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침부터 SNS 알림이 떴다. 삭제해야 하는데 괜히 쌓아온 추억들이 아까워 아직 지우지 못한 SNS에는 끊임없이 댓글이 쌓이고 있었다. 마지막 글이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친구 신청 또한 꾸준히 들어왔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애들로부터 생사 안부를 묻는 연락들이 여러 개 와 있었다. 얘네는 질리지도 않나, 대충 화면을 끈 후 꺼진 TV 화면에 비친 얼굴을 체크했다.
졸업 후에는 생필품을 사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 밖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서 안색이 좀 그랬다. 햇빛이라도 좀 볼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를 하며 비척비척 베란다로 걸어가 난간에 몸을 잠시 기대봤지만, 옆집 남자가 피는 담배 연기가 이쪽으로 바람을 타고 오길래 급히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2주 뒤는 생각보다 더 빨리 나타났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쓰고 있던 글을 완전히 끝낸 것뿐이었다. TV 출연이라니, 아무리 분량을 다 잘라도 검색하면 게시글 몇 개쯤은 나올 텐데. 일단 2G폰으로 바꿔야 하나 싶었다.
[더아트 스튜디오고 밑에 찾아오는 길 사진 첨부해뒀어. 버스 타고 오면 10분이면 가]
옷 정리를 미리 해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어젯밤 꺼내둔 무난한 옷 세 개를 쭉 늘어놓고 잠시 고민했다. 약 5분 정도를 가만히 바라보다 회색 맨투맨을 집어 들었다.
“아, 햇빛…….”
더위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날씨에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노출된 부분이라고는 얼굴과 손뿐인데도 온몸이 따가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삼촌이 보내준 사진을 보면서 대중교통에 몸을 실었고 얼마 가지 않아 내렸다.
척 봐도 높아 보이는 건물은 거대한 크기로 사람을 압도했다. 흰색으로 깨끗하게 도배된 건물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됐는지 세련된 디자인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재빨리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있는 층별 안내를 살폈다. 8층부터 11층이 다 스튜디오네……. 최대한 긴장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며 엘리베이터에 타서 버튼을 누르려는데 옆 사람이 먼저 8층을 눌렀다.
“…….”
어려도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애가 묵묵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혹시 출연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표정이 딱딱해서 차마 말은 못 붙이고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그 부산스러운 행동을 거울로 힐끔 쳐다본 옆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몇 층 가세요? 아, 혹시 저랑 같은 층 가세요?”
“네? 아, 네.”
“헐, 형도 그 프로필 촬영 때문에 오신 거예요?”
“형……?”
“아, 죄송해요. 저보다 형이신 거 같아서.”
“아니요, 괜찮아요.”
기껏해야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나름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성이 정, 이름이 준.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대충 간결하고 정갈한 이름을 칭찬해줬더니 “진짜요?” 하고 눈매를 접으며 해맑게 되물었다. 입 다물고 있었을 때는 딱딱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눈도 또랑또랑하고 아직 젖살이 덜 빠져서 그런지 계속 보고 있으니 딱 그 나이처럼 보였다.
“먼저 만나서 진짜 다행이에요, 저 완전 걱정했는데. 형이시니까 말 놓으세요. 저 아는 사람 하나도 없거든요. 형은 있어요?”
“아니. 누구 나오는지도 몰라.”
“명단은 받지 않았어요? 저 살짝 훑어봤었는데 페북 스타도 나오던데요. 저도 셀카 몇 번 봤었는데 실물 진짜 궁금해요.”
따발총처럼 다다다 뱉어지던 준의 말들은 8층에 도착해서야 겨우 멈췄다. 혼자 들어가기에는 문이 엄청 커서 쉽게 손잡이에 손을 대지 못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있는 사이 준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문을 크게 열어젖히곤 인사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인원이 별로 없어서 이곳저곳 눈치를 보며 빈 소파에 앉았다. 일찍 오면 어색할까 봐 일부러 천천히 왔는데. 아무리 친화력이 좋다지만 그나마 안면 튼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준 역시 별반 다르지 않게 머쓱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았다. 다들 초면인 상태인 데다가 스튜디오 안이 워낙 조용해서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 모였어요?”
