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4화 (14/130)

#14

“수고하셨, 헉.”

마지막 인사를 하던 가온이 숨을 다 내뱉지 못하고 헐떡였다. 연습은 또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일어나기도 버거워서 몸을 챙겨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는데 데뷔를 하면 연락하라던 형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분량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싶어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다들 연습을 끝내고 간 건지, 아니면 아직 안 나온 것인지 밖은 스태프를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야, 나온다며?

받자마자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넘어온다. 나오긴 나왔는데. 발이라던가, 머리카락이라던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내가 아침에.”

-서바이벌 ID? 이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안 보이길래 동기한테 두 번이나 더 물어봤는데 이거 맞대. 혹시 하차했냐? 방금 2화까지 연속 방송으로 봤거든? 근데 사람이 왜 저렇게 많냐.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너 있긴 해? 듣고 있냐?

형은 항상 이렇게 자기 할 말만 와다다 뱉어냈다. 혼자서 이미 내가 하차했다는 결론까지 간 형을 보며 잠시 허탈감에 잠겼다. 왜 저렇게 생각의 속도가 빨라.

“정 보고 싶으면 3화 봐봐. 거기 잠깐 나올걸.”

-야, 뭔 프로그램이 참가자를 3화까지 안 보여줘. 장난해?

“삼촌이 스벅까지 바쳐가면서 만든 결과물인데 그렇게 말하면 속상하지.”

-내가 동생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어서 못 찾는 거냐? 스벅까지 바쳐서 만든 명품 편집에서?

“그게 삼촌이 부탁해서, 아. 잠깐만 형.”

벌컥. 아까 아침에 까먹고 못 했던 말을 하려는 찰나 연습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성원과 지구가 나란히 나오는 게 보였다. 절로 목소리가 줄었다. 또 멱살 잡고 한판 할 분위기인데. 척 봐도 좋지는 않아 보이는 분위기에 이쪽저쪽 눈을 굴리다가 형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나중에 전화해. 이왕이면 내일 아침쯤에.”

-야, 아직 말 다 안 했잖아! 다 하고 끊어!

형이 다급하게 말을 마무리 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련 없이 통화 종료를 눌러버렸다.

둘이 말없이 걸어 도착한 곳은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이었다. 솔직하게 엿들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이만 갈까 싶다가도 혹시 성원이 또 주먹을 휘두르면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더 엮이기 싫으니까 그만 해요.”

“뭐가, 그냥 막내 보고 싶다잖아.”

옅은 가로등 불빛을 받은 성원의 얼굴은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고지를 선점한 사람처럼 여유롭게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보며 숨소리가 절로 줄어들었다.

아까는 정색하면서 나오더니 갑자기 왜 저러고 웃어.

“제가 왜 거기 막내인데요?”

“맞잖아. 야, 부러워서 그래? 그냥 그때 데뷔할 걸 싶고?”

“형이 대체 왜 저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저 소속사 나올 때 다 끝냈잖아요.”

“너랑 같이 데뷔할 생각 없어서. 멀쩡히 있던 기회 걷어차고 나왔으면서 여긴 왜 또 나와? 너도 못 해 먹겠다며. 그럼 그냥 아예 때려치우지 왜 여길 나와서 서로 감정 상하게 만드냐고.”

이마를 검지로 꾹꾹 누르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기가 보기 싫으니까 하차하라는 소리 아니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저 부분만 들어도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초등학생도 저런 이기적인 소리는 안 하겠다.

“거기에 1분 1초도 더 있기 싫어서 나온 거예요. 음악은 계속할 거고요.”

“그래?”

“형이 아직 친하게 지내는 거 다 알고 신경 안 써요. 근데 스폰 누구한테 넘어갔는지는 궁금해요. 결국, 누가 했는지.”

다소 거칠게 말을 마친 지구가 가방을 한 번 고쳐 매더니 반대쪽으로 몸을 틀어 걸어갔다. 성원은 몇 번 헛웃음을 치더니 내 쪽의 입구로 다가왔다.

황급하게 옆에 있던 자동차 뒤로 몸을 숨기자, 다행히 발견하지 못한 듯 휴대폰을 들고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걸어갔다. 저것까지 훔쳐 듣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한참 뒤에 다시 일어섰다.

머리가 다 아프다. 이걸 뭐 어떻게 하지? 내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절로 숙연해졌다.

