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밤을 꼬박 지새우다시피 짠 무대 구성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꽤 괜찮았다. 안무도 적절히 들어간 것 같고 전체적인 느낌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중요한 건 내 노래뿐이었다. 목만 십분 넘게 풀고, 계속 물을 마시며 불러본 노래는 괜찮다고 하기도 묘했다. 층간 소음 때문에 늦은 밤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연습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제 공지해준 연습실을 가기로 했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대여했으니 편한 시간에 가서 연습하면 된다고 했던 피디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바로 편한 옷을 챙겨 입었다.
방송국보다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편인 연습실에는 금방 도착했다. 24시간 사용해도 된다더니, 아직 8시도 안 됐는데 입구에 관리인이 앉아 있었다.
“이름이?”
“아, 박하현입니다.”
이름을 말하자 관리인이 파일철 하나를 꺼내 들더니 손가락으로 종이를 쭉 훑었다. 내 이름을 찾아냈는지 볼펜을 내밀길래 바로 사인을 했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인을 하는 방식으로 출입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가장 아래쪽에 준과 휘영의 사인이 있었고, 위쪽에 한 명이 더 와있는 상태였다.
내 연습실을 찾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와중에 불 켜진 연습실이 눈에 들어왔고, 안에 휘영과 준이 같이 있었다.
둘이 같은 노래였던가? 생각은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 어제 준의 손에 들린 민트 초코를 보며 휘영이 정말 그게 맛있냐고 물었으니까, 같은 노래일 리가 없었다.
“어, 형 빨리 왔네요!”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가서 내 연습이나 해야지, 하고 몸을 돌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준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내 팔을 잡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규모는 아담했지만, 거울로 이루어진 왼쪽 벽 때문에 넓어 보이는 공간에는 전자 피아노도 한 대씩 놓여있었다. 촬영용 카메라도 있고.
“여기 난방도 잘 돼요.”
아마도 준이 입고 왔을 두툼한 겉옷은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그 두툼한 겉옷의 정체는 패딩이었다.
……지금이 한겨울이었나? 다시 한번 생각해봤지만, 아직 11월이었다. 그것도 중순.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은데. 내 이상한 눈빛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준은 그저 따뜻하다며 좋아했다. 그 순수한 얼굴을 보면서 12월에는 털목도리라도 하나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휘영 씨 연습실 아니야?”
“휘영이 형이 안무 잠깐만 봐달라고 해서요.”
“일찍 왔네. 학교 안 갔어?”
“마지막 연습이라고 했더니 이해해주셨어요. 프로그램 촬영 날마다 빠져서……. 애들이 갈 때마다 놀려요. 슈퍼스타 가신다고.”
준이 얼굴을 쓸어올리며 두 손으로 감쌌다. 쾌활하고 밝은 준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얼마나 놀렸을지 상상이 가서 왠지 웃겼다. 하지만 떠올리면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잠시, 준이 자기 무대를 한 번 봐달라며 노래를 틀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처음보다 확실히 늘어서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열심히 봤다. 그리고 한참 어젯밤에 구상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안무도 점검해주고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팔 동작은 반대쪽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순수하게 던진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준 휘영이 세 번째로 재생되는 하이라이트 부분을 끄고 말했다.
“진짜 이게 더 괜찮은 것 같아요.”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고요.”
“근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은 것 같아서.”
그 말을 듣고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노래 연습하러 와서 내 연습실은 안 가고 여기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저 노래 연습하러 갈게요.”
“아, 형 같이 가요! 저도 슬슬 연습하러 가려고요.”
준과 나란히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마자 휘영이 계속 연습을 하려는지 노래를 틀었다. 그 열정적인 동작을 뒤로하고 준은 자기 연습실로 들어갔고, 나도 제일 끝에 있는 내 연습실을 겨우 찾아 문을 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촬영용 카메라가 깜빡이고 있었다. 카메라를 한 번 힐끔 바라보며 아이컨택을 하고 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휴대폰으로 MR을 틀고, 챙겨온 가방에서 악보를 꺼냈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자유롭게 연습을 하고 있음에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마지막 생방송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일주일 하고도 이틀인데 잠이 올려야 올 수가 없었다.
