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11월 23일, 서바이벌ID 마지막 방송 이후 우리 다섯 명이 함께 만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각자 부모님을 동반해서 회사와 계약 절차를 밟고 자연스럽게 소속사 앞 카페에 모여 음료를 마시던 도중에 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 이름…… 진짜 독특한 것 같아요.”
다들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던 이유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전달된 계약 소속사의 이름은 무려 ATM 엔터테인먼트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말해달라고 요청까지 했는데 세 번을 다시 들어도 맞는 이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ATM은 돈 뽑는 기계뿐이라 사장님 이니셜을 따서 만들었다는 설명을 들어도 쉽게 이미지가 벗겨지질 않았다. 이니셜로 만드실 거면 영어식으로 해서 TMA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형 들어봤어요?”
“아니. 처음 들어봐…….”
환영한다며 싱글싱글 웃던 사장님의 얼굴이 굉장히 선하게 보이긴 했다. 노블을 좋아하면서도 딱히 다른 그룹에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는 터라 전체적인 연예계 지식이 매우 얄팍한 편이었고, 당연히 중소 엔터테인먼트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건물은 새로 지었는지 얼마 안 된 듯 비교적 깨끗했지만, 규모는 썩 크지 않았다. 회사 직원들도 적었고 인테리어라고는 소속 가수들 사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다 모르는 사람들이라 사장님이 자랑할 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뭐, 사장님 이니셜이라고 하시니까요.”
“어쩌면 숨겨진 뜻이 있을지도 몰라요.”
한참 아무 말 없이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예준이 처음 입을 열었다. 동그란 안경을 썼는데도 전혀 가려지지 않는 날카로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예준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항상 잘 세팅되어 있던 머리가 오늘은 자연인 그 자체였다.
“왜요?”
“ATM이 바닥에서 나름 유명하거든요. 돈 귀신 붙은 거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예준의 말에 모두의 손이 동시에 멈췄다. 특히 준은 마시던 중간에 사레가 걸리기까지 해서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 혼자 조용히 냅킨을 뽑아 건넸다.
“설마 그 ATM이 진짜 그…….”
“소속 가수들 팬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있긴 하더라고요. 진짜 뜯어먹으려고 지은 이름 아니냐고. 직접 겪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소문이 그렇다고요.”
예준이 일단 진정을 시키려는지 소문일 뿐이라고 뒤늦게 강조했지만 이미 다들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소속사가 소속 가수의 활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노래부터 프로그램 출연까지 소속사를 거치지 않는 부분이 없으니까. 노블의 소속사는 굉장히 일을 잘해서 항상 팬들도 칭찬만 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를 겪어본 적도 없었다.
“일단 소문이니까요.”
그냥 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다들 각자 집으로 해산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집으로 가려다가 지구에게 붙잡혀서 하루 종일 수험표로 놀러 다녔다. 밥 먹고, 빙수 먹고, 디저트 먹고……. 결론은 맛있는 것만 잔뜩 먹다가 돌아왔다.
그 이후의 일상은 의외로 평탄했다. 계약을 끝낸 이후로 3일을 내리 집구석에 박혀 지냈으니 당연히 이렇다 할 일이 생길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누릴 수 없을 자유일 테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자연인처럼 시간을 보냈고, 그 조용한 생활은 오늘로 끝이었다.
-세면도구는 챙겼어?
“네. 근데 통화 요금은 괜찮으세요?”
-빨리 끊고 싶다는 말이니?
“아뇨.”
어머니는 아들의 짐을 점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비싼 통화 요금까지 감수하시는 중이었다. 지구 반대편이니 지금쯤 아침일 텐데도 어머니 목소리는 조금도 졸음에 잠기지 않은 상태였고 벌써 다섯 번째 반복되는 세면도구 이야기에 점점 지쳐갔다.
“다 챙긴 것 같은데요.”
-그래도 다시 한번 봐. 혹시 빠뜨린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잘 모르는 타지로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숙소를 들어가는 것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유난히 걱정하셨다. 애초에 세면도구도 새로 사면 그만인 거 아닌가. 끝없는 잔소리에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속으로만 삼켰다.
