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9화 (19/130)

#19

가을옷을 무더기로 배송시킨 지 분명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얇게 입기에는 쌀쌀한 날씨가 됐다. 계절이 이렇게 빨리 변한 적이 있었나. 고개를 완전히 꺾어 바라본 새카만 하늘의 달은 둥글지 않았다.

“저거 하현달이에요.”

“어떻게 알아?”

“밝은 부분이 왼쪽이잖아요. 날짜도 그렇고. 이때쯤 뜨거든요.”

지구가 대충 날짜를 가늠해보는 듯 손가락을 몇 개 접었다 폈다. 음력인데도 용케 기억하는 모양이다.

달을 보고 있으니, 형과 이름으로 자주 묶여 놀림을 받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달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나란히 지어주신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우리 형제의 이름을 위와 아래로 생각했다.

가끔 명절에 친척끼리 모이는 날이면 '형제끼리 위아래가 확실하네.'라는 재미없는 농담들을 하루에 두 번씩 들어야 했고, 덕분에 하극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배운 형에게 쉽게 까불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다.

“똑똑하네.”

“하늘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하늘 보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얼굴이 달빛을 받아 맑게 보였다. 항상 무표정하게 있어서 그런지 유독 웃기만 하면 딱 그 나이대로 보였다. 동그랗게 생긴 편이라 웃으면 진짜 순해 보이는데, 웃는 거 보기가 참 힘들다는 게 문제다. 무표정 아니면 골몰하는 표정. 오늘 연습하는 내내 봤던 표정의 종류였다.

“웃으니까 보기 좋은데, 자주 웃어.”

“저 자주 웃어요.”

“언제?”

“아침부터 계속요. 틈틈이.”

설마 그 가끔가다 보이는 어설프게 올라간 입꼬리가 다 웃고 있는 거였냐고 물었더니 지구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을 켜서 잠시 시간을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낯을 조금…… 많이 가려서요. 그래서 표정이 잘 굳어요.”

아, 무표정이 아니라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었구나. 항상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접근하지 말라는 듯이 서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다 낯가리는 얼굴이었다니.

갑작스러운 고백에 살짝 올려다봐야 하는 위치에 있는 앳된 얼굴이 더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한 살 차이인데 왜 그렇게 옆집 동생쯤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팔을 살짝 잡았다.

“뭐 먹고 갈래?”

“어떤…… 거요?”

“너 먹고 싶은 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밥 한 끼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뜬금없이 들었고, 편의점을 택한 지구 덕분에 오랜만에 또 박사가 됐다. 편의점 음식에 대한 온갖 상식을 지루하게 늘어놓는 말에도 착한 후배는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만족스러운 반응들을 보여줬고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 그리고 막차를 놓쳤다.

“어…….”

막 떠나간 지하철을 눈으로 좇던 지구가 교통카드를 살짝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런 전개를 원한 게 아닌데. 별거 아닌 편의점 도시락뿐이지만 한 끼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고 지하철을 태워 보내려던 바람이 헛수고가 됐다.

텅 비어버린 지하철역 안을 대충 눈으로 훑다가 급히 티머니 잔액을 확인했다. 3560원. 기본요금을 간신히 넘기는, 지구에게 쥐여주며 택시 타고 가라고 말해주기에는 무리인 금액이었다. 여차하면 그냥 같은 택시를 타서 먼저 내려줘야겠다 싶어 방황하는 몸을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가자, 택시 잡아줄게.”

“아뇨. 저도 택시비 있는데.”

“야간은 비싸잖아. 이 시간까지 내가 잡아 둔 건데.”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꺼내든 말에 지구는 강하게 부정하며 손을 다급히 흔들었다.

“제가 얻어먹은 건데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안녕히 계세요.”

예의 바르게 허리까지 숙인 지구는 잡기도 전에 지하철역 안에서 후다닥 벗어났다. 그 재빠른 뒷모습을 보면서 바닥에 버려진 캔을 주워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택시를 부르기 위해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이제는 단골이 된 콜택시를 타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구에게 연락을 했다.

[잘 들어갔어?]

이런 안부를 묻는 사이도 아닌데 조금 그런가 싶어 보내놓고 잠깐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할 틈도 없이 지구는 곧바로 예의 바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잘 들어왔어요]

[오늘 잘 먹었어요. 감사해요]

* * *

빗기만 한 부스스한 머리가 과격한 변화를 시도했다. 바로 앞에 놓인 거울에 비친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고, 대충 세안만 하고 온 얼굴에는 무언가가 뿌려졌다.

숨돌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숍 안은 공기마저 모자란 듯했다. 메이크업을 마치자마자 조별로 차에 태워져 녹화가 진행될 건물로 출발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놀라 까맣게 선팅된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여러 가수의 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헐. 몇 명인 거예요?”

“공식 홈페이지에서 선착순 폼 제출로 200명 받았대요.”

“아, 우리만 하는 거 아니었죠.”

