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형, 왜 안 드세요.”
뚜껑을 덮고 도시락통을 옆으로 미는 순간 지구가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소스 한 점 묻지 않은 젓가락을 쥔 손이 허공에 멈췄다.
“다 먹었어.”
“지금 도시락 뚜껑 연지 1분도 안 됐는데요.”
기어코 내려놨던 내 도시락 뚜껑을 열어본 지구가 가득 차 있는 채소를 보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샐러드 못 드세요? 아니면 어디 아프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샐러드를 먹지 않는 이유를 끊임없이 유추하는 지구에게 손을 한 번 내저었다.
“그냥 못 먹어서 그래. 괜찮아.”
“그럼 뭐 다른 거라도 드셔야죠. 먹은 것도 없는데. 제가 이 앞에서 사 올게요.”
매니저는 잠시 전화를 받으러 밖에 나간 상태였다. 알아보는 사람 많은 곳에 막 돌아다니면 안 된다면서 외출도 막는데, 거기에 음식을 사러 가는 거면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조금 전에 다이어트하라고 샐러드 던져줬는데.
“다이어트하라는 건 알겠는데, 무작정 샐러드만 던져주는 건 이해가 안 되네.”
혼잣말인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살벌했다. 항상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애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깜짝 놀라서 지구를 쳐다봤는데 금세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도시락통을 닫고 있었다. 얌전히 채소를 입안 가득 넣고 씹던 예준이 물었다.
“샐러드 못 먹어요?”
“네.”
“아, 이것 참.”
예준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며 젓가락을 툭 던졌다. 떨어진 젓가락이 애처롭게 연습실 바닥을 굴렀다.
“잠잘 시간 안 주는 거야 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겼더니, 하다 하다 풀떼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연습 때문에 활동량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샐러드는 좀 너무 가지 않았나?”
“밥만 들은 도시락이라도 좋을 것 같은데. 고기 먹고 싶다.”
불과 어제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팔팔한 고등학생의 육류에 대한 열망을 저지시킬 수 없는 듯했다. 그 많은 채소를 언제 다 먹었는지 준의 도시락통에는 바닥에 묻은 소스만 남아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지.”
“소문 무성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디렉터들은 다 어디에 가 있는 건지 조카한테 받아오고. 가사도 다시 써, 춤도 바꿔. 일은 존나 못하는데 스케줄은 잘도 집어오고.”
예준의 빈정대는 말에 지구가 자연스럽게 동의했다.
“직원이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매니저도 대형에서 온 것처럼 안 보이는데.”
“딱 보면 각 안 잡히냐? 거기서 일 못해서 잘리고 여기 와서 칼 가는 거잖아.”
신랄하게 매니저를 비롯한 회사를 씹어대는 두 사람을 보며 휘영과 준은 침묵을 유지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그 두 사람도 대화에 가담했고, 뒷담화는 생각보다 판이 커졌다.
일이니까 다들 꾹 참고 있던 것들이 분위기를 타고 한 번에 터져 나왔고 나는 별말 없이 채소 조각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으세요?”
혹시 모르니 한 번 먹어볼까 해서 했던 짓인데 괜히 쪽팔리게 됐다. 겨우 목구멍 안으로 넘긴 뒤에 괜찮다는 표시를 쉴 새 없이 해 보였지만 지구는 황급히 물병 뚜껑을 따서 친절히 내 입에 물려주기까지 했다.
“쭉 마시세요.”
마시기 좋으라고 물병을 살짝 위로 들어주는 친절한 행동에 정신없이 목구멍으로 물을 넘겼다. 아무래도 샐러드는 꾹 참고 먹을 수 있는 범위의 음식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조만간 얘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무슨 얘기?”
“진중한 얘기요. 적어도 밥은 똑바로 먹어야죠. 형 먹지도 못하는 거 매끼 받을 수도 없고.”
지구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니저가 연습실을 문을 밀고 들어왔다. 다 먹었냐고 묻는 말에 지구가 내 도시락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매니저 형, 앞으로 하현이 형 거는 그냥 도시락으로 갖다 주시면 안 될까요.”
“왜.”
“아예 못 먹어요.”
“아……. 그래?”
매니저는 뜻밖의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혹시 그래도 꾹 참고 먹어야 한다고 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아무리 사람이 고지식해도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몰랐지. 아예 못 먹는다고?”