“저 지금 출발해야 하니까 이만 끊을게요.”
-그래. 안부 전화 종종 하고.
진작 출발한다고 할걸. 순식간에 종료된 통화에 급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바닥과 마찰하며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가 듣기 좋았다.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당분간을 올 수 없을 집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형, 타요!”
아파트 주차장에 떡하니 서 있는, 누가 봐도 눈이 갈법한 커다란 검은 차 창문으로 준이 얼굴을 내밀었다. 와중에 창문 뒤로 가려진 목 부분은 전혀 안 보이는 걸 보니 선팅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이 캄캄한 탓도 조금 있고.
운전석에서 내린 분이 차량 뒤쪽 트렁크를 열어주셔서 캐리어를 싣고 바로 차를 탔다. 꽤 넓은 내부에는 이미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대체 몇 인용 차인지 빈 의자 수가 꽤 됐다. 열 명도 거뜬히 타겠는데. 잠시 멍청하게 빈자리를 세다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지구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짐 잘 챙기셨어요?”
꽂고 있던 이어폰을 가볍게 뽑으며 지구가 묻길래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거라고는 세면도구랑 옷밖에 없지만. 아, 잘 때 쓸 책도 한 권 넣긴 했다.
“근데 숙소 들어가는 순간부터 카메라 있다고 했잖아요.”
준이 안전벨트로 가로막힌 몸을 힘겹게 돌리며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쭉 생활하게 될 숙소에 입주하는 그 순간부터 리얼리티 촬영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아마 방마다 카메라가 배치되어 있을 것 같긴 했다.
“엄청 기대돼요. 제가 뭘 하든 다 찍히는 거죠?”
“불편한 거지.”
기대된다는 준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예준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본인 위주로 수정해줬다.
TV에서 보기만 했지, 리얼리티 촬영 같은 걸 직접 해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신나 하는 준을 보며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프로필 촬영 때는 카메라가 잡아먹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었나.
“너 복근 있냐?”
“없죠.”
“근데 카메라 앞에서 자신 있게 옷 갈아입을 수 있어?”
예준이 대놓고 준의 순수한 기대를 짓밟는 동안 휘영이 조심스럽게 나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꽤 먼 자리에 앉아 있는 휘영을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왜요?”
“그, 이제 같은 그룹이잖아요. 하현 씨도 스무 살이시고. 그러니까 말 놓으실래요? 아무래도 리얼리티도 찍고 해야 하니까 편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휘영이 조용히 웃으며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동갑이었구나. 진작 말을 놓자고 할 걸 후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그럴걸. 편하게 해.”
“아……. 아직도 너무 조장님이라 이름만 부르기가 좀.”
휘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슬쩍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먼저 놓자고 해놓고 쑥스러워하는 것도 너무 휘영다워서 일단 내버려 두기로 하고 가만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지구를 톡톡 쳐 불렀다.
“지구야.”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조금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얼굴을 보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너도 말 놓을래?”
“말이요?”
“휘영이 말 들어보니까 그래도 앞으로 쭉 같이 활동할 텐데 불편할까 봐.”
나름 친밀한 접근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구는 몇 초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직 존댓말이 편해요.”
놀라울 정도로 정중한 거절에 두 번은 권유하지 않았다. 그래, 하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려는데 지구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형이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가요.”
“그래, 천천히 해.”
손으로 두어 번 머리를 토닥여주고 고개를 앞으로 했다. 그리고 바로 시야에 잡히는 시끄러운 두 사람에 조용히 고개를 숙여 자는 척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도착했어요.”
차 키를 뽑았는지 일정하게 계속 전해지던 진동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보인 것은 반듯하고 깨끗한 아파트였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외관에 다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감탄을 했는데 내부는 더 괜찮았다.
“헐, 복층!”
