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왜 이제 와! 쉬는 시간 시작한 지 한참 됐잖아!”
많이 걱정스러웠는지 삼촌은 건물 1층까지 내려와 발을 구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늦게 도착한 나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삼촌이 급히 분장실로 밀어 넣었고, 처음으로 여러 명의 손길을 한 번에 받았다.
덕분에 훨씬 빨리 끝난 메이크업에 삼촌이 다행이라는 듯 박수를 치며 달랑 쉬는 시간이 1분 남은 상태에서 세트장으로 밀어 넣었다.
“형 완전 대 지각 아니에요? 벌써 11등까지 나왔.”
“다시 촬영 들어갈게요, 준비하세요.”
의자를 찾아 돌아다니던 중에 준이 저 멀리 의자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그 해맑은 인사는 PD님의 목소리로 인해 끊겼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멍하니 조명만 쳐다보고 있으니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카메라가 느껴졌다. 저번 순위 발표 때는, 소감 발표 때를 제외하고는 카메라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어서 그런지, 렌즈를 바라보며 한 번 어색하게 웃어줬다. 저 무거운 게 잘도 공중에 매달려 있네.
저번보다 인원이 7명이나 줄어들어서인지, 사람들 이름이 발표되는 게 훨씬 빨라진 것 같았다. 지각해서인지 금방 한 자릿수 번호가 발표됐고, 벌써 투표수가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아져 있었다. 요즘 프로그램 인지도가 장난 아니라고 삼촌이 방방 뛰던 게 전혀 과장된 기쁨이 아니었다.
“조장님.”
정신 못 차리고 10등의 투표수를 보며 몇 자리인지 세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팔을 건드렸다. 다들 긴장하고 있을 이 순간에 누가 부르나 싶어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니 휘영이 있었다. 바로 옆자리인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나 보다. 깔끔하게 잘 입은 옷 위에 그 어디에도 생존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았다.
“아직 안 나왔어요?”
“뻔하죠, 뭐.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서 좋아요.”
휘영이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순박하게 웃어 보이며 괜히 소매를 툭툭 털어냈다. 웃음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저번 방송부터 생각해온 말로 위로를 해주려는 순간.
“9위는…… 천휘영 군입니다!”
누가 불렀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름을 크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MC뿐이었으니까.
“방금 이름 부른 거…… 아니에요?”
“……저요?”
휘영 또한 듣기는 했는지 손가락으로 본인을 쿡쿡 찌르며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고, MC는 환하게 웃으며 어서 내려오라고 한마디 더 했다. 동그랗게 떠진 눈과 뻣뻣한 걸음걸이가 누가 봐도 놀랐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20등대였던 휘영의 갑작스러운 순위 반등에 다들 놀란 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휘영은 소란스러워진 주변이 적응되지 않는지 몇 번 눈치를 살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4화 방송에 휘영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유독 많이 잡혔고, 삼촌도 성실한 게 보기 좋다고 칭찬했으니까.
“축하해요. 역전의 아이콘이 됐어요.”
싱글벙글 웃으며 축하하는 MC의 말에 휘영은 눈물부터 흘렸다. 메이크업이 번질까 꾹꾹 절제해가며 눈가를 몇 번 찍어누르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는 휘영을 보며 혼자 조용히 박수를 쳤다.
“당연히 이번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투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메는 목을 억지로 열어 감사함을 전하는 휘영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함께 하던 조원이 살아남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일 줄 몰랐네. 왠지 모르게 뛰는 심장을 붙잡고 있으니 휘영이 신나서는 이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번에는 가슴팍에 생존 스티커를 붙인 채로.
축하한다고 한마디 하려다가 이미 충분히 벅차 보여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후로 발표되는 순위는 크게 변동이 없었다. 준이 두 계단 더 올라간 것과 휘영의 경우만 빼면 큰 변화가 없이 잔잔했다. 그러다가 6위로 이전 순위가 2위였던 사람이 불리면서 참가자들의 수군거림이 잠시 커졌다가 수그러들었다.
