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감기몸살이니 몸을 따뜻하게 하고,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는 말과 함께 처방전을 떼주셨다. 빳빳한 처방전을 쥐고 바로 밑에 있는 약국으로 내려왔을 때까지도 눈가가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박하현 님?”
“네.”
옆에 앉아있는 지구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약사가 부르는 소리에 지구가 벌떡 일어났다. 급히 약사에게 다가가는 걸 말리기도 전에 이미 지구는 약사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후에 복용하세요. 별거 없는 약사의 설명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지구가 약봉지를 받아 이쪽으로 걸어왔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드세요.”
“어, 그래.”
약봉지가 담긴 비닐을 받아들고 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냥 참았으면 되는걸, 왜 갑자기 확 터졌는지 모르겠다. 수능이 코앞이라 그랬는지, 후배를 만나서 그랬는지, 열이 나서 그랬는지.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화끈화끈함 때문에 도무지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침묵하며 걷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아파트 건물을 한 번 올려다보고, 옆에 반듯하게 서 있는 지구를 한 번 봤다. 세 번 정도 시선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도 지구는 아무 말 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
“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입이 원망스러워졌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는 울어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데 그중에 한 번이 무려 방금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나한테 아직 존댓말을 쓰는 후배 앞에서, 내 춤의 가치를 높게 사주는 말 한마디에 울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도 어색해서 고개 푹 숙이고 온 주제에 들어왔다 가라는 소리는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
아니다, 너도 바쁠 텐데 가봐. 말을 바꾸려고 했던 내 행동은 빠른 대답으로 저지당했다. 지구와 나란히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 보니까 집에 먹을 게 없는데. 며칠 전에 사 온 게 남았으려나? 엘리베이터가 집까지 쭉쭉 올라가는 동안에도 뭘 줘야 하나 하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지구가 현관문 옆쪽,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섰다. 이유를 물었더니 뭘 묻냐는 듯이 당연한 표정으로 ”뭐 정리할 거 있으실 것 같아서요.”하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애들 집에 놀러 갈 때 문이 열리자마자 쳐들어가던데, 원래 이렇게 집안 정리할 시간을 주는지 차분한 태도였다.
“그냥 들어와도 돼.”
딱히 치워야 할 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문을 열자마자 지구를 들여보냈다. 쓰레기를 바닥에 무작정 내버려 두는 성격도 아니었고, 매일 집에 도착하자마자 허물 벗듯 바닥에 흩뿌려놓는 옷들은 다음날에 다 정리하니 바닥은 깨끗할 테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안쪽으로 들어간 지구를 소파 위에 앉혀놓고 바로 냉장고로 달려갔다. 최대한 힘차게, 활짝 열어젖힌 냉장고 안에는 생수만 잔뜩 들어있었다.
형이 사다 놓으라고 할 때 말 좀 들을걸.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형이 사다 놓으라고 한 건 술이었잖아. 있어봤자 줄 수 없는 음료였다.
보통 집에 들어오면 주스 한 잔 정도는 따라 줘야 하지 않나. 투명한 물이 담겨 있는 페트병들을 보며 눈에 힘을 줘봤자 주스로 변하는 마술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이걸 주기에는 좀,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것 같은데…….
“선배.”
“어? 냉수 먹고 속 차릴래?”
“네?”
황급히 쓸데없는 주둥이를 다물어봤지만 커다랗고 정확한 발음을 지구가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뒤늦은 후회는 쓸모가 없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며 웃는 지구와 눈이 마주쳤다.
“주세요. 물 마시고 싶어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컵을 꺼내 물을 따라 건넸다. 그냥 생수일 뿐인데도 지구는 CF 촬영을 하는 사람처럼 시원하게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춤이랑 노래 연습 말고 CF 촬영 연습 같은 것도 하나?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 마신 컵을 받아들었다.
“데려오긴 했는데 먹을 게 없어서.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아요. 뭐 먹으러 온 것도 아닌데요. 근데 선배 일단 누우세요.”
물 마실 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지구가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을 것을 요구하길래 얼떨결에 편한 옷으로 환복도 하고, 손에 이끌려 침대 위에 누웠다.
이거 뭔가 손님이 아니라 간병해주러 온 느낌인데. 친절하게 수건의 위치까지 물은 지구가 물수건을 제작해와 이마에 올려줬다. 식사 여부도 묻길래 안 먹었다고 했더니, 어쩔 수 없이 약봉지를 살짝 밀어두는 모습까지 보였다.
뭐 먹을 거라도 있으면 이 어색함이 조금 풀릴 것도 같았는데. 친구들과 연락도 다 끊고 혼자 삭막하게 살던 집에 뭔가 놀 만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노트북과 책장에 꽂힌 책 몇 권, TV 하나가 전부였다. 이 어색한 침묵 사이로 TV 소리라도 끼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으로 리모컨을 위치를 찾고 있는데, 지구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저기 브로마이드는 누가 붙여놨어요?”
“무슨 브로…….”
아무렇지 않게 묻던 입이 갑자기 돌이 된 것처럼 굳었다. 설마, 설마. 오른쪽 벽을 가리키고 있는 지구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노블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다른 브로마이드에 비하면 사이즈가 작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냥 들어오라고 했지? 요즘 저게 붙어 있다는 인식도 없이 살아서 잠깐 기억이 날아갔던 게 분명했다. 딱딱하게 굳은 안면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어색하게 웃는데 지구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형 잘 나왔네요. 저게 언제 거예요?”
