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45화 (45/130)

#45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사장실에서 둘이 나왔고 그날 저녁에는 무려 고기가 도착했다. 숙소까지 친절히 배달 온 매니저를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카메라까지 다 끄고 거실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으며 예준이 말했다.

“일단 밥은 성공.”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ATM 엔터테인먼트가 내 생각보다 더 작은 규모라는 사실과 예준의 집안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장님이 멍청한 것도 포함인가. 정말 사장님의 최대 약점은 돈인가.

“많이 드세요.”

착실하게 고기를 구워 그릇 위로 놔주는 지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인터넷에 양 씨 재벌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예준과 전혀 닮지 않은 푸근한 인상의 대기업 회장 한 분만 나왔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에 감동하며 처음으로 예준을 형이라고 불렀다. 그에 예준은 황당한 기색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예준이 형이 된 이후 식사는 훨씬 나아졌다. 더는 샐러드가 오지 않았고 대신 굉장히 양호한 상태의 도시락이 매끼 왔다. 세 번에 한 번은 무조건 제육볶음이라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반찬도 정갈하고 맛도 있었다. 게다가 예준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온 건지 사장님이 한 번은 음식점을 잡아서 회식까지 시켜줬다. 돼지고기긴 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정확히 쇼케이스 12일 전부터는 외부에서 데려온 트레이너까지 따로 붙여줬고, 매니저도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건지 전처럼 다이어트를 강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처음보다는 훨씬 순조롭게 데뷔 준비가 이루어졌고 리얼리티 촬영이 끝남에 따라 카메라도 숙소에서 사라졌다.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회사 칭찬을 한 번 했다가 예준이 얼마나 면박을 줬는지 모르겠다.

“이제 밥 잘 준다고 다가 아니야, 트레이너는 당연히 붙여주는 거고.”

그 밖에도 제일 중요한 기획력이 이 모양인데 감동하면 어쩌자는 거냐, 처음 받았던 안무 영상을 생각해봐라, 나중에 굿즈 디자인이 걱정되지 않냐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고개만 거의 백 번을 끄덕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여러모로 편해진 환경 속에서 당장 눈앞에 새해가 다가왔다.

“형 그 도입부에 있잖아요.”

“도입부 왜?”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을 앞두고 제육볶음을 입에 넣으려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아직까지는 실력이 부족하다 보니 우리 중 제일 열정이 넘치는 준은 끊임없이 질문하곤 했는데, 밥 먹는 시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형들 다 숙이고 저 나가는 부분에요. 손 제스처 넣는 게 나을까요?”

“그 브이?”

“넵. 예준이 형은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손 반대로 뒤집어서 하는 게 낫겠다.”

“그렇죠? 저도 그걸로 하고 싶었는데 예준이 형이 계속 이걸로 하라고 해서.”

준이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제스처를 바꾸는 걸 예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야, 너 그럴 거면 나한테는 왜 물어봐?”

준이 해맑게 웃으며 예의상이라고 답했다. 그때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휘영이 물병 뚜껑을 따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지나면 지구 미자 탈출이네.”

“헐, 그러게요. 스물이네.”

생각해보니 지구가 열아홉이었다. 내일이면 스물이고. 앞자리가 다르면 왠지 모르게 나이 차이가 되게 많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스무 살이라니까 갑자기 확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도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커지긴 했다.

“술 한 잔 먹여야 하는 거 아니냐. 송년회 하자.”

“형 우리가 뭐한 게 있다고 송년회씩이나.”

“단어가 거창하긴 하네요.”

다들 말은 그렇게 해놓고 내심 원하는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술 사다 놓고 자정 지나면 딱 마시면 되겠다. 너는 사이다 마시고.”

좋다고 본인이 지갑까지 열겠다는 예준을 보며 마지막 남은 고기를 밥 위에 올려 꼭꼭 씹었다.

“물 좀 드세요.”

지구는 이제 거의 습관인지 내가 밥만 다 먹으면 귀신같이 알고 물을 내민다. 시원한 생수로 깔끔하게 입안을 헹구며 바로 옆에 앉은 지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한 번 훑었다. 대충 나보다 이마 하나는 더 큰 것 같던데.

“너 더 컸냐?”

“네?”

“첫 촬영 때보다 큰 거 같아서.”

그때도 나보다 크긴 했지만, 이것보다는 조금 작았다. 손가락을 펴서 대충 자란 키를 가늠해보는데 지구가 웃으며 내 손에 있던 물병을 가져갔다.

“촬영하면서 2cm 컸어요.”