제대로 세진 않았지만 나까지 합쳐서 약 9~10명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인원수 때문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스튜디오의 사진사로 보이는 남자가 인원수를 세더니 박수를 짝 쳤다.
“다 모였네요. 오늘 프로필 촬영하러 온 건 알죠? 무난하게 갈 테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요.”
잽싸게 인원을 다시 한번 스캔했지만 잠깐 사이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 일은 없었다. 한꺼번에 찍는 게 아니라 몇 명씩 나눠서 찍나 보다, 하고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마자 곧바로 화장대 앞에 앉혀졌다.
꽤 능숙해 보이는 스타일리스트가 내 얼굴을 쭉 훑어보더니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부에 뭘 계속 바르는 데만 한참 걸린다 싶더니 눈 화장을 시작했을 때쯤에는 잠까지 쏟아졌다.
“눈 진짜 예쁘네요, 예쁜데……. 그렇게 자꾸 눈을 꾸벅꾸벅 감으면 화장이 똑바로 안 되는데.”
“아, 죄송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졸고 있다가 지적을 받으니 머쓱해져서 바로 자세를 고쳐앉은 뒤에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양쪽에 앉은 사람들은 익숙한 듯 태연하게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나만 이렇게 불편한 건가 싶어 다시 한번 삼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형 끝났어요?”
적어도 30분은 무조건 넘었으리라 생각하며 비척비척 의자에서 내려오자 먼저 메이크업을 끝낸 준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리게 생겼다고 생각한 준의 화장한 모습은 제법 어른스러웠다. 잘생긴 애들 위주로만 캐스팅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실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묘하게 서로를 탐색하는 듯 예민한 시선을 보내는 눈들이 익숙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니까 적대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지만 벌써 속이 뻐근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왁스로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가 입을 셔츠를 쥐고 황급히 탈의실로 도주했다.
“어쩐지 익숙하더라.”
“하하, 뭐. 그냥 대충 연습하고 있었죠.”
“이런 데 나올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에이, 무슨. 저도 지금 다 똑같은 참가자 입장인데요.”
내가 조금 늦은 건지 탈의실 안에서는 이미 한창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처음 왔을 때의 그 어색한 분위기는 이미 증발한 지 오래인 듯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4명이 모여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운데 서 있는 금발 머리 남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김성원이네요.”
“알아?”
“알죠. 오디션 프로그램 나왔잖아요. 예전에. 유명한 소속사 들어갔다가 데뷔하기 직전에 나왔을걸요.”
준이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정보를 전달해주다가 뒤늦게 자신의 셔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뭐였지? 계속 보다 보니까 익숙한 것 같기도 한데. 결국, 탈의실에서 나올 때까지 프로그램 이름은 떠올리지 못했다.
“한 명씩 여기 의자에 앉으면 돼요. 상반신만 나오니까 표정에 신경 좀 써줘요.”
왜 바지는 안 주나 했더니 전신샷이 아니구나. 전문가 포스를 풍기는 사진작가님의 말에 절로 몸이 굳었다. 분명히 인자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하고 있지만 묘하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순서는 아무렇게나 랜덤으로 불리는 건지 조 씨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맨 먼저 지목됐다. 긴 다리로 의자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석에 있는 대기자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 명씩 스튜디오에 불러서 찍는 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환경이라 다들 말이 없어졌다.
“아, 형. 왠지 다음 저일 것 같아요.”
“너도 이런 거 처음이야?”
“아뇨. 저 이모부 쇼핑몰 피팅모델 도와드린 적 있어서 처음은 아닌데…… 사실 얼굴 나오는 건 처음이에요. 아, 진짜 나다.”
입술을 살짝 내밀고 경험을 털어놓던 준이 불리는 이름에 벌떡 일어났다. 얼굴 나오는 건 처음이라던 준은 생각보다 잘했다. 잘 웃고, 각도도 잘 잡고. 사진작가님은 만족스러우신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고 바로 다음으로 내 이름이 불렸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앉아봐요.”
