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8화 (8/130)

#8

소감을 끝내고 내려오자마자 발표된 3위는 지구였다. 2화 맨 첫 무대로 들어갔는데 반응이 엄청났단다.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하고 들어올 것 같았던 지구는 생각보다 긴 소감을 남겼다. 진심이 가득 담긴 한 마디 한 마디를 카메라에 저장하고 돌아오는 뒷모습이 들떠있었다.

“잠깐 쉬는 시간 가질게요.”

대망의 1, 2위 발표만 남기고 다시 한번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삼촌에게 달려가서 괜찮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많은 참가자들의 눈을 다 피해 메인 PD님 옆자리의 삼촌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웃어! 다급하게 스마일을 강조했던 삼촌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표정이 꽤나 심각했던 모양이다.

“형, 4등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어요?”

물이나 한 모금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편 순간, 준이 다가와 의자 아래에 주저앉았다. 9등이라는 높은 등수를 받아서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하였다.

“9등 축하해.”

“형이야 말로요. 얼마나 감동했으면 얼굴이 울상이에요.”

“뭔 울상이야.”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요. 입만 웃고 있더만. 하긴 저였어도 4위 했으면 감동해서 울었을지도 몰라요. 방금 9위로 생존 스티커 받고 올라와서 눈물 핑 돌았거든요. 욕만 먹고 나가리 될 줄 알았는데,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있구나 싶어서요. 형도 그렇죠?”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얼굴에 할 말이 없었다. 아까까진 4위라는 등수가 체감되지 않았지만, MC에게 들은 추천 수는 무척이나 높았다.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는 그 시간 동안. 그 짧은 영상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본 걸까.

“그러게, 기쁘다.”

한 번 더 도전하기에는 용기가 안 나서 포기했던 것뿐이지 춤에 미련이 없는 게 아니니까. 과분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춤을 칭찬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기분이 좋았다. 이런 인생을 걸어야 되는 프로그램 말고 생활의 달인 같은 곳에 한 번 출연하고 듣는 칭찬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까 지구 형 기분 좋아하는 거 봤어요?”

“너도 엄청 좋아했잖아.”

“저야 뭐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렇죠. 솔직히 제 실력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춤 연습이랑 노래 연습 좀 더 열심히 하려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의욕이 막 생겨요.”

주먹을 꼭 쥐고 의욕을 불태우는 준과, 저 멀리서 멍하니 조명만 바라보는 지구가 보였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고개를 숙여버렸다.

다들 열심히 하는구나. 난 뭘 했지. 고3 때까지 한 번도 변한 적 없이 올곧던 꿈이 지금은 완전히 푹 꺾인 상태였다. 이렇게 적당히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연습하겠다는 준의 얼굴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형 왜 그래요. 또 감동했어요?”

“응, 그러니까 이제 가.”

“아, 왜요! 저 심심하단 말이에요. 다들 예민해서 말 걸면 안 될 것 같아요.”

징징대며 투정을 내뱉는 준에게 생수 뚜껑을 따며 한 마디 해줬다.

“나도 예민해.”

“아, 그렇긴 하네요. 형도 감동 좀 다스려야 하니까.”

“알았으면 좀 가라.”

“괜히 화장 번지게 여기서 엉엉 울지 말고요. 애도 아니고.”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이던 준이 웃으면서 자기 자리로 황급히 돌아갔다.

내가 왜 우냐. 흑역사 하나 더 늘어났다고 눈물 흘릴 수는 있겠다. 저 커다란 카메라에 방금 그 거지 같은 소감이 어떤 식으로 잡혔을지 걱정이 돼서 심장까지 쿵쿵 뛰었다. 삼촌이 통편집은 못 한다고 했는데, 앞의 문법 틀린 문장이라도 잘라줬으면 좋겠다.

어떤 식으로 수정해달라고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쉬는 시간이 다 지나갔다. 성원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한 명이 각각 1위 후보로 나왔을 때는 이미 화면까지 다 구상한 뒤였다.