“계속 크는 것 같은데. 뭐 특별히 하는 거 있어?”

“운동했어요. 집에서.”

어떻게 집에서까지 땀 흘릴 생각을 하지. 춤출 때 빼고는 더운 날 움직이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척 봐도 탄탄해 보이는 몸 보니까 부럽긴 했다. 몸만 봐서는 지구에게 형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입시 준비할 때는 나도 몸은 좋았는데.

“왜요?”

“나도 해볼까 해서. 이제 안 크려나?”

20대에도 크긴 한다던데. 괜히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지구가 더 안 커도 된다며 내 생각을 말렸다.

“형은 지금이 좋아요. 아, 작은 키도 아니니까.”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운동은 포기하기로 했다. 다 먹은 도시락 용기를 치우고 연습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자정까지 한 시간 남았다.”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들을 모아 무대 구성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편의점에 들렀다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11시였다. 데뷔가 코앞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했지만, 하루 정도는 뭐 어떠냐 해서 다들 편하게 늘어져 있었다. 카메라 신경 쓴다고 숙소에서도 와이셔츠를 입고 있던 예준은 이미 백수가 된 지 오래였다.

며칠 전에 방을 뺀 카메라의 필름에 담긴 영상들은 쇼케이스 이틀 전부터 방송할 예정이었다. 아마 지금쯤 편집은 거의 끝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눈에 들어온 과자 봉지 하나를 뜯었다.

“당장 5일 뒤면 데뷔잖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우리 안 정한 게 너무 많아.”

바닥에 넓게 펼쳐놓은 과자 봉지에서 자연스럽게 세 개를 집어 든 예준이 말했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다. 곧 데뷔해야 하는데 연습만 죽어라 하느라 막상 정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에서 정해주지 않으니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야 했다.

“리더도 뽑아야 하고.”

“그걸 왜 뽑아요. 형이잖아요.”

리더를 뽑자는 소리에 준이 왜 새삼스러운 걸 묻냐는 듯 눈을 떴다. 그에 예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하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이 많다고 다 리더 하는 거 아니다.”

“형은 돈도 많잖아요.”

“그거랑 리더랑 무슨 상관이냐…….”

예준은 진심으로 기피하고 싶은 듯했다. 나도 사실 리더 소리를 듣자마자 예준이 떠오르긴 했다. 하고 싶은 말도 다 하고 살고 제일 영향력 있으니까. 하지만 지구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예준이 형이 리더 하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

“아…….”

쭉 예준을 리더로 밀던 준이 한순간에 탄식을 흘리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신인 아이돌 리더로서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무시랑 홀대도 많이 당할 거고 방송국 갑질도 심할 거고.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상황을 그려보는데 순간 괜히 오싹해졌다.

“근데 솔직히 예준이 형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데.”

입안으로 과자 하나를 밀어 넣으며 휘영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었다. 휘영은 뭔가를 이끌거나 도맡아서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고, 지구는 막 미자를 넘겨 어중간한 나이고, 준은 애초에 후보에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휘영이 나는 어떠냐고 묻길래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다급히 고개를 저어 후보에 오르지 못하게 봉인해버렸다.

“형밖에 할 사람이 없어요. 해주세요.”

결국, 다 같이 합심해서 예준에게 리더 자리를 주기 위해 부탁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안 한다고 계속 거절하던 예준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무릎을 꿇었고, 우리는 튼튼하지만, 매우 불안정한 리더를 얻었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우리 그룹명 말고 정해진 거 하나도 없었네요.”

“뭐 또 필요하지?”

“팬덤 이름도 정해야 하고, 음……. 인사법?”

“그런 거 다 우리가 정하는 거야?”

“잘 모르겠는데 사장님이 정해주실 것 같지는 않잖아요.”

사장님이 정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원래 보통 회사에서 정해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안 해줄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사장님이 정해주는 게 더……. 여전히 쁘띠의 충격을 잊지 못한 상태였다.

“그냥 안녕하세요, 하면 인사지.”

“에이. 뭔가 특색 있게 해야죠.”

“우리 자체가 특색이야.”

“아, 예…….”

예준의 헛소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흐린 준이 시계를 가리켰다.

“근데 자정 넘었어요. 카운트다운했어야 되는데.”

준이 아쉬운 표정으로 주스 뚜껑을 따기 시작했고, 예준이 자연스럽게 비닐봉지에서 술을 꺼냈다. 병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종이컵에 차례대로 투명한 액체가 담기기 시작했다.

“올해도 파이팅하자.”

