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화번호 교환하자.”
“……청춘 영화 찍어요?”
대망의 팀 미션 촬영 당일, 세트장에 도착하자마자 준과 지구를 찾아 휴대폰을 내밀었더니 오글거린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냥 번호 좀, 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부담스러운 표현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요즘 애라서 생각하는 게 다른가 보다.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걸 망각하고 애늙은이 기질을 마구 발휘해서 준을 이해해 말을 정정했다.
“번호 좀.”
“주세요.”
휴대폰을 손에서 쑥 빼간 준이 빠른 속도로 숫자 다이얼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저장도 하지 않은 채 지구에게로 휴대폰을 패스했다.
“하현이 형이 알아서 저장하게 저장명은 내버려 두세요.”
지구의 저장명을 직접 적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며 준이 뿌듯하게 웃었다. 두 명의 전화번호가 남은 휴대폰을 돌려받고 저장명을 입력했다. 본인들 이름으로 오타 하나 없이.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준이 눈을 찡그렸다.
“형 진짜 정 없네요.”
길게 투덜거리기 위해 시동을 걸던 준은 촬영 시작한다는 말에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세트장에 26명의 참가자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섰다. 아직 2차 미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 이 세트장 안에서 유일하게 MC만 싱글벙글하였다.
나 역시 미션 내용을 줄줄이 알고 있었지만, 싱글벙글 웃을 수는 없었다. 곧 다가올 지옥이 두려워서.
삼촌이 말해준 2차 미션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더 컸다. 마지막으로 남는 최종 5명을 데려갈 후원 소속사에서 보내준 노래 4곡으로 팀을 짜고 공연을 하는 것이 미션의 내용이었다.
만들어진 노래도 아니고 새로운 곡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부터 부담인데, 중복으로 누를 수 있는 영상 추천 수도 아닌 제대로 된 투표까지 진행한다니. 방청객을 모집해서 진행되는 무대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었다.
“1차 미션에서 살아남은 26명. 일단 정말 축하드립니다.”
MC가 혼자서 짝짝 박수를 치자 참가자들은 그 누구도 별로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손바닥을 몇 번 부딪혔다. 박수 소리가 세트장 천장까지 올라갈 무렵, MC가 새 멘트를 꺼내 들자 세트장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졌다.
이어지는 말은 알고 알고 있던 내용과 같았다. 팀 미션이라는 말에 모든 참가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MC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질수록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무슨 곡일지 궁금해하는 목소리들이 대부분이었고, 중간중간 한숨 소리도 들렸다.
“노래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팀부터 짭니다.”
“네?”
이상한 방식에 놀란 목소리들이 웅성거림을 더욱 키웠다. 이건 삼촌에게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일단 곡에 번호를 부여해두고 랜덤으로 배치한 다음 맞는 노래를 공개해줄 모양이었다.
신박하게 엿 먹이는 방식이라 벌써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춤에 대한 걱정은 없었지만 컨셉에 영향을 엄청 받는 타입이었다.
“1번 곡, 2번 곡, 3번 곡, 4번 곡. 정원은 각각 6명, 7명, 7명, 6명입니다. 투표는 개인별로 진행되기 때문에 인원수가 적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습니다. 1등부터 앞으로 나와서 상자 안에 들어있는 종이 하나 뽑고 들어가면 됩니다.”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그렇듯 높은 순위의 사람부터 불러냈다. 바로 뒤에서 같은 팀으로 가자며 살짝 작당하던 사람 둘은 제비뽑기라는 말에 탄식을 흘렸다.
정해진 사실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종이를 뽑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신중한 얼굴로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고 한참을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수로 두 장을 한 번에 꺼내서 황급히 다시 상자 안으로 쑤셔 넣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두 눈 꼭 감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솔직히 좀 귀여웠다. 어차피 원하는 걸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손에 기운을 담는 게 웃겨서. 사실 그게 준이었다.
“종이 확인해주시고 해당 방으로 입장해주세요.”