“그 쿨 스포츠 홍보모델 때…….”
너무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지구나, 그걸 어영부영 대답하고 있는 나나 뭔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뭔가 조금 놀랄 만도 하지 않나? 대부분 남자 아이돌의 남팬을 보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학교 다닐 때도 일부러 티 낸 적 없는데. 놀랍도록 침착한 반응에 눈만 깜빡거리는 나를 보며 지구가 처음으로 고백을 했다.
“사실 저 선배 팬사인회장에서 봤어요.”
“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순간 벌떡 일어나서 물수건을 떨어뜨릴 뻔했다. 일코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팬사인회장에 학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지구가 팬심을 가지고 앨범을 사서 갔을 리는 없으니 형 때문이겠구나 싶었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네.
“형이 한번 오라고 해서 갔었는데 같은 학교 교복이 있더라고요.
“
깜짝 놀라서 봤는데 그게 딱 선배인 거에요. 춤만 추고 사는 거로 유명했는데, 좋아하는 아이돌도 있구나 싶어서 놀랐어요.
천천히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지구의 표정을 보며 벽에 붙어 있는 브로마이드로 시선을 돌렸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취미생활은 친구들에게 털어놓기 조금 곤란한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친했던 친구가 노블을 싫어해서였는데, 그 이유가 여자친구가 노블의 데뷔 팬이라서였다.
컴백 기간만 되면 연락이 잘 안 된다며, 걔네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쏟아지는 동의들 속에 ”나는 좋은데.”라는 소리를 차마 하지 못하고 몰래 덕질했다. 단순히 춤과 노래를 동경했을 뿐인데도 애들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한 소리부터 했다. 취향 이상하네, 부터 시작해서.
“형들 무대 잘하죠?”
“응.”
“저도 노블 좋아해요. 무대 위에 있는 형이 부럽기도 했고, 멋있기도 했고. 훨씬 잘하니까 따라가고 싶었고. 남자가 남자 아이돌, 얼마든지 동경으로 좋아할 수 있잖아요.”
조용히 말하는 목소리가, 표정이 제 나이의 것이라기에는 성숙해 보였다. 하는 말의 내용은 동경하는 형을 쫓아가고 싶다는 건데, 목소리만 들어서는 이미 다 이룬 사람 같았다. 원래 말의 깊이가 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까 그 위로를 듣고 울었던 것도 납득이 됐다.
“이건 무슨 상자에요?”
노블 이야기를 바로 끊어낸 지구가 다른 주제로 환기를 시키려는지 침대 밑에 삐죽 튀어나온 상자를 잡았다. 커다란 상자 속에는 CD가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었다. 며칠 전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끝없이 재생하고 뒤늦게 대충 쑤셔놨던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췄던 춤들 영상 찍었던 거.”
“대회 때 것도 다 있네요.”
날짜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CD들을 몇 개 들었다 놨다 반복하던 지구가 문득 빛나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전구처럼 빛이 뿜어져 나왔다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한번 봐도 돼요?”
“별거 없는데. 나만 계속 나와.”
“괜찮아요.”
그래, 그럼 봐.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구가 TV 밑에 있는 CD 플레이어로 다가갔다. 입을 벌려 플레이어가 CD를 꿀꺽 삼켰고, 외부 입력을 만지작거리니 TV에서 내가 나왔다.
영상이 나오고, 화면 속의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분이 이상해서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혼자 볼 때는 괜찮았는데 지구랑 둘이 이걸 보니까 좀 그랬다.
“계속 볼 거야?”
쟤가 저거 보는 동안만 해야지, 하고 만지기 시작했던 휴대폰은 생각보다 더 오래 하고 있었다. 농작물을 다 수확하고, 목장을 업그레이드한 뒤에 확장 공사가 끝날 때까지 30분을 기다렸는데도 TV는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물어본 내 말에 지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얼른 끄라고 독촉하는 줄 알았는지 지구는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누른 뒤 CD까지 뽑아냈다. 물론 그걸 말리지는 않았다. TV가 완전히 꺼지자마자 지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지금 조금 들뜨는데 또 좋아한다고 하면 그만하라고 하실 거죠?”
“응.”
“그럼 굳이 안 할게요.”
쿨하게 춤에 대한 고백을 포기한 지구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보일러 안 켜서 차가울 텐데? 여전히 손안에서 CD를 매만지고 있는 지구는 추워 보이진 않았다.
“슬슬 늦겠는데 집에 안 가도 괜찮아?”
“선배 아픈데 쉬셔야 하니까 갈게요.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요.”
원래 물수건만 해드리고 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저런 보물상자를 발견할 줄은 몰랐어요. 기분 좋게 웃어 보인 지구가 CD를 조심스럽게 다시 상자 속에 넣어두고 책가방을 멨다. 다시 봐도 무거워 보인다고 생각하며, 혹시 감기가 옮을까 계속 쓰고 있던 마스크를 살짝 올려 쓰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현관문 잘 열 수 있으니까 굳이 안 일어나셔도 돼요. 안녕히 계세요.”
최소한 배웅은 해줘야 하지 않겠냐 생각했던 게 쓸데없이 친절한 지구의 배려로 무산됐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며 순식간에 집안의 온기가 빠져나갔다. 집에 가족 아닌 사람을 들인 게 얼마 만이지. 감기까지 걸려놓고 들어왔다 가라고 잡았던 걸 보면 좀 외로웠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