“지금부터 데뷔 조네요. 우와 투표수가 아주 구름을 뚫겠어요.”
MC가 기계적인 감탄사를 뱉어내며 계속해서 순위 발표를 진행했다. 4위를 지나칠 때까지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미치겠네.’
심장이 점점 죄어오는 느낌이었다. 제발 더 이상 올라가선 안 된다고 속으로 빌고 빌었던 저번보다, 지금이 훨씬 더 긴장됐다.
지구 역시 떨어지지 않고 전 등수였던 3등을 그대로 받아 갔다.
만족하는 얼굴로 지구가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대형 스크린에 성원과 내 얼굴이 나란히 잡혔다.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스크린에는 우리 둘의 투표 수로 보이는 숫자가 이름 표기 없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자리수가 많았다. 저게 대체 몇 표지. 무지막지한 투표수를 눈으로 직접 보니 이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는지. 어떻게 애써 무시하며 하차를 외쳤는지 신기할 정도로 높았다.
“카메라 정비하고 바로 둘 무대 위로 올라올게요.”
피디님의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저번처럼 참가자들이 뭉쳤다. 이번에는 다들 조별로 모여 있었다. 대부분 탈락이 확정된 사람들이 훌쩍이고, 생존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사람들이 미안해하며 위로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쪽으로 다가오는 우리 조원들 표정은 다들 밝았다.
“저희 조 전부 붙었네요! 신난다.”
생존 스티커를 팔락거리며 정신 사납게 세레머니를 하던 가온은 주변 조들 분위기를 보고 3초 만에 그만뒀다. 별생각 없어 보이던 지구는 이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와서 휘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줬고, 훈훈한 광경과 어울리지 않게, 성원은 여유롭게 바닥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겨우 몇 초 보낸 내 시선을 귀신같이 느낀 성원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고,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축하드려요. 순위 더 오르셨네요.”
티 없이 맑은 얼굴로 하하, 웃으며 성원이 손을 내밀었다. 악감정이 없어 보이는 손을 내칠 수도 없었기에 가볍게 잡았다.
“저번 화 보니까 분량 조금 생기셨더라고요. 확실히 분량을 받으니까 순위가 확 오르네요.”
“분량이 대단하긴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제는 왜 안 오셨어요?”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이 나도 모르게 겉으로 툭 튀어 나왔다.
“네? 아, 카톡 못 보셨어요?”
“봤는데, 너무 짧아서 성원 씨 사정을 다 알기에는 무리가 있더라고요.”
당장 순위 발표를 앞두고 신경을 박박 긁어서 뭐하나 싶었는데도, 이미 통제를 벗어난 입은 마음대로 떠들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성원이 당황한 듯 삐뚤삐뚤한 입꼬리로 변명을 덧붙였다.
“말씀은 못 드리겠는데 정말 급한 볼일이 생겨서요. 집 안에…….”
“아이돌 하실 분이 연습을 게을리하시면 안 되잖아요. 오늘 끝나고는 꼭 같이하셨으면 좋겠네요.”
“아……. 그럼요. 오늘은 준비되어 있죠.”
어색하게 웃는 입 위로 눈이 가늘어졌다. 여전히 놓지 않은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는 나도 제대로 해보기로 했으니까.
“잘 해봤으면 좋겠어요.”
맞잡은 손이 공중에서 두어 번 흔들렸다. 악력 진짜 세네. 잠깐의 만남 동안 느낀 것은 그것뿐이었다.
손을 놓자마자 금방 쉬는 시간이 끝났다.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올라간 무대 위에서 나는 2라는 숫자를 부여받았다. 성원은 절대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당당한 자세로 저번과 같은 '1위'라는 꼬리표를 달고 내려갔다.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저런 불성실함이 어떻게 한 번도 화면에 비친 적이 없는지에 대해 강한 궁금증을 느꼈다.