현관문을 열자마자 카메라가 보여서 집 안으로 들어가던 발을 살짝 멈췄다. 자연스럽게 카메라 눈치부터 보는 나머지 사람들과 달리 준은 해맑게 방들을 돌아다니며 혼자 카메라들과 대화를 나눴다.
“저쪽 방에 이층 침대랑 그냥 침대 하나 있고, 이 방에 두 개 있어요.”
각 방에 있는 침대 개수까지 알아 온 준이 거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서 미션 카드 같은 걸 집어왔다. 미션 카드를 보니 그제야 이 상황이 다 리얼리티로 방송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서 갑자기 힘이 조금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백수처럼 방에 늘어져 있어도 안 되고, 자연인 같은 꼴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자유롭게 룸메이트를 정하고 주무세요. 오늘은 이게 다인가 봐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미션 내용을 순식간에 읽어버린 준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잠버릇 있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준이 안심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진짜 다행이네요. 편하게 정해도 되겠다. 다 잠버릇 없으면 상관없으니까 지구 형이 하현이 형이랑 쓰세요.”
마치 우리 둘이 쓰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양보해주는 준의 행동을 보며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지구가 팔을 잡더니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딱 아늑하고 좋네요.”
“그건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둘이 쓰래.”
“전 좋은데.“
지구가 웃으며 캐리어를 안쪽으로 끌었다. 물론 나도 좋긴 했다. 막방 무대를 같이 연습하면서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조용히 나누는 음악 얘기도 재밌고. 최고의 룸메이트 감이긴 한데 그 흔한 가위바위보 하나 없이 깔끔하게 방을 나누는 게 의아했다.
고개를 방 밖으로 내밀어보니 셋이서 한창 가위바위보를 하는 중이었다. 아마 싱글 침대를 쓸 사람을 정하는 것 같았는데 아무도 3인실 방을 쓰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어 보였다.
“형 어느 쪽 침대 쓰실래요?”
“똑같은데 뭐.”
“그럼 제가 이쪽에서 잘게요. 창문 옆은 바람 들어와서 추워요.”
바람 들어와서 춥다면서 창문 바로 앞 침대로 향하는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잡아서 저지할까 하다가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서 뻘쭘히 반대쪽 침대 옆에 캐리어를 세웠다.
그리고 바로 아무 생각 없이 짐 정리를 시작했다. 캐리어의 80%를 차지하고 있던 옷들을 다 끄집어내 구석에 있는 작은 옷장에 차곡차곡 넣고 침대 바로 옆 콘센트에 휴대폰 충전기를 꽂자 모든 짐 정리가 끝났다.
“아직 다 못 정리했어? 도와줄까?”
“괜찮아요. 얼른 가서 씻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욕실 하나밖에 없던데.”
그 말에 후다닥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명이 화장실 하나……. 앞으로 얼마나 전쟁이 벌어질지 예상이 됐다.
바디워시부터 샤워 타월까지 잘 배치되어 있어 만족스럽게 씻고 나오자마자 바로 준이 총알같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졸려.”
예준과 휘영이 차례대로 화장실 앞에 줄을 서는 걸 보고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편하게 눕자마자 지구가 짐 정리를 끝낸 듯 캐리어를 닫았다.
“다 했어?”
“네. 이제 씻고 자려고요.”
“대기 인원 둘인데.”
“아…….”
지구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옷을 다시 내려놨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걸어와 내 침대 옆 바닥에 앉아 물었다.
“신경 쓰시는 부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불 켜고 잔다거나.”
“원래 켜고 자긴 하는데 꺼도 잘 자.”
“그거 말고는요?”
그 뒤로도 한참 이것저것 물어보던 지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슬 씻으러 가겠다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지구가 나간 방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무인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내 위치를 인식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렌즈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메라 렌즈가 너무 빤히 쳐다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사람 눈도 아니고 카메라 렌즈랑 시선을 맞추면서, 텅 빈 방에서 혼자 인사를 하려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희는 이제…… 잡니다. 네.”
안 하는 게 훨씬 좋았을 멘트를 마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지구를 기다린다는 게 깜빡 정신을 잃고 잠을 잤고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밝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