스폰까지 나온 거로 봐서는 단순한 불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둘 사이가 막 주머니에서 꺼낸 이어폰보다 더 심하게 꼬여있다고 해서 같은 조인데 떼어놓을 수도 없고. 억지로 맡게 된 조장의 고충이 한층 더 깊어지는 밤이었다.

‘하, 머리 복잡하게.’

끝까지 아까 두 사람의 표정이 잊히질 않아서 편의점에 들러 원두커피를 샀다. 쓴맛을 조금 봐야 할 것 같아서 도전했는데 생각보다 더 써서 결국 중간에 버렸다.

결국, 그렇게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지막 연습 날이 밝았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폭풍전야 같았다는 게 문제지만. 나머지 조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데 비해 나는 둘 사이에 흐르는 사소한 기류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어제 그 대화의 여파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냥 형한테 변명하면서 집이나 갈 걸 괜한 오지랖을 부려서. 내일이 바로 촬영 날이었기 때문에 연습은 모두 단체로 이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실수로…….”

그리고 그런 단체 연습의 결과로 충돌사고가 연속해서 발생했다.

진작 단체 연습을 늘렸어야 했는데, 다들 동작이나 노래는 어느 정도 되는데 동선이 자꾸 겹쳤다. 앞뒤로 움직이다가 부딪히고 사이 간격이 너무 좁아서 옆 사람 팔에 맞고. 한쪽 벽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거울이 당장 손을 봐야 한다며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춤이랑 노래는 다 괜찮은데요. 동선 다시 외워야 할 것 같아요.”

이번 무대가 마지막 일 거라며 씁쓸한 웃음을 삼켜대던 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다가왔다. 나머지 애들은 이번 무대 하나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얘 때문에라도 무대를 최악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기적이 생길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평소에는 있지도 않던 책임감이 갑자기 무럭무럭 자라나서 절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가온 씨 조금만 뒤로 들어가 봐요.”

“네.”

“딱 랩하면서 나오실 때 살짝 몸 틀어서 나오시면 될 것 같아요. 휘영 씨는 더 왼쪽으로 빠지시고.”

결국, 혼자 밖으로 빠져서 다른 사람들 동선을 하나하나 맞췄다. 나중에 알아서 잘 맞춰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지도에 힘을 쏟았다. 트레이너도 아니고 계속 뭐라고 하면 짜증 날 법도 한데 다행히 다들 착실하게 따라줬다.

성원도 두 번이나 보여줬던 폭력적인 면모는 잊으라는 듯 지구에게 의도적으로 어깨빵을 친다거나 하는 일 없이 연습에 몰두해주었다. 덕분에 얼마 가지 않아 아까 그 개판이던 줄은 어느 정도 반듯하게 맞춰졌다.

“대박, 이제 맞는 거 같아요.”

“조장님 수고하셨어요!”

“제가 뭘요. 몇 번만 더 맞춰보고 그만 집에 가요, 내일까지 컨디션 챙겨야 하니까.”

다른 조들보다 조금 더 빨리 마무리를 끝냈는지 옆방은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며칠 내내 놓여있던 메인 카메라가 드디어 꺼졌고 이곳저곳 설치되어 있던 작은 카메라들도 전부 수거됐다.

세트장을 나가면서 삼촌을 살짝 봤는데 처음 보는 사람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길래 모르는 척 지나가서 콜택시를 불렀다.

[10분 정도 후에 도착합니다]

10분 정도 걸린다는 답장이 돌아와서 오랜만에 농장에 접속했다. 약 3일 전에 심어놨던 토마토가 곱게 익어서 수확해달라며 빨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농작물들을 싹 다 수확하고 새로운 씨앗들을 심고 나니 할 일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전화를 걸라고 했던 형이 연락이 없다. 말을 안 해주고 끊어서 삐졌나 싶어 문자라도 넣어주려는데 뭔가 눈앞에 떨어졌다.

“웬 이어폰이…….”

“제거에요.

잔뜩 엉키고 꼬여있는 이어폰을 주워들자마자 숙인 고개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지구가 얌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얘가 인기척을 안 내는 건지, 내가 둔감해서 못 느끼는 건지. 이어폰을 돌려주다가 눈이 마주쳤다.

“야, 너.”

“네?”

