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대기실은 가만히 휴대폰만 만지며 침묵하는 사람 반, 말문을 좀 텄는지 떠드는 사람이 반이었다. 나는 가식적으로 오가는 대화들을 애써 무시하며 주변을 관찰했다.
다들 일반인이라 이쪽에서 메이크업해준다고 들었는데, 벌써 대부분이 메이크업을 끝낸 상태였다. 이쪽도 반짝반짝, 저쪽도 반짝반짝. 아이돌을 뽑는 프로그램의 참가자들답게 훈훈한 외모들을 가진 사람들을 쭉 바라보다가 메이크업 때문에 쌍꺼풀이 유독 도드라지게 보이는 남자를 끝으로 움직이던 시선을 잠깐 멈췄다.
“…….”
“형 뭘 그렇게 눈을 돌려요?”
갑작스럽게 눈앞에 불쑥 나타난 얼굴에 놀라서 벽에 뒷머리를 찧었다.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준의 눈에는 옅은 눈 화장이 되어 있었다.
“교복 입고 왔네.”
대충 뒷머리를 털어내다가 평범한 학교 교복을 입고 온 게 눈에 띄어서 말해줬더니 준이 웃으면서 교복 조끼를 살짝 흔들었다.
“우리 학교 교복이에요. 작가님이 교복 입고 오라고 하셔서. 근데 오는 족족 바로 메이크업 들어간다는데 형은 왜 여기 있어요. 빨리 가요.”
“나도 발 있거든? 내 발로 걸어갈게.”
준이 갑작스럽게 옷자락을 끌어당기더니 대기실과 이어져 있는 분장실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다림질해서 뻣뻣하기 그지없는 셔츠가 사정없이 잡아당겨지며 나는 종잇장처럼 딸려갔다.
질질 끌려간 분장실은 이미 메이크업을 받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때문인지 공기가 꽤 탁했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의자에 앉자마자 빠르게 화장 도구들이 달려들었다.
조용히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분장실 안으로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33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수를 감당하기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수가 적었다. 소파에 앉아서 대기하는 인원들이 계속 늘었고, 손길들은 점점 분주해갔다.
“눈 진짜 예쁘네요, 화장하는 보람이 있어.”
눈꼬리에 무언가를 칠하던 손길이 잠깐 멈추더니 갑작스럽게 칭찬이 날아왔다. 감사하다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잠시 훑어보다가 바로 시선을 치웠다.
곧이어 끝났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의자에서 곧바로 몸을 일으키다가 소파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어…….”
아까 그 사람 같은데. 들고 있던 쇼핑백은 온데간데없었지만, 입고 있던 옷이 똑같은 걸 보니 콘서트장에서 봤던 학생이 틀림없었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은 예상대로 앳돼 보였다.
부드럽게 생긴 얼굴을 이유 없이 한참 바라보다가 저쪽은 자신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해내고 시선을 돌렸다. 지금 좀 예의 없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자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소파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본 내 눈빛이 많이 거슬렸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피해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렇게 밖에서 한참을 대기한 끝에 11시가 조금 넘어서야 33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인원수를 확인하던 스태프가 손바닥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한 명씩 개인 인터뷰 딸게요.”
다들 반짝반짝하게 풀메이크업이 된 채로 서 있으니까, 무슨 음악방송 대기실 복도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확실히 한자리에 모이니까 인원수가 많긴 했다. 이 사이에 끼어있는데 통편집까지 당하면 진짜 존재감 없을 것 같았다.
1화의 대부분은 개인 인터뷰 영상을 넣어서 참가자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끝부분에 무대 영상이 몇 개 들어간다고 앞에 계신 관계자분이 설명했다.
한 명씩 카메라가 있는 방으로 모습을 감추고 꽤 많은 인원이 사라졌을 때, 저 앞에서 삼촌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직 남아있는 다른 참가자들이 보면 괜히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 봐, 조금 기다렸다가 모두가 들어갔을 때 빠르게 뛰어가자 삼촌이 내 팔을 붙잡고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 30분 넘게 진행될 거야. 넌 안 해도 돼.”