“네.”
“일단 알겠어. 하현이 거만 따로 바꾸든지 할게.”
“이왕이면 저희 샐러드도 바꿔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하루 종일 스케줄하고 연습하는데 이걸로 못 버텨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요구를 읊는 지구를 마주 본 매니저의 표정은 약간 당황스러워 보였다.
“원래 보통 이 시기쯤에 식단 관리 들어가야 해.”
“그건 아는데 꼭 편의점 도시락일 필요는 없잖아요.”
항상 네, 네 하며 투정 한 번 부린 적 없던 지구가 예상 밖의 말을 꺼내서 놀란 듯 매니저는 더는 받아치지 않았다. 그냥 알았다, 한 마디를 마치고 연습하라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매니저 형 생각보다 쉽게 가네요?”
“스스로 알겠지. 이 살인적인 일정에 편의점 샐러드는 좀 아닌 거.”
예준이 반쯤 비운 도시락통을 저 옆으로 밀어 넣으며 연습하자고 일어났다. 잠시 배고픔을 잊기 위해 노력하며 노래 연습을 시작했고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잠까지 쏟아졌다. 졸리기 시작하니까 목도 잠기는 것 같아서 일단 숙소로 돌아가자고 먼저 제안했다.
“많이 피곤해?”
“좀.”
“숙소 가도 리얼리티 때문에 바로 못 잘 텐데.”
차에 타자마자 2주라는 시간 동안 많이 친해진 휘영이 피곤한 얼굴로 살짝 하품하며 물었다.
“너도 피곤해 보이는데.”
내 말에 휘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네가 지금 상태 제일 안 좋아 보이는데. 안무 때문에 무리한 거 아냐?”
“내가 원래 잠이 많은 편이라 그래.”
“넌 지금 다이어트가 아니라 피곤한 게 문제야. 쇼케이스 전에 푹 잘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
숙소 앞에 내려 바로 아파트로 들어가려는데 순간 지구가 어깨를 아프지 않게 살짝 잡아 왔다.
“안 들어가?”
내 물음에 지구가 잠시 기다리라며 속삭였다. 매니저 형이 운전하는 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지구가 몸을 돌렸다.
“가요.”
“어디 가는데?”
“편의점이요. 형 아까 드신 거 하나도 없잖아요.”
매니저가 알게 된다면 필사적으로 막을 계획을 말하는 지구의 옆으로 나머지 멤버들이 몰려왔다. 결국 단체로 숙소 옆 편의점으로 향하게 된 우리는 누가 봐도 수상한 꼴로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편의점 알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는 것도 이해가 됐다. 남자 다섯이서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수상하게 보일만도 하지. 혹시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겠지 생각하며 침착하게 삼각김밥 하나를 골랐다.
“더 드세요.”
단호하게 말한 지구는 나를 라면 칸으로 이끌었다. 컵라면 하나를 고르게 한 뒤에는 과자도 한 봉지 사게 했고, 하나 골랐던 삼각김밥은 어느새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일단 이만큼만.”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으로 지구가 본인 체크카드를 꺼내 결제를 마쳤다. 아니, 내가 사도 되는데. 말리려고 손을 뻗자마자 ”나중에 사주세요.”하고 웃길래 결국 얌전히 손으로 넘어오는 음식을 받아 조리를 시작했다.
“그냥 들어가서 자려고 했는데 배라도 차니까 훨씬 낫다. 고마워.”
“아니에요. 더 드셔도 돼요.”
“괜찮아. 배불러.”
“아니면 몇 개 몰래 숨겨서 숙소에 가져갈까요?”
상냥하게 웃으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지구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준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들고 있는 것 중에 지금 먹을 수 있는 것만 고르고 내려놔.”
“몰래 가져가면 안 걸리지 않을까요……?”
“우리 숙소에 카메라가 몇 개더라.”
“넵.”
들고 있던 빵 몇 개를 다시 내려놓는 준을 보며 절로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지구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나한테는 숨겨서 가져가자고 하지 않았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에 대해 질문을 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를 버렸다.
* * *
“다시 해보자.”
“네.”