심플한 말과 함께 종이컵 다섯 개가 맞부딪혔다. 유일하게 준의 종이컵에만 오렌지 주스가 찰랑거렸다. 술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몇 번 마셔보지 않아서 살짝 한 모금만 먼저 마시는데 지구가 종이컵을 들고 물처럼 원샷했다.

“야, 너 그걸 그렇게 한 번에.”

“생각보다 더 쓰네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지구가 빈 종이컵을 내려놨다. 달달한 커피에도 시럽을 왕창 뿌려 먹는 애가 저 쓴 걸 원샷 했으니. 황급히 등을 두드려주며 생수를 가져와 먹이는데 예준과 휘영은 벌써 두 잔째였다.

“그러면 일단 인사는 넘기고 팬덤명부터 정할까요?”

혼자서 달콤한 주스를 망설임 없이 꿀꺽꿀꺽 마신 준이 박수를 짝, 쳤다. 술 들어간 상태에서 팬덤명을 어떻게 정하겠다고.

“사장님이 우리 마음대로 정하라고 하셨으니까. 후보 몇 개 뽑아놓고 정합시다.”

준이 혼자서 열심히 주도하는 동안 예준은 아무 말 없이 벌써 석 잔째를 들이켰다. 뭘 저렇게 빨리 마시는 거야.

“우리 팀명 뜻이 꿈이잖아요. 약간 관련된 거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 어어. 그래.”

……물처럼 마시길래 잘 마시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예준은 이미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여러 명이 인사불성이 되면 뒤처리가 괴로워질 것 같아 일단 급한 대로 휘영이라도 제어하기로 했다.

“천천히 마셔. 천천히.”

휘영에게 반 모금씩 마시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마쳤을 때 지구는 이미 취한 상태였다. 얘 진짜 알쓰 아니냐. 충격적일 정도로 빠르게 맛이 갔다. 휘청이는 상체를 황급히 잡아 받쳤다.

“아니면, 우리 팀명 따서 레블리 이런 거 어때요. 레브랑 러브랑 발음도 비슷하고.”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형이 한 명도 없는데도 준은 꿋꿋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 땅바닥을 바라보며 가만히 술만 마시던 예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그거 뭔 뜻인지 모르지?”

“뜻이 있어요? 그냥 러블리랑 어감 비슷해서 해본 말인데.”

준이 놀란 듯 예준이 허벅지를 툭툭 치며 물었다.

“무슨 뜻인데요?”

“흥청대며 논다는 뜻이야.”

“…….”

어감이 예쁜 단어는 팬덤 이름으로 쓰기에 굉장히 부적합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준은 다른 후보를 찾으려는 듯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취한 예준은 본인과 굉장히 어울리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애칭은 흥청이들로 하면 되겠다. 우리 흥청이들! 흥청망청 놀아볼 준비 됐어요?”

“형. 정신 차려요. 우리 지금 팬덤명 정하는 거예요……, 형 노는 서클 이름 아니에요.”

맛이 간 예준의 옷자락을 잡으며 준이 애원했다. 송년회고 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조용히 잠이나 잤어야 했다. 이렇게 단체로 술을 못 마실 줄 알았으면. 일단 팬덤명이고 뭐고 오늘은 그른 것 같아서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가만히 앉아있던 지구가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표로 사과드릴게요.”

잔뜩 꼬인 발음으로 있지도 않은 팬들에게 흥청망청이라는 망발을 대신 사과하는 지구를 보며 준이 입을 벌렸다.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애가 술 마시고 헛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나도 헛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진지한 게 더 어이없었다.

“야, 정신 차리고 일어나 봐.”

바닥과 일심동체가 될 기세인 지구를 열심히 일으켜 세우는데 옆에서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함이 엄습해와서 지구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더니 바닥을 구르는 병이 보였다. 내용물을 바닥에 울컥울컥 토하고 있는.

“뭐야, 누가 다 마셨어.”

바닥을 흥건히 적셔가는 게 보이지 않는지 휘영이 병을 집어 들고 중얼거렸다. 네가 쏟았잖아. 오른쪽에서는 술이 흘러오고 왼쪽에서는 지구가 내 몸에 기대 어깨를 눌러왔다. 진퇴양난 그 자체였다.

“흥청망청 파이팅!”

그거 우리 그룹명 아니라고. 치미는 욕을 애써 삼키고 준이 건네준 휴지로 급하게 바닥을 닦았다.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잔뜩 있었다. 데뷔 쇼케이스까지 정확히 5일 남은 시점. 나는 다시는 이 멤버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