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여전히 방 안에는 무인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옆 침대는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거실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다들 모여있는 것 같았다. 재빨리 머리를 몇 번 매만지고 방문을 당겼을 때 보인 것은 옆방에서 싱글 침대 하나를 끌어내고 있는 준과 휘영이었다.
“너네 뭐 해?”
혹시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이사 가나. 황당한 마음에 물었더니 의자에 앉아있던 지구가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대꾸했다.
“예준이 형 잠꼬대 시끄러워서 침대 빼겠대요. 아, 형. 이리 와서 물드세요.”
저 난리가 나고 있는데도 지구는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양 내게 태연히 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어제는 분명 잠버릇 없다고 한 것 같은데. 아무 무늬 없는 깨끗한 흰색 컵을 두 손으로 잡으며 예준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자 시선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예준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혼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뒷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매일 혼자 자니까 잠버릇이 있는 줄 몰랐죠.”
뭔가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침대는 거실로 나왔고, 잠을 채 다 쫓기도 전에 전화로 호출당한 우리는 회사로 왔다.
두 번째 방문하는 회사는 다시 봐도 아담했다.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들어간 곳은 회의실 같은 공간이었고 중앙 의자에는 사장님이,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어서 와라. 숙소에 있는 카메라는 잘 적응되고?”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활짝 피어있는 낯이었다. 직접 일어나셔서 손수 의자를 하나하나 빼며 인사까지 해주는 친절함을 마구 뽐낸 사장님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데뷔는 1월 초쯤으로 계획돼있고, 그전에 CF 촬영도 몇 개 들어갈 거라 아마 바쁠 거야.”
사장님 입에서 떨어진 계획들은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했다. 이제 며칠 뒤면 11월도 끝인데 1월 초에 데뷔면 준비 기간이 고작 한 달 남짓하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정식 데뷔도 안 했는데, 그 중간에 CF 촬영이 한 개도 아니고 몇 개라니. 실로 입이 떡 벌어지는 빡빡한 계획을 사장님은 별거 아닌 투로 쭉 설명했다.
“서바이벌ID 들어가기 전부터 계획해온 프로젝트라 컨셉이랑 안무도 다 잡혀 있어. 너네 지금 화제성 생각해서 데뷔 쇼케이스도 최대한 큰 공연장 빌려서 할 거고.”
많이 들뜬 듯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았다. 청춘 그 자체라며 한참 데뷔 컨셉을 설명하던 사장님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뒤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룹명은 이 중에 하나로 할 거야.”
회사 직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낸 결과라는 수많은 후보는 죄다 불어였다. 누가 적었는지 예쁜 필기체로 뜻과 함께 적혀있는 단어들을 쭉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인터넷을 쓰셨구나’였다. 희망찬 단어들은 죄다 모아온 것 같은 후보들을 보며 잠시 고민을 하는데 예준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왜 다 불어인가요?”
“하하, 내가 젊을 때 프랑스에서 살았거든.”
그게 그룹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선택지는 이게 전부였다. 가장 최선의 선택지를 찾기 위해 빽빽한 글씨들을 인상을 찌푸려가며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준이 손가락을 뻗었다.
“이거 어때요. 레브. 뜻이 꿈이래요. 여기 있는 단어 중에서는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준이 말끝을 흐리며 은근슬쩍 나머지 후보들을 깎아내렸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지금 막 내 눈에 장난으로 적어 놓은 거라고 믿고 싶은 쁘띠 어쩌고가 걸려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제일 괜찮긴 하네요.”
흐린 눈으로 종이를 보고 있던 휘영이 한 박자 늦게 찬성 의사를 던졌다. 지구까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님이 웃으며 종이를 다시 회수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을 줄 알았다. 팬덤 이름은 너희끼리 천천히 정하고 오늘부터 바로 연습 들어갈 거야. 2층에 연습실이…….”
“사장님.”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쪽이 너희 매니저.”
아까부터 쭉 투명인간처럼 앉아있던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크게 날카롭게 생긴 얼굴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싸늘한 게 예준과 쌍벽을 이룰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박명환이고 앞으로 쭉 너희 담당할 매니저야. SY 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저 하다가 여기로 왔는데.”
SY 엔터테인먼트라면 수많은 히트 가수들을 배출한 대형 기획사였다. 왠지 모를 카리스마의 원천이 어딘가 했더니 짬밥인 모양이었다.
“클럽 출입, 팬이랑 친목 기타 등등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숨겨도 다 티 나니까 생각도 하지 말고. 행동거지도 조심해야 하고 앞으로 관리도 빡세게 들어갈 거야. 아이돌 쉽게 하는 거 아닌 건 알지?”
그 뒤로 매니저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계속 튀어나오는 '그놈들'이라는 주어를 보니 아마 전 소속사에서 담당한 연예인이 상당히 속을 썩인 것 같았는데, 너무 같은 말이 줄줄이 이어지니 혼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스케줄 엄청 빡빡하니까 체력 관리 잘해야 해. 아, SNS는 금지야.”