내일의 봄은 올 거야.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는 것부터 시작해서, 악보를 들고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 건반도 눌러보면서 음을 찾는 것까지 나름 착실하게 연습을 진행했다. 중간중간에 잠시 목을 쉬게 할 때도 노래가 계속 흘러나와서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았다. 이제 반주만 나와도 입에서 줄줄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래, 그 정도로 연습하는 게 맞는 거지. 오히려 과하게 떨지 않는 스스로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새삼 기대감이라는 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놈인지 실감했다.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고. 생각이 더 깊어져서 쓸데없이 수렁으로 말려들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벌렸다.
“형, 들어가도 될까요?”
똑똑. 한참 악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음을 체크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만 들어도 지구였기에 직접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줬다.
“늦게 왔네.”
“학교 들렀다가 오느라요.”
학교에서 수업받고 바로 온 줄 알았더니 옷은 사복이었다. 후드 집업에 달린 모자를 벗는 지구를 가만히 보다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툭툭 털어주며 물었다.
“넌 학교 가?”
“아, 제가 정리할게요.”
지구가 내 손을 살짝 막으며 스스로 머리를 털어냈다. 그 행동에 뭔가 머쓱해져서 손을 슬쩍 내려놨다. 방금 진짜 엄마 같았겠다, 뭐 그렇게 자연스럽게 뻗었지.
“담임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잠깐 들른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3일 뒤에 수능이더라고요.”
수능이라는 단어에 그제야 지구가 고3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슬슬 수능 볼 때라고 생각은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능을 얘기하는 지구의 얼굴은 그냥 평온해 보였다. 대학은 계획에 없다고 했으니 별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수능 신청은 했어?”
“네. 친구들이 안 봐도 수험표는 받으라고 해서.”
수험표는 여러모로 유용하긴 했다. 이것저것 할인받을 수 있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니, 힘겨운 수능을 끝낸 사람들에게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존재였다. 약간 프리패스권 같은. 물론 나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멘탈 추스르느라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공부는 열심히 해?”
한국예고는 선생님들이 전공뿐만 아니라 학업에도 압박을 세게 가해서 생각보다 성적 경쟁도 심했다. 그래서 다른 곳에 비해 등급 따기가 힘들었는데, 코피 흘려가며 성적 관리를 위해 용쓰던 때가 생각나서 괜히 아련해졌다.
“엄청 못하는 건 아닌데 정시로 대학 갈 정도는 아니에요.”
어느 정도 성적인지 바로 감이 올 정도로 깔끔한 대답을 한 지구가 매고 온 가방에서 악보를 꺼냈다. 나랑 같은 곳에서 다운 받아온 건지 똑같은 모양이었다. 중요한 건 한 장이 아니었다. 스테이플러로 찍은 악보 뭉치가 족히 다섯 묶음은 돼 보였다.
“왜 그렇게 많아?”
“형 악보 있으세요?”
“어, 있는데.”
“그럼 됐어요. 혹시 몰라서 많이 뽑아온 거라.”
배려 한 번 통 크게 하는구나. 한 묶음만 빼놓고 나머지 악보들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은 지구가 바로 옆에 앉았다.
“대충 구상은 해보셨어요?”
“춤은 다 짰는데…….”
그렇지, 노래가 문제다. 미래가 이렇게 바뀔 줄 알았으면 학생 때 노래도 조금 배워보는 거였는데. 가끔 노래방에 가긴 해도 다들 춤으로 얻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고성만 질러대기 일쑤였고. 듣는 곡이라고는 차트 위쪽에 있는 유명 곡들과 노블 노래가 전부일 정도로, 척을 지고 살아온 노래와 단번에 친해지는 게 힘든 건 당연했다. 그래도 듣는 건 좋아했는데.
“여기 도입부 한 번 불러보실래요?”
갑자기 등에 와닿는 손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더니, 지구가 이쪽으로 몸을 기울여 악보를 손가락으로 짚어주고 있었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도와주려는 건가 싶어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딱딱한 가사 위에 음을 덧입혀 두 마디를 불렀다. 뭔가 1:1 개인 강습을 받는 느낌이라 괜히 긴장됐다.
“잘 부르셨어요.”