“아예?”
“방송에 넣지도 않을 건데 해서 뭐 해. 어차피 저 인터뷰 영상도 나머지 32명 다 못 넣어. 너 하나 안 나온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 없어.”
삼촌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생수 뚜껑을 땄고, 그 당연하다는 어투에 조금 안타까워졌다. 다들 데뷔하고 싶어서 나온 방송일 텐데 그 화면으로 나가질 못한다니.
“분량 조금씩 나누면 다 들어가지 않을까?”
“누가 방송을 그렇게 해. 좀 반응 있을 것 같은 애, 말 잘하는 애 위주로 편집해서 넣는 거지. 그래야 사람들이 봐. 후반부로 가면 더 심해질걸. 아마 순위 측정되고 나면 아래 순위에 있는 애들은 편집할 때 거의 다 잘릴 거야. 원래 방송이 다 그래.”
삼촌이 허겁지겁 물을 한 번에 반 통이나 들이키더니 입가를 대충 닦아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요소가 있어야 보게 되는 게 방송이라지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이 계속 힘들다는 소리를 하는 게 정말 빈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여기서 대충 대기하다가 인터뷰하고 나온 척해. 인터뷰 다 따면 바로 무대 들어갈 거야.”
“33명 다 해?”
“다 해야지. 시간 꽤 걸릴 거야. 넉넉잡아 5시간? 한 번에 촬영하고 1, 2화에 나눠서 들어가. 참가자들 서로 무대 보면서 코멘트하는 거 넣을 거고. 촬영 끝내고는 무대 촬영본 홈페이지에 올릴 거야. 거기서 추천 수로 탈락자 나오는 거고.”
“스케일 크네. 프로그램에 홈페이지까지 딸리고. 그런데 추천 수를 조작하면 어떻게 해?”
“추천 수 조작 안 되게 빡세게 막아놨어.”
그렇게 한참 바닥에 앉아서 삼촌의 설명을 들었다. 프로필 사진이 홈페이지에 언제 공개되고, 공식 기사는 언제 나가고, 그런 중요한 정보들. 꼼꼼하게 챙겨 들었지만, 곧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야, 5분쯤 있으면 다들 끝내고 나온다. 저기 가서 서 있어.”
삼촌의 재촉에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아까 모여있던 장소로 다시 걸어갔다. 중앙에 도착하자마자 저쪽 방에서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나오길래 급하게 팔을 쭉 뻗으며 막 인터뷰를 끝내고 나온 척했다.
“아, 긴장돼서 말 더듬은 것 같아….”
어색함이 흘러내리는 목소리로 기지개를 한 번 펴고 옆 사람의 눈치를 힐끔 살폈는데, 그 사람이었다. 콘서트장에서 줄 서 있던 사람. 아까 분장실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람.
눌러썼던 검은 모자를 벗은 얼굴은 생각보다 더 부드러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아까는 눈이 안 보여서 몰랐는데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완벽한 연예인 상이었다.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몇 번 감탄했다. 진짜 조화롭게, 따지자면 예쁘게 생겼다.
아, 또 정신 놓고 쳐다봤네.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저쪽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또 아까처럼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실패했다. 저쪽이 이쪽으로 조금씩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이 유독 인터뷰가 일찍 끝났는지, 나머지 방들은 사람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쳐다보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었다.
“인터뷰 잘하셨어요?”
일자로 꾹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며 나온 말은 상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노래 부르면 정말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목소리로 지극히 평범한 질문을 던져왔다.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는 없었지만,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대화였으므로 잽싸게 대꾸했다.
“긴장돼서 좀 더듬은 것 같아요. 그쪽……은 잘하셨어요?”
