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지구가 나가고 몇 분 지나서 겨우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삼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구가 마지막으로 나갔으니까 남은 참가자는 없었지만, 대놓고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서 문자를 남겼다.
[우리 조 게임하는 영상 첫 번째 판 혹시 자를 수 없을까요?]
문자가 잘 도착했는지 삼촌이 바지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매우 만족스러운 답장을 보냈다.
[ㅇㅇ 지구 그 친구 늦게 온 거 때문에 안 그래도 피디님이 자르라고 하셨어]
[거의 손안대고 풀버전으로 자정에 올라갈거야ㅎ]
감사합니다, 하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만두고 기프티콘 샵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에 샀던 케이크와 똑같은 걸 찾아내서 삼촌에게 선물하기를 눌렀다. 도착한 기프티콘을 발견한 삼촌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감동 이모티콘을 마구 보냈다.
[테러 그만하세요]
처음에는 웃었지만, 이모티콘이 백 개가 넘게 오자 참을 수 없어서 문자로 경고를 날렸다. 삼촌은 바로 화면에서 손가락을 뗐다.
그제야 얌전해진 휴대폰을 쥐고 평소처럼 택시를 탔다. 이번 택시기사님은 대단히 조용하고 감성적인 걸 좋아하시는 듯,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음악을 택시 가득 깔아놓으셨다. 비 내리는 밤에 홀로 걷는 한강대교라니 상상만 해도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택시비를 내고 내릴 때 유독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다 노래 때문인 게 분명했다.
도어 록을 풀고 신발을 벗자마자 불을 켰다. 순식간에 환해진 집을 보며 허물 벗듯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영혼은 침대에 두고 온 채로 멍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밀려오는 오한에 침대 위에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을 조심스럽게 켜고 화면 밝기를 낮춘 뒤 무음으로 바꾸고 엎었다.
아마도 여전히 투표수 조작 루머는 가라앉지 않고 온갖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이 판국에서 새로운 먹잇감이 떨어지면 그쪽을 물고 뜯느라 바쁘겠지. 괜히 몸이 쑤시는 것 같아서 뒤척이며 자세를 바꿨다. 일단 한숨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았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 이불을 들치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걸 보니 어지간히 많이 잤구나. 습관처럼 휴대폰부터 확인하다가 쌓여있는 알림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다.
“어…….”
삼촌의 문자를 보고 급히 검색 포털부터 접속했다. 지금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건 투표수 조작 이야기가 아닌 몰래카메라 영상 유출이었다.
놀라서 더듬더듬 내 휴대폰을 살폈다. 분명 김성원의 압박 때문에 방송에 안 나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방송 날짜도 아니었다. 급히 확인한 유출 영상은 그거였다. 지나가던 참가자가 찍었다는 그 영상.
밤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논란은 몰래카메라 하나가 아니었다. 동영상 하나에 자석처럼 숨어있던 피해자들의 증언이 달라붙었고, 순식간에 부피를 키운 이야기들은 온갖 SNS를 장악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애써 눌러놨었는지 꾸역꾸역 박아놓았던 말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쏟아진 상태였다.
“김성원 일진설, 김성원 술, 김성원 학폭…….”
하룻밤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방대해진 검색량을 보며 휴대폰을 살짝 떨어뜨렸다. 자연스럽던 욕과 살벌한 눈빛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정말 그 자리에서 한 대 맞을 수도 있었겠다. 김성원은 내 상상 그 이상의 사람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대충 안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삼촌에게 연락했다.
[유출 누가 시켰는지 알아?]
물론 어제 몰려들었던 수많은 참가자 중 한 명이겠지만. 문자는 전송한 지 5분이 넘도록 답장이 없었다. 삼촌도 당연히 이래저래 바쁘겠지 싶어 그냥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뒤늦게 밤중에 쌓인 카톡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에 바로 채팅방을 눌렀다.
