을 흔드는 준을 예준이 이제는 익숙하게 놀렸다. 저 형은 6살 차이나는 동생 놀리면 재밌나. 처음에는 맞받아치며 싸우던 준도 요즘은 슬슬 재미가 없어진 건지 예준이 놀릴 때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했다. 지금처럼.
“받았으면 인증해야 하는 거 알지? 이제 그만 뜯어보고 스케줄 있으니까 빨리 씻고 나와.”
이렇게 바쁜데 왜 숙소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냐고. 막내부터 화장실에 집어넣고 일단 급한 대로 박스들을 거실 구석으로 옮겼다. 양이 워낙 많아서 정리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엄청난 부피의 박스들 때문에 순식간에 좁아진 거실을 뒤로하고 우리는 하나뿐인 화장실이 빌 틈 없이 바쁘게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형. 이 모자랑 티셔츠랑 어울려요?”
“그 옷에는 이 모자가 낫지 않나.”
“그럼 이건 나중에 써야겠네요.”
방금 받은 선물을 바로 입고 나가겠다는 준을 휘영이 옆에서 봐줬다. 가끔 휴대폰으로 옷 쇼핑하는 것 같더니 센스가 좋았다. 와중에도 나중에 꼭 따로 써야겠다며 모자 하나를 소중히 밀어두는 준을 보며 팬들이 참 좋아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증 요정이 따로 없네.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가 나도 슬쩍 서포트 받은 물건 중 하나인 모자를 집어 들어 썼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샵에서 스타일링을 받고 도착한 곳은 깔끔한 사무실이었다. 저번에 촬영했던 잡지에 짧게 데뷔 관련 인터뷰를 싣는다며 단발머리의 기자가 온화하게 웃었다.
“긴장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대답하면 돼요.”
“네.”
말이 끝나고 녹음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트북 자판기에 손을 올린 기자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쇼케이스 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데뷔했다는 게 실감이 나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무난한 질문이 돌아왔다. 최대한 긍정적이고 바른 대답만 쏙쏙 골라서 하다 보니 걸리는 것 없이 금방 넘어갔다.
“데뷔 준비를 하면서 멤버들끼리 재밌었던 일화 같은 거 있어요?”
다섯 명에게 동시에 날아온 질문에 다 함께 서로의 눈치를 봤다. 딱히 생각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뤄진 시선 교환이었다. 그런 동생들의 시선을 눈치챈 듯 예준이 당당하게 리더로서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혹시 김경자 샐러드라고 아세요?”
“네?”
뜬금없이 튀어나온 샐러드에 기자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하나도 안 재밌잖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요?”
질문에 적합하지 않은 대답이라고 생각해서 급히 끼어들어 얼버무렸더니 더 궁금한 건지 집요하게 물어왔다. 결국, 뒤처리는 다 나지.
“네, 김경자 샐러드라고……. 그 샐러드가 있어요. 그걸로 멤버들끼리 게임을 했습니다.”
“무슨 게임이에요?”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일단 각자 한 통씩 열고, 그게 안에 방울토마토가 반으로 잘려서 2개 들어 있거든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있지도 않은 샐러드 게임룰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주절주절 이상한 룰을 늘어놨더니 기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글자 타이핑을 했다.
“숙소에서 되게 재밌게 노시네요.”
“다섯 명이 잘 맞아요.”
그 뒤로 개인 질문 두 개 정도를 더 대답하고 나니 인터뷰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노트북과 녹음기를 챙겨 빠져나가는 기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예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경자 샐러드가 재밌어?”
“하현아. 형이야.”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하극상을 저지를 뻔했다. 어디를 봐도 형으로 보이지 않는데 본인이 형이라고 강력 어필을 하는 바람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형.”
“근데 그 샐러드 게임은 뭐야. 하고 싶었어?”
“네?”
“룰이 엄청 디테일하던데요. 하고 싶었으면 말로 하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즉석에서 만든 김경자 샐러드 게임이 상당히 흥미로웠는지 멤버들이 몰려들어 놀리기 시작했다. 먹지도 않았는데 그 끔찍한 샐러드가 뭐가 예쁘다고 그걸로 게임을 해. 꺼지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휘저었지만 온종일 놀림은 계속됐다.
“예준이 형. 집 가서 게임 한 판 할래요?”
“김경자 샐러드 게임?”
이곳저곳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잠깐씩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도 그놈의 샐러드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헛소리를 했는데. 쿵작쿵작 잘도 노는 두 사람을 무시하기 위해 귀에 꽂을 이어폰을 찾는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질 않았다. 물론 챙긴 적이 없으니까 없겠지. 씁쓸한 기분에 아쉬운 대로 뒷자리에서 목베개를 끌어오는데 지구가 불쑥 이어폰을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어…….”
“같이 듣자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쓰세요.”
두 손에 이어폰을 똑바로 올려주고 지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참,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물씬 밀려왔다. 이어폰 필요한지는 어떻게 알았대. 이동할 때마다 빠짐없이 이어폰으로 노래 듣는 놈이 이거 없이 심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 번 웃고 뮤직 어플로 최대한 지구 취향의 노래를 찾기 시작했다.
방에서 보통 무슨 노래를 듣더라. 가끔 노래 틀어도 괜찮냐고 의사를 묻고는 침대 맡에 놓인 작은 스피커로 음악을 재생시키던 지구를 떠올렸다. 잔잔한 발라드류가 많았던 것 같다. 가끔 팝송도 나오긴 했는데 유명한 곡은 별로 없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그나마 제일 잔잔한 팝송을 골라 재생시킨 뒤 한쪽 이어폰을 지구 귀에 살짝 꽂아줬다. 돌아가 있던 고개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바로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남은 한쪽을 내 귀에 꽂았다.
“노래 좋네요.”
“응.”
한쪽만 꽂아서는 옆에서 계속 들리는 소음 차단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까보다 훨씬 평온하게 느껴져서 이어폰이 꽂혀있는 왼쪽 귀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랬더니 출처가 분명한 심장 뛰는 소리가 크지 않은 노랫소리를 가르고 들어와서 속으로만 몰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