이렇게 높은 등수 선물해주셨으니까 더 노력하겠습니다. 간단한 소감을 말하고 뒤돌아가는 뒷모습을 빠르게 줌 아웃하고 바로 3위로 넘어가는 완벽한 구성.

“김성원 군이 노래와 춤을 한 번에 다 보여줘서 더 화제가 됐었는데요.”

“네. 보여드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돌은 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 직업이잖아요. 뭐 하나만 하는 게 아니라.”

환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답을 해나가던 성원은 결국 1위를 거머쥐고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감부터 실력까지 대단했다.

춤이나 노래 하나만 준비해온 참가자들을 광역 저격하는 발언이었음에도 누구도 태클을 걸 수가 없었다. 성원은 누구보다 데뷔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것처럼 보였으니까. 삼촌도 데뷔할 것 같은 사람으로 성원을 망설임 없이 뽑았을 정도로.

1위까지 발표가 끝난 뒤에는 탈락자들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다. 괜히 속상하게 이딴 걸 왜 시키는 건가 싶었지만, 방송의 재미 때문이겠지 싶어서 얌전히 들었다. 생존자들이 다 보고 있는 상황에서 두 손으로 마이크를 움켜잡은 27위 참가자가 입을 열었다.

“이 프로그램은 여기서 끝나게 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거예요.”

이 장면이 얼마나 극적으로 편집돼서 나올지 예상이 끝나서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소년의 꿈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자막이 휘갈긴 글씨체로 나올 것 같았다.

그 떨리는 목소리의 포부를 들으며 옆자리 사람은 불안한 숨을 들이쉬었다. 평범한 자신에 대한 자학을 멈추지 않던 옆자리 사람은 32등을 부여받았다.

“다들 수고했어요! 26등부터는 내일모레 10시까지 여기로 오면 돼요. 다음 미션 들어갈 거니까요.”

해산 지시가 내려오자마자 다들 칼같이 세트장 밖으로 발을 뺐다. 친해진 몇몇 참가자들은 탈락자를 위로해주기도 했지만, 그것도 몇 명뿐이었다.

딱히 참가자들끼리 교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하겠지. 그게 가장 다행인 점이었다. 솔직히 단체 활동은 불편하니까, 괜히 안면 트는 사람 많아지는 것도 나중을 생각하면 별로고.

눈물을 흘리는 한 남자를 위로하느라 정신없는 몇 사람을 살짝 피해서 세트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삼촌이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팔을 잡아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삼촌 때문에 세트장 구석을 참 많이 와보는 것 같았다.

“너, 너, 아까 그 소감 발표할 때 왜 그랬어!”

“삼촌이 웃으라면서요.”

“그게 웃는……”

삼촌이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멍하니 벌리다가 가슴팍을 주먹으로 몇 번 팍팍 내리쳤다. 저러다가 아프다고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이 실린 과격한 주먹질이었다.

“눈은 울고, 입은 웃고 그건 무슨 총체적 난국 같은 표정이냐?”

“아까 준이도 그 소리 하던데 뭐 어땠길래요.”

“사랑하는 사람 눈물 참으면서 보내주는 표정이더라.”

그건 대체 무슨 표정이에요? 묻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삼촌이 웃으라고 해서 억지로 웃었을 뿐이지, 울상을 지은 적은 단연코 없었다. 속으로 하차하고 싶다는 생각은 좀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최대한 편집해볼 테니까.”

“누가 보면 삼촌 편집팀인 줄 알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게다가 편집장이 자바칩 프라푸치노 밖에 안 먹어.”

삼촌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몇 번 흔들었다. 완벽하게 비어있지는 않았지만, 지폐가 몇 장 남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커피 한 잔 사드릴까 싶어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에 삼촌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음 미션이, 뭐? 잘못 들었나 싶어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뭐요?”