차가 왼쪽으로 돌아, 건물 뒤쪽에 있는 주차장 입구를 통과하고 나서야 살짝 올라갔던 고개를 다시 내릴 수 있었다. 많은 아이돌이 사전녹화를 선호하다 보니, 대기실 복도를 걸으며 TV에서만 보던 얼굴들을 얼마나 많이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다들 데뷔도 하지 않은 일반인들 신분이라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만 숙였고, 확실히 연예인들은 뭔가 다른지, 그 어설픈 인사를 다들 자연스럽게 받으며 넘어갔다.

“긴장 하나도 안 됐는데, 갑자기 목마르기 시작했어요.”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기분이 조금.”

올 때까지만 해도 방방 들떠있던 가온이 갑자기 물을 찾기 시작했고, 휘영은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기세로 우리 대기실을 찾았다. 복도를 지나치면서 보이는, 대기실 앞에 붙어있는 그룹들의 이름이 현실감각을 죽여놨다.

안 그래도 탑급 아이돌들이 우르르 컴백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MSM 음악방송이란 이름이 주는 무게감 역시 생각보다 심했다.

“와, 보고 싶다.”

물을 찾던 가온이 갑자기 남의 대기실 앞에 멈춰서 설렘 가득한 눈으로 문을 쳐다봤다. 문에 붙어있는 그룹 이름을 보니, 데뷔 연차가 꽤 쌓인 걸그룹의 대기실이었다. 분명 나 중학생 때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볼 수 있을 테니까, 일단 가요. 쭉.”

망부석처럼 멈춰 서있는 가온을 밀면서 계속 앞으로 걸어가다 보니 벌써 대기실 복도의 끝이 보였다. 그때 익숙한 얼굴의 다른 조들이 우르르 커다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끝에 있나 봐요.”

네 조가 한 대기실을 함께 써야 해서 일부러 큰 곳으로 배정해줬다더니 맨 끝에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지나가는 아이돌들과 인사를 나누는 성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같이 불편한 표정이었다. 유독 지구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거의 발끝만 바라보고 걷고 있었는데, 넘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한참 앞서가던 지구가 순간 발을 멈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부 인사를 하느라 발걸음이 유독 더디던 조원들도 거의 동시에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일시정지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제일 앞에 있던 지구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를 건넨 지구가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갔고 나머지 조원들도 주춤주춤 인사를 하며 대기실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마주친 아이돌은 스케일이 굉장히 커서, 다들 쉽사리 인사를 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굉장히 힘들었다. 그 예로, 눈이 마주친 지 꽤 됐는데도 버릇없어 보이게 아직도 인사를 못 하고 있다.

예전에 좋아하던 아이돌을 사녹 대기실 복도에서 만났다.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1번. 못 본 척 지나친다.

2번. 소리를 지른다.

“안녕하세요….”

보기에 주어지지 않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하고 고개 숙여 지나치기를 선택했다. 발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앞서가던 조원들을 따라잡으려고 애쓴 내 노력은, 성원이 아는 척을 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

쟤는 대체 모르는 아이돌이 누굴까. 궁금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원이 특정 멤버의 이름을 언급하며 인사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태양이 형.”

여가가 무슨 팬사인회장인 줄 아는 건지, 지나가기도 바쁜 마당에 굳이 이름까지 불러가며 인사하는 성원의 의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도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같은 인간인데 이렇게까지 속을 알 수가 없다니.

지구가 대기실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 멈칫한 지구가 다시 문고리로 손을 올렸을 때, 성원은 웃는 낯으로 나머지 노블 멤버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오랜만이다.”

“핫스테이지 방송 찍고 처음이지……?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다들 그리 나쁜 관계는 아닌 듯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쉽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 인사들을 하나하나 소중히 받아낸 성원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지구를 다시 한번 불렀다.

“온지구, 너도 와서 인사해. 형이잖아.”

갑자기 왜 인사 타령을 하나 싶었던 생각은, 처음 듣는 지구의 풀네임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온 씨는 살면서 들어본 게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흔치 않은 성씨였고, 동시에 태양이 형의 성이었다.

'on 태양' 따위의 슬로건 문구를 만들기 적합해서, 팬들은 왜 이름도 온태양이냐고 오열하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누가 봐도 형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름 두 개가 나왔다. 실제로 성원의 입에서 형이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지구의 손은 문고리를 돌리지 못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얼굴이 싸늘했다. 작지 않은 목소리 때문에 이미 대기실 복도는 소란스러워진 상태였다.

“뭐야?” “무슨 일 있어요?”

바쁘게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하나같이 걸음을 멈춰 이쪽을 주목했고, 하다못해 현직 아이돌들까지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제야 뻔한 성원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일단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맞다. 우리 빨리 들어가서 점검해야 하잖아요. 빨리 들어가요.”

지구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서 쓸데없는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일단 성원을 잡아채서 대기실 문 쪽으로 밀었는데, 얼떨결에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훈이 형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훈이 형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리치며 환하게 웃었고, 불길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그……”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정훈이 형이 뭔가 말을 하기 전에 성원을 앞세워서 길을 뚫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조원들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조원들이 눈만 굴리고 있을 때, 행동을 시작한 건 지구였다. 천천히 의자에 앉은 지구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아 꽂았다. 화를 내기보다는 참기로 한 것 같아 다들 한숨 돌리고 조용히 의자에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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