살짝 뺐던 헤드셋을 다시 귀에 꽂으며 악보를 열심히 응시했다. 벌써 같은 부분만 다섯 번째였다. 조금 더 리듬을 주면서 부르는 게 좋겠다는 작곡가의 지적을 내 목은 따라가질 못했다. 이미 충분히 음에 맞춰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리듬감을 어떻게 주냐고.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계속 불러봤지만 뭔가 계속 걸리는 것 같았다.
“아, 조금만 더 가면 좋을 텐데.”
“다시 할까요?”
“몇 번만 더 해보자.”
결국, 한참의 시도 끝에 겨우 오케이를 받고 다음 파트로 넘어간 뒤로도 끊임없이 지적이 이어졌다. 작곡가가 침착하고 참을성 있는 성격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이미 와장창 깨지고도 남았을 딜레이였다.
“저 잠깐만요, 물 한 번만…….”
“목 너무 썼어? 그럼 잠깐 쉬고 지구 들어가자.”
“네.”
황급히 녹음실에서 나온 나에게 준이 물병을 건네줬다. 정신없이 목을 축이는 사이 지구가 녹음을 시작했다. 흔들림도 없고, 깨끗하고. 확실히 메인보컬 자리가 아깝지 않은 노래 실력이었다.
“형 녹음 얼마나 남았어요?”
“여기랑 여기 남았어.”
“이 부분 계속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이고……. 힘내요, 형.”
준이 다소 과격하게 등을 두드리며 응원을 건넸지만, 썩 도움이 되진 않았다. 한낱 ‘서브 보컬 2’인 내 파트가 메인보컬인 지구 파트 뺨치게 많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문제가 있었다. 사장님이 내 파트가 많아야 한다며 팍팍 밀어줬다는데 전혀 고맙지 않았다.
“하현이 다시 시작하자.”
다시 녹음실로 들어가고 체감상 반나절을 보낸 뒤에야 겨우 나올 수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작곡가를 만족시키지는 못한 채 기계를 만지겠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였다.
녹초가 된 상태에서 거의 좀비처럼 녹음실에서 나오는 나를 지구가 자연스럽게 끌어 소파에 앉혔다. 나머지 멤버들이 마저 녹음을 끝내는 동안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래도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걸 라이브는 아니어도 춤추면서 불러야 한다니, 아직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인 데다 시간도 한참 부족했다.
“밥 먹어라.”
녹음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매니저가 비닐봉지를 내려놨다. 봉지 안에는 도시락이 다섯 개 들어있었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다이어트 도시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샐러드 말고도 다른 먹을 게 있어서 사과 몇 조각을 집어 먹고 있는데 도시락을 빤히 바라보던 예준이 손을 들었다.
“사장님 지금 회사에 계세요?”
“계시는데 왜?”
“저희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예준이 자연스럽게 지구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했고 매니저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웬 드릴 말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예준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컴플레인^^]
[일을 제대로 못하면 밥이라도 좀]
[무슨 도시락에 사과가 반이야 저게 밥이냐 사과지ㅋㅋㅋㅋㅋ]
예준의 채팅을 읽고 다시 보니 진짜 사과가 절반이었다. 전부 샐러드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름 만족하면서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 저렴해 보였다. 짧은 채팅을 받고 바로 방을 폭파시킨 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요. 좋은 곡 나올 것 같아요.”
작곡가는 누가 봐도 피곤한 낯이었지만 애써 거짓말을 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며 녹음실에서 나와 다시 우르르 차를 탔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우리보다 큰 그릇을 가진 건 차뿐이었다. 정말 쓸데없이 많은 자리를 보며 괜히 옆자리 의자에 다리를 올려 두 칸을 차지하고 갔다.
“근데 이게 진짜 받아들여지긴 할까요?”
“그러니까요. 다 회사 마음 아니에요? 너무 방치하는 수준이긴 한데 이걸 계약 위반이라고 하기는.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사장실 문 앞에 나란히 선 멤버들이 불안한 심정을 하나둘 꺼내놨다. 솔직하게 맞는 말이었다. 일단 우리는 계약을 했고, 계약 파기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짬밥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데뷔도 안한 상태인데 뭔가 협의가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예준은 여유로워 보였다.
“돈만 있으면 됐지.”
그 말이 정말 영화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 같았다. 세상 모든 일을 돈으로 처리해버리겠다는 비열한 악당 대사. 예준이 두 번 노크하더니 사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지구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마자 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닫히고 한참 동안 사장실은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