[형 그 영상]
[유출됐어요ㅠㅠㅠㅠㅠㅠㅠ]
[인터넷 난리난거같ㅇ은데 어떡하죠ㅠㅠㅠㅠ]
직접 눈앞에서 본 사건이 인터넷에 유출돼서 이렇게까지 커지니 준도 적잖게 충격을 받은 건지 카톡을 무려 58개나 보냈다. 대충 문자 몇 마디로 달래고 급히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대체 뭘 해야 영상 하나에 이만큼 터질 수 있는 거지.
인터넷상에 워낙 루머가 판치는 건 알지만 어느 정도 뒷받침할 근거가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 근거 없이 터진 일진설이 실검까지 올라가지는 않으니까. 불과 새벽에 터졌던 일들임에도 벌써 실시간 검색어 3위가 김성원이었다. 소속사가 없는 일반인 신분이니 공식 입장 발표 같은 건 당연히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상상 이상으로 과격한 전개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유출된 사실을 알았을 때는 본인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 만큼 조금만 돌려받으라는 느낌이었는데 이건 거의 매장될 수준의 과거였다.
당장 내일부터 3차 미션 시작이었다. 삼촌이랑 연락도 안 되고, 이미 논란은 일어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액정만 두 번 두드렸다. 내 두드림에 화면이 켜졌고, 아직 오전 11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을 알려줬다. 이미 많이 자서 잠도 안 오고, 할 일도 없고. 손톱만 계속 부딪히다가 결국 다시 드러누웠다.
내가 천장만 쳐다본 채로 명상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확실한 피해자들이 속출하면서 일진설은 거의 확정이 되어갔고, 하차하라는 원성들은 점점 켜졌다. 빽이 있다는 말에 집안까지 찾아내려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살벌했다.
삼촌에게 연락이 온 건 딱 5시간 뒤였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조금 기울었을 때쯤.
-김성원 하차해.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소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워낙 자기 멋대로 일을 벌여놓고 살길래 이렇게 간단하게 하차하는 결론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더 물어보고 싶은데 왠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입만 뻐금대고 있는데 삼촌이 선수를 쳤다.
-근데 이걸 뭐라 그래야 할지, 걔네 부모 쪽에서 일방적으로 요청한 거라.
“부모요?”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고 했더니 하차 위약금이랑 피해 보상까지 해줄 테니까 걔 의견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빼라더라. 사람까지 보내서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피디님한테 하도 난리를 쳐서 나까지 무서웠다니까. 프로그램 이미지 손상 때문이면 거기에 대한 보상금까지 주겠다고.
삼촌은 아직도 그 상황 속에 놓여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부르르 떨었다. 김성원은 세상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부모 압박이 더 심한 모양이었다. 이토록 급히 하차를 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뿐일 게 분명했다.
-지금 네티즌들이 집안 파헤치려고 아주 난리를…….
“아직 정확히 안 나왔죠?”
-김 씨가 한둘이야? 아직 안 나왔지. 최대한 빨리 무마시키려고 용을 쓰는 것 같더라. 김성원한테 따로 연락 넣어봤더니 전원은 꺼져있고.
“그럼 어떡해요?”
-일단 하차시키는 게 편하긴 한데, 얘가 화제성이 워낙 있어서.
삼촌이 피곤한 말투로 말했다. 전화 건너편에서 머리를 긁는 것 같은 소리도 함께 넘어왔다.
-근데 영상은 대체 뭐야. 누가 뿌린 거야? 각도도 이상한데.
“지나가던 참가자가 찍었대요.”
-어휴, 그걸 문틈 사이로 찍어?
“생각보다 다른 참가자들도 원한이 깊은 거 같더라고요…….”
말하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점점 느려졌다. 한낱 찌라시라고 짚어 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새로 알게 된 진실들이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뭐, 언젠가 터질 일이었겠지. 쟤 저대로 우리 프로그램에서 데뷔까지 한 다음에 터졌다고 생각해봐라. ……어휴. 차라리 잘 됐지.