“저 이미 있는데요.”
“탈퇴해. 페북이든, 인스타든 다.”
질문은 예준이 했는데 휘영이 더 실망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풍경 사진이 가득 담긴 인스타그램 계정을 탈퇴하는 손가락에 미련이 가득해 보였다. 사진 찍어 올리는 계정까지 굳이 탈퇴해야 하나, 묻기도 전에 매니저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부터 바로 연습 들어갈 거야.”
지체 없이 밖으로 나가는 매니저와 사장님을 따라 도착한 2층에는 연습실이 딱 세 개 있었다. 제일 왼쪽에 있는 좁은 연습실에서 땀 흘리며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살짝 보고 바로 눈앞에 있는 연습실로 들어갔다.
“타이틀곡이랑 수록곡 들어보고 안무 확인하고.”
연습실 한쪽 벽면에 고정되어 있던 블라인드가 천천히 내려왔다. 온전히 우리 것이 될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이라 괜히 긴장됐다. 그리고 약 30분 뒤에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백 개 정도 떠올랐다.
“어…….”
바로 옆에 앉아있던 지구의 입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틀림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노래는 분명 괜찮았다. 적당히 중독성 있는 멜로디는 아이돌 타이틀곡으로 크게 손색은 없었다. 근데 아까 분명 청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청춘 컨셉이…… 저 타이틀곡 맞나요?”
“맞아.”
아까 사장님이 입이 닳도록 떠들던 청춘은 대체 누가 먹은 걸까. 전체적인 노래 분위기만 봐서는 학창시절의 풋풋한 청춘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사 때문에 혼종이 됐다. 고작 4분이 조금 넘는 노래는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사랑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발라드에서나 다룰 법한 절절한 이별 얘기까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인생까지 되돌아봤다. 무슨 문학 작품도 아니고. 너무나 입체적인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는 풋풋한 첫사랑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사를 한참 곱씹으며 작곡가의 큰 뜻을 유추해보려 했으나 금방 실패했다.
문제는 비단 가사뿐만이 아니었다. 안무도 전체적으로 봐서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중간중간 어울리지 않은 동작들이 자꾸 튀어나와서 보는 내내 눈을 괴롭게 만들었다. 저 부분 수정하고 싶다. 자꾸 차오르는 욕망에 다리가 간질간질할 정도였다.
두 번째 재생되기 시작한 안무 영상을 보다가 또다시 문제의 장면과 맞닥뜨렸다. 저 국민체조 같은 건 뭐냐고. 결국, 참지 못한 몸이 상체를 반쯤 들어 올렸다.
“최대한 빨리 마스터해야 해. 녹음도 들어가야 하고.”
“저기 사장님.”
“왜?”
매니저가 떠드는 동안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팔짱을 끼고 보고 있던 사장님이 갑작스러운 부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약간 수정하는 건 괜찮을까요?”
“뭘?”
“안무요.”
“수정? 해.”
사장님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허락의 말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사까지 수정해도 된다고 하셨다. 대체 누가 만든 가사고 안무길래 이렇게 쉽게 수정을 하게 해주는지 의아했다.
“어떤 분이 만드신 건데요?”
“우리 조카.”
“조카요……?”
상상하지도 못한 대답에 황당함이 밀려오는데 사장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젊은데 재능이 뛰어나서 무용하는 애인데 작사에도 소질이 있다고. 어쩐지 마음껏 바꾸라고 하길래 뭔가 이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은 먼저 수정을 하고, 최대한 빠르게 연습을 진행하기로 합의를 보고 짧은 회의를 끝냈다. 갈 길이 멀다. 한숨을 쉬며 안무 영상을 재생했다.
* * *
엄청난 가성비로 만들어진 첫 타이틀곡은 모두에게 의견을 물어 틈틈이 안무를 수정하느라 손이 많이 갔다. 시간이 없어도 부족한 안무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가며 안무를 거의 다 완성했을 때쯤 찍은 첫 CF가 아직도 기억났다.
“잘 부탁해요. 워낙 화제성이 좋아서 서바이벌 ID 방송 중에 계약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우리는 무려 데뷔도 하기 전에 CF를 두 개나 찍었다. 하나는 유명 베이커리 홍보 CF였고, 나머지 하나는 과자 CF였는데 둘 다 촬영하면서 엄청나게 먹느라 배가 터질 뻔했다. 실제로 준은 다시는 저 회사에서 나오는 다른 과자도 안 먹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데뷔 무대에 서고 나서 해도 되지 않나 싶은 것들은 모두 데뷔 전에 이루어졌다. 크고 작은 인터뷰들과 잡지 촬영부터 앨범 자켓 촬영까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것들이 몇 시간 간격으로 계속 이뤄지니 적응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무조건 해야 했다. 긴장할 시간도 없고 머리를 비우고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촬영이 끝나있는 식이었다.
