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떨림을 나누면 반이 되나. 꽉 잡아 오는 손을 굳이 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렇게 가만히 한참을 있었다. 그런데 얘는 떨린다는 애가 왜 저렇게 평온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맞잡은 손도 적당히 따뜻했다.
그렇게 손을 마주 잡은 동안 예준이 무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뒤에서 스태프가 다급하게 손짓을 하며 우리를 불렀다.
“두 사람 대기해주세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뒤로 뛰어가는 동안에 예준이 무대를 시작했는지 반주가 크게 울려 퍼졌다.
“소개 멘트 끝나고 바로 올라가면 돼요.”
스태프에게 안내를 받은 지구가 준비를 시작했다. 건네받은 마이크를 쥐고 심호흡을 하는 모습에 뛰어오느라 놓은 왼쪽 손으로 등을 토닥였다. 말 없는 토닥임에 지구의 시선이 이쪽으로 조심스럽게 돌아왔다. 그러더니 답지 않게 짓궂게 웃어 보였다.
“저보다 잘해야죠, 형.”
그러더니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말할 타이밍 재고 있었던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무대 뒤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연습 내내 들었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렸다. 그 듣기 좋은 목소리를 귀에 꼭꼭 담으며 헛웃음이 터졌다. 이거보다 어떻게 잘하냐.
짤막하게 준비된 무대들이 어찌나 빨리 끝나는지 지구의 목소리도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비로소 내 차례였다.
“준비하세요. 조금 있다 올라갈 거예요.”
급히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에 마이크를 손에 꼭 쥐었다. 무대에 서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동안 섰던 그 수많은 무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자. 규모부터가 완전히 다른 무대였지만 내 마음대로 소극장으로 줄여 보기로 했다.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환한 조명 밑으로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맨 앞줄에 계신 부모님부터 바로 눈에 들어왔다. 한 번 실패한 모습을 보여드렸는데 두 번 반복할 수는 없었다.
길지 않은 반주가 끝나자마자 발을 띄웠다. 올라오기 전에는 엄청 떨리더니 막상 시작하니까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귀가 먹먹한 것도 아니었다. 반주 소리, 마이크를 통해 퍼지는 내 목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짧은 무대가 끝나고 드디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바로 눈에 들어온 건 부모님이었다. 대체 언제 받은 건지 내 이름이 적힌 슬로건까지 들고 계신 상태였다. 내려가기 전에 어머니와 눈을 맞추고 한 번 웃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무대를 보여드렸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몰려와서였다.
“문자투표가 곧 종료됩니다. 응원하는 참가자의 이름을 적어서 빨리 보내주세요.”
내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MC가 문자투표 마감을 알렸다. 전광판에 계속 표시되고 있던 투표수는 이미 블라인드 처리된 상태였다. 5, 4, 3, 2, 1. MC의 목소리 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해져 카운트다운이 홀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감됐습니다.”
MC가 씩 웃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각자 다른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사람들 틈에서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심사위원 점수와 문자투표수를 합산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카메라는 계속해서 우리 앞을 서성였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MC가 결과가 들어있는 카드를 들고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온 것은 약 5분 뒤였다. 그리고 카드를 쥐고 MC는 한참을 시간을 끌었다. 물론 MC가 자발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고 저 뒤쪽에서 스태프가 계속해서 시간을 끌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5위부터 순서대로 발표하겠습니다.”
보는 사람이 애간장이 탈 정도로 루즈한 진행이었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3분쯤 지났을까, 한참 뜸을 들이던 MC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첫번째 데뷔조 멤버가 될 5위는…… 정준 군입니다!”
놀랍게도 첫 번째로 불린 사람은 준이었다. 본인도 불려놓고 많이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뻣뻣한 걸음걸이로 무대 위로 걸어갔다.
“성장의 아이콘이에요. 프로그램 진행하는 동안 제일 많이 성장한 참가자라고 하더라고요.”
“아, 저, 그게…….”
항상 싱글벙글 잘 밀어붙이던 넉살은 어디로 실종됐는지 준이 할 말을 못 찾고 더듬거렸다.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관대한 미소를 지어 보인 MC가 준에게 마이크를 건네줬다.
“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맞는지 잘 실감이 안 나요. 진짜, 아. 꿈인 것 같은데…….”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한 준의 소감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바람에 결국 MC가 넉살 좋은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준을 옆자리에 세웠다.
“처음으로 데뷔 멤버가 됐어요. 그럼 같은 멤버가 될 4위 발표하겠습니다.”
또 5분 정도 질질 끌던 MC가 이번에 호명한 사람은 놀랍게도 휘영이었다. 분명 아까 봤을 때는 문자 투표수가 확연히 낮았던 것 같은데.
체념 수준으로 반응 없이 앉아있던 휘영은 놀라서 일어날 생각도 안 했다. 결국, 옆자리 사람이 톡톡 두드려 줬을 때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무대 위로 삐걱삐걱 걸어갔다. 저렇게 걸어 나가기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둘이 똑같았다.