“아, 하하……. 너한테만 빨리 말해준 거야. 아무도 모르는 내용이잖아.”

“……팀 미션이라고요?”

“원래 다른 거였는데, 2차랑 3차랑 순서를 바꿨어. 3차 미션이 많은 인원으로 진행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서.”

단체 활동 없어서 좋다고 생각한 지 몇 분 안 됐는데, 삼촌이 그 안일한 생각을 마구 밟아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근래에 삼촌이랑 대화만 하면 기가 빨렸다.

“정확히 어떤 팀 미션인데요?”

“뭐겠냐, 그룹 만들어서 무대하는 거지……. 자세한 건 내가 문자로 보내줄게.”

“삼촌 문자 길게 못 보내잖아요.”

“……메일로 보낼게. 근데 이런 거 보내주는 거 다 비밀인 거 알지? 혹시라도 말하고 다니면 안 돼.”

말할 사람도 없는데 삼촌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유출 경로 생각보다 많아요. 당장 스태프 스포만 해도 널린 게 얼마나 많은데요.”

“넌 뭘 그렇게 잘 아냐.”

“아이돌 잠깐 좋아했잖아요.”

“맞다. 너 노블 좋아했었지?”

삼촌은 떠오른 기억이 굉장히 반가운 듯 환하게 웃으며 박수까지 두 번 쳤다.

“너 처음 사인회 가려고 했을 때 나 불렀던 거 생각나냐? 몇 장 샀더라, 어쨌든 엄청 사서 개봉하니까 사람들 몰려들어서 포토 카드인가 그거 바꿔 달라고 하고. 기억난다.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그만뒀어?”

“몰라요. 그쪽도 슬럼프 왔었던 것 같아요.”

가장 소중했던 춤이 슬럼프가 와버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손에서 놓게 됐던 것 같다.

어느 순간 그 칼군무들을 봐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을 때, 동경의 마음을 잃었을 때 완벽하게 끊었다. 앨범도 싹 버리고. 혼자 과거에 젖어있는 사이 삼촌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대상은 나였다.

└ 하현이 데뷔길만 걷자ㅠㅠㅠㅠㅠㅠㅜㅜㅠ 전투력 오른다 ㅅㅂ

└ 설마 2화까지 통편일줄은 몰랐고요 ^^! 편집실력 대단해!

└ 안정권까지 넣어서 다행ㅠ 이왕이면 높은순위 주고싶은데ㅠㅠㅠㅠㅠㅠ

“2화까지 통편집해서 네 팬들 끓어오르는 중이야. 밤길에 각목으로 뒤통수 맞을까 봐 무섭다니까.”

“…….”

“뚝배기였나? 메인 PD님은 그것도 깨지게 생겼어.”

팬들 전투력이 높아 보였다. 좀 무서워져서 삼촌에게 합리적인 해결책을 건넸다.

“하차는 어때요?”

“그건 좀, 프로그램 이미지상…….”

“교통사고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나가는 컨셉은요?”

“삼촌이 미안하다. 촬영만 잘 끝나면 집 앞 편의점은 못 사주고 집 안에 미니 편의점 정도는 들여놔 줄게. 라면 온수기도 딱! 들여놓고.”

안쓰러울 정도로 횡설수설하는 삼촌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라면 온수기는 좀 탐난다. 맨날 커피포트에 끓이기도 좀 지쳤는데. 고개를 끄덕이자 삼촌이 고맙다는 듯 양손을 꼭 잡아 왔다.

“내가 미쳤다고 너를 넣어서 이런 고생을……. 차라리 내가 나갈걸. 그랬으면 33등은 그냥 확정인데!”

뒤늦게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고 앉아있는 삼촌의 어깨를 두 손으로 꾹 눌러주고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가끔 삼촌이 저렇게 이상행동을 보일 때는 피하는 게 좋았다. 제대로 된 인사도 안 하고 휴대폰만 챙겨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내일모레 만날 예정이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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