대체 어디가 잘 부른 건지 당사자인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예의상 해주는 말에 태클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형 목소리는 진짜 좋아요. 쓸데없는 기교도 없고 담백하게 부르시니까 조금만 연습해도 확 괜찮아지실 거예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작전인가 보다. 그 뒤로도 지구는 한 마디 한 마디 순서대로 불러보라고 한 뒤 적절한 조언과 칭찬을 마구잡이로 섞어 말해줬다.
그리고 노래 평가에서 그치지 않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직접 노래 부르는 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지구의 비법 전수는 팀 미션 할 때 알려준, 이미 다 잊어버린 호흡법을 다시 알려주는 거로 그치지 않았다.
“일단 많이 부르는 게 중요한데 시간이 없으니까요. 형은 춤까지 추면서 불러야하니까, 안정적으로 내려면 힘이 배에 들어가게 해야 해요. 목으로 부르면 목소리도 불안하고 금방 지치니까, 이 자세로……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한 줄만 불러보세요.”
소리를 또렷하게 내는 법, 고음을 올리는 법, 성대를 여는 법까지 다양하게 알려주는 지구 덕분에 보컬학원에 온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엄청 친절한 1:1 맞춤형 수업이라 크게 어렵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지구는 내가 조금이라도 안되면 멈췄다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거나 했던 설명을 다시 반복해주면서 시범까지 보여줬다. 무엇보다 이렇게 칭찬만 들으면서 배우는 게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아까보다 소리 나오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이제 괜찮아. 너도 연습해야지.”
“저도 지금 연습 되고 있는데요, 뭐. 노래 하나하나 뜯어보는 중이에요.”
아무래도 끝까지 도와줄 기세길래 다른 쪽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춤은 안 넣을 거야?”
“조금이라도 들어가긴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일단 생각은 해뒀어요.”
“그럼 지금부터 춤 연습하자.”
내가 지구에게 노래를 알려줄 수는 없으니, 춤으로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스스로 굉장히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악보를 잠시 내려놨다.
“저.”
안 도와주셔도 돼요. 이미 뒷말이 예상됐지만 못 들은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예상 못 한 대답 때문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필요 없다고 할 줄 알았더니. 이렇게 나오면 나야 좋았다.
“이 부분 동작은 생각해봤어?”
“네. 앞으로 나가면서…… 이렇게요.”
“팔은 안쪽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봐봐. 하나, 둘, 셋.”
“아, 안쪽이 더 깔끔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어서 한 번 해보자.”
연습생 생활을 해서인지 지구는 춤도 평균 이상으로 잘 췄다. 알려주면 곧잘 따라했고, 아이디어가 많아서 진행 속도도 빨랐다. 그렇게 온종일 엎치락뒤치락 서로 도와가며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날 집은 지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다. 혹시라도 들키면 시끄러워질 거라며, 후드 집업 모자까지 뒤집어쓴 지구가 나를 구석에서 잘 가려준 덕분에 집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사실 퇴근 시간을 한참 오버해서 사람이 별로 없기도 했고.
-형 1분 31초 있잖아요. 여기 들어갈 때.
“응, 거기 왜?”
그 뒤로도 쭉 연습을 함께 하면서 전화통화를 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지구의 연습실에 불이 켜지는 일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거기 카메라는 찍을 대상을 잃은 상태였다.
전 참가자들 중에 함께 연습하는 건 딱 우리뿐이었다. 하다못해 예준은 ”누가 보면 듀엣 무대인 줄 알겠다.”라는 소리까지 했지만, 함께 해서 얻은 게 훨씬 많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했다.
연습하는 사이에 수능이 지나고 12월이 부쩍 가까워졌다. 무대에서 쓸 AR 녹음도 마쳤고, 노력한 덕분에 노래도 그럭저럭 들어줄 만할 정도로 발전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작년 실기시험 날 이후로 쭉 틀렸다고 생각해왔는데 일주일 사이에 그 생각은 다시 뒤집혔다.
“1번부터 리허설 시작할게요!”
무대 장치 설치가 한창인 커다란 홀 안을 쭉 둘러보며 물을 한 번 시원하게 들이켰다. 대망의 생방송은 바로 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