말해놓고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에 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보통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질문해주는 게 대화를 똑바로 이어가는데 가장 좋은 방법인데, 이름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별로 좋은 방법 같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할 줄 알았더니 한참 말이 없다. 그쪽이라는 호칭 때문에 할 말을 잃었나 싶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 이름이 떨어졌다.
“지구예요.”
“지구요?”
“제 이름이요.”
처음에는 뜬금없이 왜 지구가 나오나 했더니 이름이었다. 준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간결하고 정갈한 이름이라고 칭찬해줄 수 있었는데 이건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름이 천문학적이시네요. 이건 좀 그렇고…….
“되게 기억에 잘 남을 이름이네요. 성이 지고 이름이 구……?”
“아니요, 성은 따로 있어요.”
보통은 성까지 붙여서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쯤 되면 성을 붙여서 다시 말해줄 법도 했지만, 지구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대화 주제를 잃었다. 더는 할 말이 없는데 지구는 저쪽으로 걸어갈 생각은 없는지 가만히 서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제 이름은 박하현이에요.”
“네.”
나도 이름 소개나 해서 대화를 다시 이어볼까 했지만, 지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대답하고 끝냈다. 말주변이 별로 없는 애 같은데 나도 썩 친화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쉽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전 열아홉이에요.”
“아, 전 스물이요.”
얌전히 서 있다 보니 지구가 나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예상한 대로 아직 학생이었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어리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10대와 20대의 차이인가.
“고3이면 많이 바쁘겠네요.”
아닌가, 아이돌이 꿈인 애면 오히려 춤 연습이나 노래 연습하는 게 더 바쁜가? 그래도 고3이면 공부하고 그러지 않나.
내 질문을 들은 지구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슬로우 모션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느릿한 속도였다.
“예고 다녀서 공부는 많이 안 해요.”
“예고 다녀요?”
예고 학생이었구나. 갑자기 동질감이 샘솟아서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물으니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학교 이름까지 꺼낸다.
“한국예고 다녀요.”
“어, 저도 거기 졸업했는데.”
이런 우연이 다 있을 수가 있나. 전교생이 몇 명 되지도 않는 한국예고 학생이 고작 33명 사이에 끼어있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추억 속에 묻혀있던 생각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면서 대화가 막히지 않고 술술 진행되기 시작했다.
“어디 과에요?”
“저 실음과요.”
“전 실무과였는데. 같은 과였으면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게요.”
한 박자 쉬고 답이 돌아왔다. 초반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많이 물러가고 정말 평범한 선후배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인터뷰를 끝낸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그중에는 당연히 준도 섞여 있었고.
“형, 잘 끝냈어요?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뿐인 준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옆에 서 있던 지구를 발견하고는 발을 잠깐 멈췄다. 처음 보는 얼굴에 당황했는지 인사를 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방금 만났어. 내가 나왔던 고등학교 다닌다고 해서.”
“아, 서로 아는 사이에요?”
“그건 아니고 그냥.”
“같은 학교인데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만날 일이 딱히 없었지.”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조금 불편해 보이는 듯한 지구를 어떻게 해줘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준의 친화력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안녕하세요. 형이세요?”
“열아홉보다 어리시면요.”
“그럼 형 맞네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네.”
“형 인터뷰 잘하셨어요?”
얜 진짜 스펀지다. 이러다가 여기 있는 참가자들이랑 다 말 트는 거 아닐까 싶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어색함을 물리친 듯한 두 사람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봤다. 오늘만 보고 더는 안 볼 사이인데, 벌써 아는 사람을 둘이나 만들어버렸다.
“형들 오늘 무대 뭐 할거예요?”
“춤.”
“노래.”
“와, 자신감 넘치는 대답. 전 장기자랑인데.”
자기 무대를 한 번 봐주겠냐며 당장이라도 춤출 자세를 잡던 준은 이동하겠다는 말에 황급히 자세를 원상복구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