삼촌이 미리 얘기를 넣어놨다더니 정말 최대한 긴장을 풀어주려고 하시는지 작가님이 웃으며 카메라를 잡았다. 처음에는 조금 긴장이 돼서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있었는데 잘 찍을 필요가 전혀 없는 대타라는 게 뒤늦게 떠올라서 금방 괜찮아졌다.
“좋아요. 그대로 계속, 표정 좋고.”
그냥 무표정한 얼굴일 텐데도 별다른 요구 없이 사소한 동작들 하나하나를 담던 작가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끝 사인을 보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구석에서 휴대폰을 매만지고 있는 준 옆에 주저앉았다.
“형 잘 찍던데요.”
“생각보다 덜 떨렸어.”
“전 아직도 좀 무서워요. 카메라가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 최대한 얼굴 안 나온다, 얼굴 안 나온다 최면 걸면서 피팅 촬영할 때처럼 하긴 했는데…… 무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이 정돈데.”
작게 한숨을 쉬는 준의 모습은 아이돌 지망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촬영이 끝났는데도 아직 긴장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가슴에 손을 올려두고 숨도 한 번 크게 내쉬는 걸 보니.
“그냥 자신 있게 적극적으로 해. 막상 올라가 보면 생각보다 별로 안 떨릴걸.”
“형은 무대에 서봤어요? 얼마나요?”
“대충 여러 번.”
대회 때문에 토할 정도로 많이 서서 몇 번인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났다. 대답을 듣자마자 준은 몇 번 박수를 치면서 역시 경험자 같았다고 떠들었다.
촬영이 다 끝나고 이제 집으로 가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스튜디오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으며 무슨 노래를 들을지 고민하다가 현재 차트 100곡을 전체 재생하고 소리를 최대한 키웠다.
“형은 무대도 잘할 것 같아요.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봤을 때도 진짜 잘생겨서 연습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진짜 연예인 같다고 해야 하나. 형은 진짜 데뷔할 거 같아요, 얼굴만 나가도 반응 쩔걸요? 근데 형 지금 하나도 안 듣고 있죠?”
“뭐라고?”
처음 듣는 곡이지만 멜로디가 좋다고 생각하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준이 툭 치길래 한쪽 이어폰을 빼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아줬다.
사진 한 장 찍었다고 피곤하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삼촌에게 촬영 끝났다는 문자를 남기고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잘했어(이모티콘)]
[이제 무대 준비하면 되겠다]
서서히 감기고 있던 눈이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번쩍 떠졌다. 무대 얘기가 있었나?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누르자 삼촌이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노래는 골랐어?
“무슨 무대 준비를 해요?”
-전에 처음 얘기할 때 말했었잖아. 아, 연습 안 해도 돼. 그냥 노래만 골라와.
삼촌은 평화로운 목소리로 정말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세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다들 개인 무대 하나씩 준비해야 해. 1차 탈락자 선발 자체가 영상 조회 수로 하는 거라서. 아, 근데 어차피 네건 방송에도 안 내보낼 거야.
-2분 이내로. 19금 곡은 안 되고.
삼촌의 설명을 들으며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고 누웠다. 개인 무대라니 생각도 못 했다.
-나오는 참가자 영상 하나하나 다 보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그냥 대충 거지같이 해와.
“저 무대 거지같이 할 줄 몰라요.”
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대충 해본 적이 없었다. 설렁설렁 추는 것은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다. 비록 때려치웠다지만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매달렸을 정도로 좋아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좋아하는 음악을 어떻게 대충 할 수가 있을까.
-아, 뭐 그래. 너 귀찮을까 봐 그랬지. 무리하지 말고 해. 사전 미팅 전에 연락 다시 해줄게.
삼촌의 전화가 끊기자마자 휴대폰을 켜서 음악 스트리밍 어플을 클릭했다. 한창 춤에 미쳐 살았을 때 연습곡으로 썼던 노래들이 플레이리스트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참 이어폰을 꽂고 노래들을 하나씩 꼼꼼히 들어보면서 고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괜히 마음이 들떠서 심장 쪽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이왕 달랑 2화 나오고 떨어질 거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