아까부터 벽면에 걸려있던 흰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드러난 자리에는 네 개의 문이 있었다. 그것도 각자 개성을 마구 발산하는 컬러풀한 문들이. 새빨간 색의 문에는 1이라고 적혀 있었고, 바로 옆, 대비되는 차가운 파란색의 문은 2번이었다. 3번 문과 4번 문 역시 눈을 확 사로잡는 진한 풀색과 노란색이었다.
나는 빠르게 색과 번호를 스캔하고 손에 들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남의 일기장 몰래 훔쳐보듯 괜히 긴장돼서 확 펼칠 수가 없다.
[4]
노란색. 금방이라도 병아리가 삐약삐약하며 튀어나올 것 같은 문을 바라보며 잠시 허탈감에 잠겼다. 설마 귀엽고 상큼한 노래는 아니겠지. 자고로 아이돌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컨셉을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하지만 나는 아이돌 지망생이 아니었다.
“아…….”
노란색이라고 무조건 귀여운 곡이라고 생각하면 고정관념이지. 애써 가슴 깊숙이 박혀있는 병아리의 모습을 떨쳐내려 애쓰며 4번 방문 앞에 섰는데 이미 주변이 휑했다. 머릿속에서 혼자 삐약 대고 있을 때 다들 칼같이 입장한 모양이다. 이왕이면 높은 등수에 있는 사람들은 좀 피하고 싶었다. 괜히 같은 팀으로 얽히면 관심받으니까.
“이거 완전 밸런스 붕괴 아니…… 어.”
“안녕…… 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 소름 끼치는 고요함에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앞에 앉아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1등도 있고, 3등도 있고. 팀 구성이 엄청났다.
진짜 엄청나서 그대로 문손잡이를 부술 뻔했다. 저 화려한 금발 머리는 성원이 분명했고, 얌전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도 지구가 확실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삼촌이 경악할 것 같아서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인기 멤버들이 몰려있는 조는 분량 절대 못 잘라내니까.
“끝판왕까지 들어오셨다. 우리 조 이제 어떡해요.”
더 웃다가는 눈꼬리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나게 웃어 젖히는 저 사람도 분명히 상위권이었다. 이름이 이가온이었지. 무대는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삼촌과 함께 봤던 1화 방송에서 여기저기 카메라에 얼굴을 열심히 비추고 다녔던 게 기억났다.
움푹 파인 보조개에 즐거움이 가득 고여있는 것 같아서 발걸음을 돌려 다른 방으로 옮기고 싶었다. 잘못 들어온 거였으면 좋겠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살짝 뒤를 돌아봤지만, 안쪽까지 노란색인 문짝은 바뀌지 않았다.
화제성은 따 놓은 당상인 조에 들어왔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카메라에 대고 하차 선언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러 참으며 자리에 주저앉자 침묵이 밀려왔다. 옆쪽을 힐끔 쳐다봤지만, 소규모의 촬영팀이 묵묵히 이쪽을 찍고 있을 뿐 삼촌은 당연히 없었다.
“악, 깜짝이야.”
고요하던 방 안에 소리가 울려 퍼진 건 순식간이었다. 하얗게 비어 있던 왼쪽 벽면에서 스크린이 내려오더니 영상 하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남자 여섯 명이 처음 듣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게 무대해야 할 노래구나. 우려했던 바와 다르게 상큼한 곡은 아니었다. 그냥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듣는 아이돌 노래 같았다.
하이라이트 부분이 굉장히 중독성 있었고, 동작 자체는 복잡하지는 않지만, 칼같이 맞아떨어지는 화면 속 안무는 굉장히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가온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것만 봐도 그랬다.
“저거 그대로 연습해야 하는 건가요?”
“어렵진 않겠네요.”
성원이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지구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춤에 별로 자신이 없나? 추측을 하는 와중에 답변이 돌아왔다.
“안무는 원하는 대로 중간중간 수정해도 되고, 아예 갈아엎고 만들어도 돼요.”
나름 전문가가 만든 안무일 텐데 쿨하게 수정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에 좀 당황했다.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춤을 잘 추는 건 아닐 테니, 수정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도움이 되는 일인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조금 전에 봤던 영상의 전체적인 동선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조장을 정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장하실 분?”