“아, 전 진짜 전혀 생각도 못 해서…….”
휘영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울컥 눈물부터 터트렸다. 여기저기서 울지 말라는 위로의 목소리들이 날아왔고 그 말을 들은 건지 휘영이 겨우 고개를 들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훌쩍이는 게 절반이라 제대로 들리지 않은 소감을 끝내고 휘영이 웃으며 준의 옆으로 걸어갔다. 우는 걸 보니까 왜 내가 다 찡한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는 걸 봐서 그랬나.
“세 번째로 데뷔조 명단에 이름을 올린 3위는…… 양예준 군입니다!”
다음으로 호명된 건 예준이었는데 어찌나 당당하게 걸어가는지 레드 카펫으로 착각할 뻔했다. 무대 컨셉 때문에 입은 정장과 깔끔하게 올린 머리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
“이렇게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주신 사랑만큼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수상 소감은 또 어떻고. 준비해 온 사람처럼 정갈하고 완벽했다. 그래도 뭔가 감정이 복받치기는 하는지 끝부분이 떨렸다. 꾸벅 고개를 숙인 예준이 옆쪽으로 이동하는 걸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에 같이 밥 먹은 사람들이네.’
이쯤 되니 어제 먹었던 음식들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벌써 2위 발표까지 왔네요.”
벌써라니, 5위부터 여기까지 오는데 체감상 30분은 걸린 것 같은데. MC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발표해버렸다는 듯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을 끌다가 예상한 이름을 호명했다.
“온지구 군!”
“저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놀러 가기로 한 거 잊으시면 안 돼요.”
지구 팬들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 목소리가 귀에 잘 박혀 들어왔다. 왼쪽에 앉아 있던 지구가 사라지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무대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더니 갑자기 확 긴장되기 시작했다. 물이 마시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물병은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회 주신 만큼 노력할게요. 스태프분들, 부모님, 투표해주신 분들 전부 다 감사합니다.”
차근차근 고마운 사람들을 부르는 지구의 소감은 짧고 담백했다. 쟤도 저 정도면 준비해온 거 아닌가.
지구가 예준의 옆에 가서 서자마자 나란히 선 네 명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촬영하면서 제일 친해졌던 사람들이 저렇게 데뷔 멤버로 확정돼서 서 있는걸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사람 미래 모르는 거라더니, 진짜 이렇게 되기도 하는구나.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혼자 몇 분이나 했을까.
“박하현 군!”
멍한 정신을 간신히 파고든 내 이름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까지 걸어가는 길이 생각보다 더 길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중앙 무대까지 잘 걸어갔다.
“축하해요.”
MC가 건넨 마이크를 받아들고 정면을 보자마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까 준이 말하는 거 보고 뭐가 저렇게 벅찰까 했는데, 실제로 내가 잡아보니까 진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밤새 춤 연습은 했지만 수상 소감 연습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타로 들어와서 사서 통편집을 당해가며 순위 상승을 절대적으로 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쩌다 보니 마지막 방송에서 데뷔조 명단에 이름까지 올리게 됐다.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면 절대 안 믿을 소리였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받을 줄 몰랐어요.”
정말 편집만 잘해서 투명인간처럼 만들어 놓으면 툭 떨어질 줄 알았다.
“여기 서 있으니까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가 또 부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흐뭇하신 표정에 시선을 돌려 아까 형이 있던 위치를 쳐다봤더니 옆에 있던 여자분이 형을 마구 내리치셨다. 그 같이 온다던 동기분이시구나.
“지금까지 좋은 프로그램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묵묵하게 수고해주신 스태프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다들 스태프분들에게도 수고하셨다고 하길래 나도 따라서 감사 인사를 하고 이어서 부모님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이렇게 데뷔라는 큰 선물 주셨으니까 앞으로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지금은 전처럼 겉과 속이 다른 소감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 전처럼 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은 아닐 것 같았다. 사실 조금 울컥하긴 하는데 울어도 방송 끝나고 하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축하합니다.”
MC가 박수를 치자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박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박수 소리가 홀 가득 울리자 정신이 다 혼미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앉고 싶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분들이랑 응원해주신 시청자분들께 인사할게요.”
작게 속삭이면서, 앞자리를 터주며 뒤로 물러나는 MC를 보며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야기가 전달됐는지 단체로 무대 앞쪽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잠깐 기다리며 눈대중으로 줄을 반듯하게 맞췄다.
“앞으로.”
왜 하필 마지막 인사를 나한테 시켜서. 짧은 단어 하나 말하는데도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밝은 조명이 눈을 사정없이 찔려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와 동시에 함께 내려가는 네 명의 고개를 보며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한참 허리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으로 다가온 지구가 내 허리를 일으켜줬고 바로 사정없이 폭죽이 터졌다.
얼마나 많이 준비한 건지 엄청난 양의 폭죽 잔재들이 홀 가득한 사람들을 배경 삼아 떨어져 내렸다. 사정없이 머리 위로 내려앉는 종이들 그 아래 온전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