지금 보니까 눈이 조금 부었다. 온종일 모자를 눌러쓰고 연습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심각하진 않은데 딱 티가 났다. 어제 그러고 나가서 혹시 울고 잤나. 정확한 사실도 모른 채 일단 부은 눈을 보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부은 눈에 바르는 크림 있다더라.”

“네.”

“울지 말고.”

쓸데없는 지식을 전수해주며 짧은 위로까지 마친 후 타이밍 좋게 나타난 택시에 빠르게 몸을 구겨 넣었다. 집 주소를 부르는 동안 창문 밖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지구의 입꼬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동이라도 받았나 싶어 창문을 살짝 밑으로 내리는 순간 지구가 오른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라면 먹고 자서 부었나 봐요.”

“…….”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무표정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환하게 바뀐 얼굴로 지구가 손을 흔들자마자 택시가 무정하게 출발했다. 부끄러움이 순식간에 덮쳐왔다.

* * *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500페이지짜리 소설책을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지루해서 읽다가 그만뒀던 책이라 빠르게 잠드는 데는 이만한 게 없었다.

벌써 다섯 번째로 보는 1페이지와 맞닥뜨리자마자 벌써 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효과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이불 속으로 몸을 더 집어넣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연속해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올 사람이 삼촌밖에 없는데. 역시나 무음으로 돌아가 있던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찍혀있었다.

전화 안 받았다고 바로 방문이라니. 30초쯤 지나면 그 튼튼한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릴 게 뻔했기 때문에 겨우 몸을 이불 밖으로 끌어내 도어락을 해제했다.

“좀 의외의 조합이네.”

일이 끝나자마자 왔는지 아까 복장 그대로인 삼촌의 옆에 서 있는 건 오랜만에 보는 형이었다.

“얘한테 갑자기 전화가 온 거야. 너희 집 간다니까 자기도 온다길래.”

“뭘 그렇게 봐. 형이 동생 집에 오면 안 되냐?”

“안되는 건 아닌데 안 오면 좋긴 하지.”

결국, 두 사람을 거실로 들이고 하나 있는 좁은 소파를 내줬다. 건장한 성인 남자 둘이서 끼여 앉아있는 모습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바닥으로 내려오라고 권유했다.

삼촌은 슬쩍 엉덩이를 끌고 내려와 옆으로 다가왔고, 형은 정장 자켓을 벗어던지고 셔츠를 걷어 올리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야. 물만 있는 건 심하잖아. 술 없어?”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왜 술을 찾아.”

“휴가 쓰면 되지.”

“누가 숙취로 휴가를 써.”

형은 아쉬운 대로 라면이라도 먹어야겠다며 냄비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형이 다 끓은 물에 면과 스프를 넣을 때까지 삼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 오셨어요?”

“이번에 시청자 게시판에서 참가자들에게 보고 싶은 걸 요청하는 이벤트 진행할 예정이야. 오늘 자정에 폼 열릴 거야.”

삼촌은 본론이 아닌 게 분명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

“예상 요청들을 몇 개 꼽아봤는데 벌써 불안한 거 있지. 폼이 터지는 경우도 있다던데.”

“게임하는 거나 개인기 보여달라고 하겠죠. 아, 저 개인기 없어요.”

“너 때문에라도 최대한 단체 활동으로 뽑을 거야. 아니면 팬들 다 떨어져 나가게 할 만한 개인기라도 하나 해볼래? 너 랩 못하잖아.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랩을 해보는 건 어때?”

아무래도 삼촌의 영혼이 잠깐 육체를 이탈한 상태인 것 같다. 그 증거로 자꾸 뒤에 있는 벽을 보면서 말을 한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삼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인데요?”

“음…… 문제라기보다는 기회지. 우리 방송국 음악방송 쪽에서 제의가 들어왔거든. 우리 요즘 화제성 좋으니까 무대 한 번 세우면 어떻겠냐고.”

“음악방송이요?”

“홍보도 할 수 있고, 음방도 타고, 시청자들 부를 수도 있고. 게다가 이게 신곡이잖아, 반응 좋으면 녹음도 생각 중이거든.”

삼촌은 말이 길어질수록 횡설수설했다. 시선도 점점 더 이상한 곳으로 옮겨갔다.

“그러니까 결론은 판이 엄청 커졌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근데 나한테 출연 여부에 대한 선택권이 없어. 어쩔……까? 음방은 한 2주일쯤 뒤로 잡혀 있는데.”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삼촌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번 마지막 통편집으로도 탈락까지는 못 보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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