조장은 분량을 많이 가져갈 수 있는 자리니까 누군가 손을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전 조장같이 리더십 필요한 건 안 맞아서.”
가온이 곰살맞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슬쩍 한 발을 뺐다. 다들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고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눈에 띄면 안 돼서, 아까 영상 볼 때 거의 구석에서 춤추는 자리까지 봐놨는데 그 노력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네요. 투표로 정할까요?”
가온이 후다닥 A4용지 한 장과 볼펜을 받아왔다. 적당한 크기로 종이를 찢어 만들어진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왕이면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할 사람이 좋겠지. 인기도 많은 사람이 조장까지 먹으면 정말 관심이 팍 쏠리겠다 싶어 김성원,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었다. 실력도 좋으니까 잘 가르쳐주겠지.
잠시 지구를 쓸까도 고민해봤지만, 아직 고등학생이라 결국 성원으로 마음을 굳히고 용지를 반으로 접어 제출했다. 다 나랑 비슷하게 생각했겠지, 싶었는데.
“조장님 축하드려요.”
공중에서 수십 번씩이나 박수를 쳐대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김성원이 적힌 투표용지 한 장을 제외하고 전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얘네 조장하기 싫어서 뒤에서 짠 거 아니야?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만장일치에 입술만 열렸다 닫혔다. 뭐라도 따지고 싶은데 그럴 용기는 없었다. 졸지에 조장까지 떠맡게 되는 바람에 짜게 식은 얼굴을 향해 카메라가 다가왔다.
삼촌 미안해. 삼촌 노력을 다 짓밟고 있어. 투표로 정해진 거니까 하기 싫다고 땡깡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애써 웃음을 띄워가며 말했다.
“일단 의견 내볼까요?”
곧 제작진 측에서 아까 그 영상이 담겨있는 태블릿PC를 건넸고, 영상을 돌려보며 의견을 나누려고 했다.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3분 만에 박살 났다.
“시작 부분이니까 고치는 게 나아요. 임팩트 줘야 하잖아요. 이건 너무 밋밋하고요.”
“불필요한 요소를 넣는 것보다는 이미 정해진 부분을 완벽하게 하고 가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요.”
“첫 부분이 강렬하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예요. 다 뜯어고치자는 것도 아니고 여기만 수정하면 어떨까 해요. 어렵게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서 난도 조금 더 올라간다고 못 추진 않을 거 아니에요. ……하긴 좀 부족해서 실수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가고 싶을 수도 있죠, 뭐.”
영상은 약 5분째 0:13에 머물러서 다시 재생되지 못하고 있었고, 분위기는 아주 살벌했다. 첫 부분부터 샘솟는 아이디어를 대방출 해내는 성원과 지구 덕분에 잘 흘러가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의견이 부딪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성원은 손바닥을 탁탁 쳐가면서 강력하게 의견을 어필했고, 지구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 강력한 주장을 눌렀다. 덕분에 나머지 조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사실 여기 사람들이 전부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도 아니고, 랜덤으로 모인 사람들이라 서로 실력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지구의 말처럼 하는 게 맞았다. 주어진 동작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쓸데없이 안무를 화려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저는 그냥 아무렇게나 해도 될 것 같아요…….”
“저도 괜찮아요. 쉬운 쪽이면 좋긴 하겠지만.”
생각보다 팽팽하게 이어지는 의견 싸움에 지친 듯 나머지 조원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말을 내뱉었고, 지구가 먼저 한 수 접었다.
“그럼 최대한 저희 조원들이 다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만 수정하는 거로 하면 될 것 같아요.”
“아, 그러게요. 딱 좋네요. 완전 괜찮죠, 조장?”
그제야 1차 싸움이 막을 내렸다. 달랑 도입부 안무 정한 것 가지고 벌써 기가 다 빨렸다. 이 기세로 나머지 안무는 어떻게 수정하고 파트는 또 언제 분배하지, 연습 들어가려면 오늘 안에 적어도 절반은 정해야 하는데,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단체 미션이다 보니까 책임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장만 안 됐어도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