상상만으로 고통스럽다는 듯 삼촌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걔는 진짜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야. 활동하면서 태도 논란 같은 거 터졌어도 신경도 안 썼을걸.
확실히 삼촌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김성원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 맞았다. 남들 시선도, 타인의 상처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런저런 일 겪고, 힘들게 다 그만두고 나오면서도 포기를 못해서.’
지구는 서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힘겹게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었다. 그 과거 속에는 김성원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었다.
자꾸만 귓가에 목소리가 어지럽게 울리고 그때의 상황이 재연됐다. 딱 한 번 들었던 말들과 흐느낌이 뭐가 그렇게 기억에 세게 박혀버린 건지 반복적으로 뇌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계속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문득 놀라서 황급히 입을 다물고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 * *
벨 소리에 눈을 뜬 건 저녁이었다. 상단 바를 보니 준에게 카톡 답장이 온 것 같았지만 일단은 걸려온 전화를 처리해야 했다. 저장이 되어 있지 않은 번호와 잠깐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영상 퍼트린 거 너지.
확신이 가득한 낮은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카톡 아이디 공유만 했는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유 모를 헛웃음까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잠긴 목을 헛기침 두 번으로 가볍게 풀고 대꾸했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네 번호 알아내는 게 어렵겠냐?
“일단 경로는 안 물어볼게요.”
-그래서 네가 올린 거 맞잖아.
내 대답에 김성원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을 종용했다.
“전 거기 있었으니까 찍은 거 아니라는 건 아실 테고. 올린 것도 저 아니에요.”
-너 아니면 누군데. 대놓고 엿 먹이려고 몰카 한 거 맞잖아.
“아닌데요. 작가님들이 주신 시나리오였어요.”
정확한 사실만 조곤조곤 말해줬더니 잠시 말이 없어졌다. 바로 험악한 말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래서 이제 나 하차하니까 좋겠네. 너네끼리 다 해 처먹어.
“하차 확정된 거예요?”
-평소에는 무슨 지랄을 하고 다녀도 별 신경 안 쓰더니 집안 들통날 것 같으니까.
김성원은 부모에게 하는 듯한 말을 한참 중얼거렸다. 주변이 조용한 걸 보니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전화를 걸었던 이유를 잊은 듯 김성원은 온갖 쌍욕을 동반하며 본인 인생 한탄 비슷한 걸 계속했다.
-관심 좀 달라고 애원해도 너 알아서 살라더니 알아서 사니까 막는 건 뭐야.
몇 마디 들어보니 금방 알 수 있었다. 김성원이 마치 알아달라는 듯이 온갖 사건들을 몰고 다녔던 이유가 부모님 때문이라는걸. 그 간단한 사실을 포착하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관심을 받고 싶었어도 도가 한참 지나쳤다.
“그래서 사람 때리고 왕따 만들고 그러셨어요?”
-어차피 다 막을 수 있는데 눈치 볼 거 없잖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학폭 얘기는 진짜였던 거네. SNS에서 루머와 사실을 가려내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당사자의 수긍이 떨어졌으니 확실해졌다.
“부모 시선 끌어보려고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건 대체 무슨 행동이에요.”
사실 이것도 오지랖이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통화를 마지막으로 김성원은 더는 나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선생질 오지게 하네?
나한테 신세 한탄은 엄청나게 한 주제에 조금 나무라는 말에 바로 듣기 싫다는 듯 말꼬리를 잘라버렸다. 그 빠른 대처에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 휴대폰 붙잡고 백날 반성하세요, 해봤자 소용없는 사람이라는 걸 바로 깨달았으니까.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말해줬으면 됐을 거 아니야.
“뭐가 옳은 건지 잘못된 건지는 혼자 구분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
그 뒤로는 쭉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하는 건지, 내 욕을 하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후자였으면 김성원 성격에 입 밖으로 했을 테니까.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실천할 수는 없었다. 전화는 끊겨버렸고, 다시 걸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괜히 오지랖을 부렸구나 싶었다. 그냥 받자마자 끊어버렸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