“고개 살짝 내리고! 그렇지, 잘생겼다!”
오늘 프로필 촬영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는 옷을 입고 요구하는 포즈를 취하며 눈만 몇 번 깜빡이고 있으면 촬영이 끝났다.
“휘영이 올라와.”
다음 타자를 부르는 감독님의 목소리에 황급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형 사진 진짜 잘 나왔어요.”
한참 전에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 옆에 앉아있던 지구가 손짓했다. 한껏 분위기를 잡은 내 사진을 스스로 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일단은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제 이게 검색 포털마다 걸리는 거예요.”
지구는 웃으면서 사진을 가리켰다. 그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왠지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내 이름을 검색하면 저 사진이 나오는구나. 항상 누군가를 검색해 보기만 했던 내가 그 인물 정보란에 이름을 올린다는 사실이 여전히 다가오지 않았다.
“좀 안 믿긴다.”
“저도요.”
기분 좋게 웃으며 지구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세팅 안 한 머리가 어울린다고 해서 딱히 크게 손대지 않은 머리카락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일주일 전부터 지구가 습관처럼 내 머리를 살짝 매만지기 시작했는데 기분 좋을 때마다 나오는 행동인 것 같았다.
“촬영 끝났다, 연습하러 가야지.”
그리고 지난 2주 동안 격하게 느낀 점이 있다면 매니저가 생각보다 훨씬 빡빡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심지어 간단한 농담조차 받아주지 않아서 대화하기도 힘들었다. ”안 돼.”와 ”나중에 해.”를 제외하고는 스케줄 얘기밖에 안 하고.
철저히 비즈니스라고 해도 앞으로 계속 함께할 사람들인데 조금만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벌써 2주째였다.
차를 타고 소속사 건물까지 이동하는 그 잠깐 사이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잠을 잤다. 연습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수면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연습을 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숙소에 돌아가면 카메라들이 리얼리티 촬영도 해야 한다며 차가운 렌즈로 쏘아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곤한 얼굴로 미션 카드를 집어 들어야 했다.
“내일 녹음 들어갈 거니까 오늘까지 끝내야 해. 알았지?”
매니저가 연습실 불을 켜며 단호한 목소리로 오늘의 미션을 줬고, 우리는 가장 완벽하게 노래를 숙지한 지구의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주어진 파트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형 조금만 더 힘줘서요.”
“아, 그래.”
네가 제일 인기가 많으니 파트도 많아야 한다는 기적의 논리를 펼친 사장님이 파트를 왕창 몰아주신 덕분에 잘하지도 못하는 성대만 개고생 중이었다. 내일이 녹음이니 목 관리도 해야 하고. 틈틈이 물을 마셔가며 연습 막바지에 열을 올리는 사이 매니저가 저녁 식사를 들고 연습실로 들어왔다.
“밥이다!”
벌떡 일어나 봉지를 건네받은 준이 기분 좋게 웃는 사이 매니저가 단호한 목소리로 초를 쳤다.
“오늘부터는 식단 관리도 들어갈 거야.”
“헐.”
준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매니저의 손에서 넘어온 봉지를 열었다 닫았다. 곧 봉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신선해 보이는 닭가슴살 샐러드였다. 아, 편의점 거구나. 신선해 보인다는 말은 몇 초 가지 않아 취소됐다.
내 몫의 샐러드를 건네받고 뚜껑을 열어 젓가락으로 휘적댔다. 숨이 죽어있는 초록색 채소들이 젓가락의 폭정에 힘없이 옆으로 밀려 쓰러졌다. 채소의 양만 봐서는 한 통에 2인분쯤 돼 보였다.
“형. 저희 배고픈데요.”
“너희 요즘 바빠서 계속 삼시 세끼 인스턴트만 먹었잖아. 휘영이 이 키로나 늘었던데.”
“휘영이 형 워낙 말라서 티 안 나잖아요. 저 형은 좀 쪄야 해요.”
“체중 관리도 관리고 얼굴에도 나빠. 붓는다니까. 아이돌은 얼굴이 생명인데 잘 관리해야지. 조금 넉넉해지면 운동도 시작할 거야.”
“헐…….”
준이 고개를 숙여 샐러드를 바라봤다. 한참 성장기일 나이에 닭가슴살 샐러드와 잦은 만남을 가지게 생겼으니 충격을 받았을 법도 했다.
물론 내 충격은 두 배였다. 싫어하는 운동을 한다는 건 둘째치고 왜 하필 메뉴가 샐러드인가에 대해서. 원래 편식이 심한 편이긴 했지만, 샐러드는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이 억지로 먹이다 토한 적이 있어서 먹을 수가 없는 음식이었다.
차라리 나물류면 배고파서라도 먹을 텐데. 닭가슴살 샐러드가 맞긴 한 건지, 맨 위에 딱 세 조각 보이는 닭의 흔적을 두 젓가락에 해치우고 슬쩍 뚜껑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