연습생 때는 성실했나? 5화 방송을 보니까 성원이 오지 않은 연습은 다 잘려서, 불참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숫자가 반짝반짝하네요. 다른 순위보다 유독 큰 거 같기도 하고?”
가장 먼저 앞으로 뛰어나온 가온이 본인의 스티커와 내 스티커 크기가 약간 다르다며 쓸데없이 비교를 시작했고, 지구는 또 익숙한 생수통부터 건넸다.
얘는 이것만 먹나 보네, 자판기에서도 못 본 건데. 할 말이 없으면 물을 주는 습관이라도 있는 건지. 유독 자주 받는 것 같은 생수통을 받아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가슴팍에 매달린 3이라는 글자 때문인지 오늘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원 생존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달고 다 함께 다시 연습실로 들어가 내일 음방 연습에 힘을 기울였다. 아까 맞잡은 손에 힘을 꾹꾹 줘가며 나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내던 성원은 연습 분위기까지 엉망으로 만들 생각은 없는지 묵묵히 안무를 점검했다.
하지만 단체 활동을 할 기분이 아닌 건지, 쉬는 시간을 가질 때면 꼭 밖으로 나갔다. 살짝 보니까 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2조 연습실로 놀러 가는 것 같았다.
“3차 미션은 뭐일 것 같아요? 또 팀일까요?”
“팀 미션은 했으니까 또 하진 않을 것 같아요.”
5번 연속으로 이어진 완곡 연습에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지친 조원들이, 둥그렇게 모여 3차 미션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휘영이 저린 몸을 쭉쭉 늘리며 뭘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고, 한참 고민하던 가온이 손을 번쩍 들더니 바닥을 탁 내리쳤다. 그 큰소리에 구석에서 게임을 하던 조원이 놀라서 휴대폰을 떨어뜨렸고, 엎드려서 노래를 듣던 지구도 이어폰을 빼냈다.
“전 랩 해봤으면 좋겠어요. 막, 헤이러들 다 닥쳐! 이런 거 하고.”
어린아이가 하얀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를 쥐고 의식의 흐름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가온의 뇌 속은 즉흥적이었다. 정신세계가 조금 독특한 것 같은데, 또 그게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해서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렇다고 저런 랩을 하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다.
“…… 그냥 노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별로예요? 아니면 감성 랩 같은 거요. 3조에 예준이 형 있잖아요. 그 형 랩 진짜 잘하거든요. 나중에 시간 될 때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 형 수강료 진짜 비싸요.”
가온이 흐뭇한 얼굴로, 이미 수제자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조용하던 지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래퍼라고 했었지. 마음을 다잡는데 예준이 해준 말들이 나름 도움이 됐었는데…… 생각해보니 고마움이 밀려왔다.
나중에 제티 하나 사줘야지. 예준의 입맛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매우 주관적인 생각으로 선물이 결정되는 동안 가온이 바닥에 벌렁 누웠다.
“수강료도 받아요? 저한테는 그런 얘기 안 했는데.”
“한 번에 마카롱 한 박스씩 받았어요. 그것도 30분 거리에 있는 단골 마카롱 집 것만.”
“그 형 수강료 되게 귀엽게 받네요.”
자그마한 마카롱 박스를 들고 행복하게 먹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니 제티랑 잘 맞을 것 같았다. 벌써 상상 속에서 제티를 다섯 캔 정도 뽑고 있는데 가온이 문득 의문점을 제시했다.
“근데 노래하시잖아요? 랩은 왜 배우셨어요? 취미?”
“아니요.”
“하긴,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랩도 대체로 잘하더라고요.”
가온은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던 건 아니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화기애애하게 랩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다시 연습을 재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원이 돌아왔고, 연습 중간중간 휴대폰을 자주 만지는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방송과 직접 관련은 없는 음방 연습이다 보니 카메라는 줄곧 꺼져 있었다.
그 사실을 굉장히 아쉬워하며 마지막 연습까지 깔끔하게 끝내고, 슬슬 가는 게 좋겠다는 가온의 말에 다 함께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